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 전하의 만남은 전하 본인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정말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전하께서는 생각보다 린턴의 지리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셨고, 미아가 된 우리에게 목적지로 가는 최단 거리를 잘 알려주셨다. 그 덕에 린턴 한구석에 길을 잃고 헤매던 우리는 부동산 중계업자와의 약속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가 제 시간에 도착해 만난 부동산 중계업자는 황태자 전하의 피 묻은 의복에 상당히 놀라는 표정이었다. 사실 어떤 누구라 해도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저택을 계약하기로 약속한 지방 귀족의 일행이 피투성이라니.
하지만 그는 길에서 급한 사고로 환자를 이송하다 각혈하는 것이 묻었다는 닥터 코닝의 상당히 구체적인 진술에 곧 얼굴을 풀었다. 이곳은 복잡하고 사람이 많은 도시 린턴이었기 때문에 불의의 사고는 도둑처럼 급습하기 마련이었다.
“자, 여기로 들어오시죠.”
그는 계약의 당사자인 백작님을 오른쪽 응접실로 안내하는 동시에 조금 어린 편인 우리에게 그 옆 응접실에서 쉴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그리고 하녀에게 황태자 전하의 더러워진 손과 얼굴을 씻을 수 있도록 따뜻한 준비하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백작님과 닥터 코닝, 그리고 부동산 중계업자가 복잡한 법률상의 조건을 따지며 어른들만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와 오펠리아는 중계업자가 안내해준 옆 응접실에서 피곤한 몸을 쉬고 있었다.
온 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느긋하게 떠난 여행이었지만 막판에 변수가 생기는 바람에 그녀도 나도 상당히 긴장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오늘 묶기로 예약한 린턴의 호텔에 도착하면 그대로 뻗을 것 같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드리안 전하께서 피에 젖은 옷 대신 내가 가져온 여분의 옷으로 갈아입으시고 들어오신 것이었다. 그분의 비서관 신분이었다면 환복하는 것을 도와드렸겠지만, 이번 생에서 나는 오늘 그분과 처음 만난 상태였다. 그렇기에 혼자 환복을 하기 위해 옆방으로 가신다 했을 때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모른다.
전하께서는 환복을 하신 김에 얼굴과 머리칼에 묻은 먼지도 깨끗이 씻고 오신 상태였다. 그 덕에 크림 빛이 도는 아름다운 전하의 머리칼과 귀티 나는 그분의 하얀 얼굴을 다시 뵐 수 있었다. 꽤 괜찮은 하인들을 두어 그분께 도움을 드린 중계업자에게 그저 감사할 뿐이다.
“정말 그 옷을 계속 입고 있어도 괜찮은데……. 자네의 옷을 빼앗은 거잖아.”
전하의 보랏빛 눈동자에 미안함이 감돌고 있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그런 피투성이 옷을 입고 다니시면서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것보다는 제 옷을 빌려드리는 게 백배 낫습니다.”
“그런가? 신세를 졌다. 아이멜 군.”
황태자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슬쩍 웃음을 지으셨다. 그분이 무언가 만족했을 때 자주 보여주는 매력적인 미소였다. 그리고 그분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참 나와 나이가 비슷한 것 같은데…….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지?”
“열일곱을 넘었습니다.”
“나는 열여덟이니 비슷한 게 맞군.”
“그렇군요.”
“우리 나이도 비슷한데 테오라고 불러도 되겠어?”
“네?”
마지막 그분에 말씀에 나는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러자 그분이 다시금 웃으며 입을 여셨다.
“나도 다른 사람들이 그러든 테오라 부르고 싶어서……. 괜찮을까?”
그분의 말씀을 듣는 순간 내 속에서 무언가 이상한 간지러움이 슬금슬금 올라오고 있다. 그것은 무언가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직전 느낄 수 있는 묘한 감각, 바로 우정의 전조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전의 생에서도 황태자 전하와 격의 없이 지냈지만 그분은 단 한 번도 나를 고향 친구들이 부르듯이 ‘테오’라고 부르신 적이 없었다. 언제나 ‘아이멜 서기관’이란 정식 호칭으로 부르셨고, 내 본명을 부르실 때면 언제나 ‘테오도르’란 내 이름 전체를 전부 다 부르시곤 하셨다. 그건 아마도 우리 두 사람이 완전히 성인이 다 되어서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시간을 거슬러 올라서 다시 삶을 진행하는 내게 또 하나의 변수가 생긴 셈이다. 그분의 제의를 받아들이느냐 그러지 않느냐에 따라 또 다른 갈림길로 걸어가게 될 것이다. 어느 편이 오펠리아의 행복에 더 가까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Yes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분을 나의 주군으로 모실 때부터 가졌던 절대명령과 같은 것이었다.
“저를 그렇게 불러주신다면 정말 영광입니다.”
“그래.”
전하께서 내 말에 잔잔히 얼굴에 미소를 띠셨다. 마치 고향에서 친하게 지낸 친구를 타지에서 만났을 때에 짓는 천진한 미소였다. 2년 전 그분을 공식 석상에서 처음 뵈었을 때와 지금이 너무나 인상이 달라 나는 조금 멍할 뿐이었다. 2년의 세월은 전하께도 상당히 긴 세월이었던 모양이다. 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나저나 그 핏자국은 어떻게 얻은 것입니까? 닥터 코닝의 말에 의하면 그 정도로 피를 많이 흘렸다면 최소한 혼수상태라고 하던데요.”
나는 개인적인 감상을 서둘러 벗어두고 일단 아까부터 내가 궁금해 하던 것을 질문하기 시작했다. 대충 훑어봐도 보통의 사건으로 보이지 않아서다. 그러자 전하께서 진지한 얼굴을 하셨다.
“한 반년 전쯤 공화주의자 쪽에 끄나풀을 하나 심어뒀어. 요즘 그쪽이 심상치 않다는 첩보를 받아둬서 말이야.”
“공화주의자입니까?”
“그래. 그 끄나풀을 만나러 가는 길에 미행을 당했던 것 같아.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워낙 눈치가 빠르고 촉이 좋은 치들이라서 말이지. 끄나풀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나도 바로 도망을 치던 와중이었지. 이 피는 그 끄나풀이 죽으면서 묻은 것이고.”
“그렇군요.”
전하의 요약된 대답을 들으며 나는 3년 전 가을에 신문을 대서특필했던 사건들을 차례차례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때 이미 황실 서기관으로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조간을 보고 크고 중대한 사건들을 머릿속에 넣어두는 것은 나의 일과 중 하나이기도 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을 차례로 떠올렸지만 공화주의자들과 관련된 특별한 뉴스는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린턴의 대학생들 중 일부 과격파가 황실을 반대하는 데모를 하며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구절 외에는 말이다. 그리고 다음해 공화주의자들은 대규모의 파업을 선동하는 것으로 아는데……. 설마 그 파업이 이미 조짐이 있었던 사건이었나?
“혹시 공화주의자 집단에 대해 좀 아는 게 있어?”
내 눈이 차가워지자 전하께서 매서운 시선을 내게 던지셨다. 이전 나와 함께 시찰을 나가실 때마다 내게 단서에 대한 질문을 던지실 때 하시던 시선이다. 나는 조금 망설였다. 그 당시 했던 일들을 고이 재현하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온 것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미래의 일을 바꾸려고 정보를 준다고 해도 과연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생겼던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행동은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어느 선까지 내가 개입을 해도 되는지 아직 알 수가 없다. 지금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내가 생각했던 과거에서 변수가 도대체 몇 가지인지 모르겠다.
“공화주의자 집단이라면 황실의 존재를 부정하고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인가요?”
내가 망설이는 동안 우리의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오펠리아가 우리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황태자 전하의 시선이 내게서 그녀에게로 옮아가며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그렇습니다. 레이디…….”
“테오를 테오라고 편하게 부르신다면, 저도 오펠리아라고 편하게 부르셔도 된답니다. 저와 테오는 친구들에게는 언제나 같이 이름을 허락하는 편이거든요.”
오펠리아가 냉큼 전하의 말씀을 잘라내고선 자신의 말을 했다. 순간 나는 겉으로는 그다지 표현하지 않았지만 깜짝 놀란 상태였다. 격의 없이 말한 오펠리아의 말이 전하께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몰라 속이 조금 타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 나라는 국민을 위하는 정책을 많이 실시하는 나라이긴 했으나 엄연히 신분제 국가였고 그 정점에는 황실이 있다. 그녀의 저런 화법은 린턴에서는 상당히 무례로 통할 수 있는 화법이었다. 고귀하신 황제 폐하나 황태자 전하의 말씀을 끊고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은 못 배운 어린 아이나 용서를 받을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그다지 오펠리아에게 무례를 느끼지 못하신 듯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아직 여인이라고 하기 보다는 소녀에 더 가까운 여성 이어서일 것이다. 게다가 오늘 그녀에게 도움을 받지 않았던가.
“아, 그렇군요. 테오와는 사이좋은 친구로군요.”
황태자 전하의 보라색 시선이 나에게 한번 닿았다. 왠지 그 시선이 조금 따갑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기분이 아닌 것 같다.
“네.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늘 같이 놀았거든요.”
오펠리아가 그렇게 말하고선 포근하게 웃었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우리가 어릴 적 함께 놀 때 보여주던 그런 표정과 동일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