한참 여행을 하다가 길을 잃은 사람이 다시 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갔던 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필수다. 그리고 자신이 지났던 갈림길들 중에서 자신이 가지 않은 다른 쪽을 골라 선택해야 한다.
여행은 때로는 인생과 비슷한 법이다. 왜 반지가 3년 전을 선택해서 거슬러 올라갔는지에 대해 알아야 했다. 인생의 맨 처음이 아니라 중간을 선택했다면 지금 이 시기가 상당히 중요하다는 뜻이 될 것이다. 반지에게 의지가 있다면 말이다.
“테오, 오늘 좀 이상해.”
내 주변에서 표정을 살피던 오펠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관속에 누워있던 마지막 모습이 너무나 강렬하게 인상에 남아서인가. 지금 이렇게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눈에 부시다.
“내가 오늘 이상해? 어디가?”
“아까 우리 집에 왔을 때는 나한테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야기는 안하고, 평소에 안자는 낮잠이나 자고.”
“낮잠은… 그게…….”
이 즈음에 내가 그녀에게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했더라?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황태자 전하께 걸어 다니는 사전이자 수첩이라 불렸던 나지만, 과거의 일들은 단편적으로 중요한 것만 기억하고 있다. 나는 내 얼굴을 보면서 생글생글 웃기만 하는 그녀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고맙게도 먼저 입을 열었다.
“이야기 안 해도 이미 잘 알고 있어. 수도로 가는 걸 의논하려고 그러는 거지?”
“수도? 아아.”
그녀의 말에 머릿속으로 정보들이 스르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난봄 열일곱이 된 나는 이번 가을이 끝나고 첫눈이 내리기 전에 수도 린턴으로 떠난다는 것을 말이다. 가을 내내 아버지와 그 일로 다투었고 우리 둘 사이를 오펠리아와 그녀의 아버지 해밀턴 백작님이 중재하셨던 것도 말이다.
“나는 테오가 수도로 가는 거 찬성이야. 테오는 머리도 좋고 기억력도 좋잖아. 각종 고전 시가도 다 외우고 다섯 개 국어도 하는 사람이 해밀턴에서만 활약하기에는 재주가 아깝거든. 넌 수도로 가서도 잘 할 거야. 그건 내가 잘 알아.”
그녀가 이렇게 말하고선 환하게 웃었다. 이전 내 기억 속과 동일한 어조와 동일한 표정으로 말이다. 그 당시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나는 그녀의 이런 응원에 힘을 얻고 겁 없이 고향을 떠날 수 있었다. 이대로 그냥 진행해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어차피 미래의 나에게는 해밀턴이 아니라 수도 린턴이 본거지니 말이다.
“저기 오펠리아.”
하지만 달라야 했다. 이 시점으로 돌아온 이상 나는 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게 좋았다. 이번 가을이 끝나고 그녀가 열일곱이 된 이후 해밀턴 백작님은 예의 악녀 미망인 칼리아 새튼과 결혼을 하신다. 그리고 백작부인이 된 그녀가 자신의 딸을 데리고 이곳 해밀턴으로 오게 되겠지. 그런 곳에 오펠리아를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응?”
“내가 수도로 갈 때 말이야.”
“응.”
“나와 같이 가자.”
“뭐?”
건성으로 대답을 하던 오펠리아가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를 보는 그녀의 초록빛 눈이 갑자기 커진다.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홍조가 끼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너무나 생각 없이 말을 던진 것이 아니던가. 결혼도 하지 않은 남녀가 같이 수도로 가다니, 이건 마치…….
“야반도주라도 하자는 뜻이야? 그런 거야? 응?”
오펠리아가 장난을 치듯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슬쩍 쳤다. 순간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오펠리아. 나는 그런 게 아니라…….”
무언가 변명거리를 만들어 내어야 했다. 하지만 상당히 잘 돌아가는 내 머리가 순간 고장이 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내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펠리아가 까르르 웃었다.
“알아. 네 말뜻. 내가 그냥 한번 장난쳐본 거야.”
“…….”
“테오, 네가 나를 가족처럼 생각하는 거 잘 알아. 나 혼자 여기에 놔두고 가면 쓸쓸해 할까봐 그런 거잖아.”
오펠리아가 뒷짐을 쥐고서 내 앞으로 먼저 걸어갔다. 그녀의 어투가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그녀의 말의 절반은 맞았다. 나는 그녀를 어느 정도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다. 나의 누나이자 여동생으로, 때로는 그녀에게 의지하고 때로는 그녀를 지켜주었다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야반도주라 생각해도 상관은 없어.”
“테오.”
“내 마음 너도 잘 알잖아.”
“그게…….”
“오펠리아 네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네가 얼마나 나에게 중요한 사람인지 말이야.”
어두운 신전 안에 안치되었던 싸늘한 오펠리아를 아직 기억한다. 내 개인적인 시간으로는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그녀에게 필사의 마음으로 고백했던 것도 기억한다. 너무나 늦어버린 깨달음과 너무나 때를 못 맞춘 고백에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던 것도 말이다.
오펠리아가 나를 돌아다보았다. 그녀의 환한 금발 위로 아직은 뜨거운 9월의 햇살이 부서진다. 이제 다음 달에 열일곱이 되는 그녀는 마치 피어나기 시작한 장미꽃과 같았다. 싸늘한 신전 안에서 파리한 얼굴로 누워있던 그녀에게 사랑을 느꼈던 나의 심장은 생동감 있게 살아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에 다시금 반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심장이 나를 부추겼다.
“너를 사랑해. 오펠리아.”
“테오 그게…….”
“너는 어때? 혹시 내가 싫어?”
이제껏 그녀가 내게 보여줬던 말과 행동들을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린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죄다 사랑의 마음이었음을 이미 한번 스무 살이 되었던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녀의 눈에 묘한 빛이 들어찼다. 그것은 그녀가 무척이나 기뻤을 때 간혹 보이던 빛이었다.
“내가 테오 너를 싫어할 리가 없잖아.”
“응.”
“나도 네가 좋아. 너를 사랑하고 있어.”
“어.”
죽어버린 너에게는 들을 수 없었던 달콤한 이야기가 내 귓가를 간질인다. 내 눈에 절로 눈물이 들어찼다. 눈물이 끝없이 흐르는 샘이 되어 내 뺨을 타고 땅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지난밤 너의 시신 앞에서 흘렸던 그 눈물과 동일하게 뜨거웠다.
“테오 오늘 정말 이상해.”
그녀가 손을 들어서 내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준다. 지난밤에 만졌을 때와는 달리 따뜻하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손이다. 부지런히 내 눈물을 닦는 손 위에 내 손을 올려본다. 그녀의 손은 정말이지 따뜻했다. 나는 나의 결정에 정말 만족했다. 이후 내 자신이 불행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녀의 손에 온기가 있는 이상 그 불행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종종 이상할 지도 몰라.”
“그럼 조금 걱정인 걸? 널 싫어하게 될지도.”
“정말?”
“당연히 농담이지.”
오펠리아가 그렇게 말하고선 두 손으로 내 뺨을 잡아당겼다. 열일곱인 내 뺨이 그녀의 손아래서 쭈욱 늘어났다. 수염 때문에 매일아침 면도를 해야 하는 스무 살의 내가 아니라 가능한 일이리라. 내가 “아야!” 하면서 엄살을 부리자 그녀가 내 뺨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떠난다면 언제쯤 떠나게 될 거 같아?”
“아마도 네가 열일곱 살이 된 후쯤에?”
나는 이전에 내가 린턴으로 떠나게 된 나날을 가늠했다. 열일곱의 나는 겨우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수도로 올라가서 황실 비서관들을 교육하는 교육소로 들어갔었다. 그때 교육이 조금 힘들긴 했지만 뭐 두 번 겪는 일이니 이전에 했던 시행착오는 전혀 없을 것이다.
“너와 내가 이대로 떠나게 된다면 말이야.”
그녀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진다.
“응.”
“우리 아버지들이 조금 상심하실 거 같아. 특히 우리 아버지. 아버지께는 가족이 나밖에 없잖아. 쓸쓸해하실 거야.”
“……그렇구나.”
이후의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잘 알지만 그녀에게 언질을 주지는 않을 예정이다. 비밀이란 원래 하나를 말하면 전부를 다 밝혀야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행복을 위해 그녀가 겪었던 암울한 죽음 따위는 절대 입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다짐이었고 각오였다.
*
이후 우리는 함께 린턴에 올라가는 일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정보를 세심하게 분리하여 그녀에게 말해도 되는 것만을 털어놓았다. 이후 서기관의 삶을 선택하고 싶다 이런 것 말이다. 그때의 나는 그녀와 헤어지고 난 이후 그녀의 외숙인 닥터 코닝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할 일로 가득했다.
하지만 닥터 코닝의 말했던 대로 변수가 있었다. 그 변수는 바로 해밀턴 백작가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