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수도 여행은 일주일 정도의 상당히 짧은 여정이었다. 가는데 이틀, 오는데 이틀, 이렇게 나흘을 길에서 보내기 때문에, 수도에서 머무는 시간은 겨우 사흘 정도다. 그렇기에 우리는 수도에 있는 지인에게 연락 없이 올라온 참이었다.
오늘은 수도에 머무를 집을 계약했으니 내일은 오전에 느긋하게 쉬었다가 계약한 집을 둘러본 이후 짧은 관광을 할 예정이다. 그리고 하루 정도 푹 쉬었다가 쇼핑을 하고 해밀턴으로 내려갈 예정을 세웠다. 그 덕에 우리의 짐은 상당히 가벼운 편이었다. 지인들과 만나지 않고 이곳 린턴 그랜드 호텔에서만 머물 예정이었으므로.
그런데 편지라니? 올라오시기 전에 따로 지인께 연락을 하신 걸까? 나는 백작님의 얼굴을 응시했지만 마땅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수도에 올라와 우연히 만남을 가졌던 황태자 전하도 가능성이 있었지만 이쪽도 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지?
“아버지, 혹시 친구분에게 연락을 하셨던 거예요?”
오펠리아가 편지봉투를 뜯어 심각한 얼굴로 내용물을 읽으시는 자신의 아버지께 질문했다. 편지를 하단으로 읽으면 읽으실수록 백작님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지시는 것 같다. 오펠리아는 물론 닥터 코닝과 내가 내용이 궁금해 속이 타들어갈 때쯤 백작님이 입을 여셨다.
“오펠리아, 네 외숙이 또 한 명 여기에 올 것 같구나.”
“네? 설마…….”
“그 설마가 사실이야.”
“진짜 찰스 외삼촌인가요? 저는 그 사람 정말 싫은데요.”
오펠리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사람 좋은 오펠리아에게는 싫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사실 해밀턴은 사람들이 그렇게 모난 이들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비록 시골이었어도 사람들의 부의 수준이 평균적으로 높은 편이어서다. 게다가 여기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거의 형제처럼 자라온 사람들이라 웬만한 단점은 넘어가는 편이었다. 오펠리아도 그런 성격이었고.
하지만 인간의 모든 법칙에는 예외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성격 좋은 오펠리아에게도 예외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자신의 외숙 찰스 버밍턴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가끔 수도에 사는 자신의 외숙에게 다녀오기만 하면 오만 인상을 다 쓰며 그의 험담을 늘어놓곤 했다.
어릴 때의 나는 그녀가 그렇게 외숙을 싫어할 때마다 대충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편이었다. 아무리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 해도 이 세상에는 기질이 안 맞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라 생각해서다. 하지만 수도로 올라와서 사교계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나는 왜 그녀가 자신의 혈육을 그리 싫어하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여기 있는 사람들과 그가 천적 관계라서다.
“으으으, 우리가 여기로 올라오는 것은 어떻게 알았대요? 아버지, 설마 그 사람에게 우리가 올라온다고 연락한 것은 아니겠죠?”
“당연히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지.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내가 이렇게 호텔까지 빌린 걸 보면 모르겠니?”
“아, 그렇군요.”
부녀가 묘하게 동의하면서 몸을 떨었다. 묘한 공감이 부녀를 오고갔다.
“그나저나 언제 온대요? 설마 밤 12시가 넘어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겠죠?”
“그거야 알 수 없지 워낙 대중없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 오면 저는 그 자리에서 좀 빼주세요. 아버지 손님이시잖아요.”
오펠리아가 그렇게 말하고선 치를 떤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백작님 옆에서 가만히 앉아있는 닥터 코닝에게로 향했다. 나의 시선도 그에게로 향했다. 닥터 코닝은 찰스 버밍턴과 외적으로는 가장 남으로 보여도 실제로는 가장 관계가 깊은 사람이 아니던가.
“왜 저를 보십니까?”
닥터가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했다. 백작님이 조금 심각한 얼굴로 그 질문에 대답하셨다.
“아무래도 자네는 여기서 조금 피하는 것이 좋겠어. 괜히 버밍턴 집안의 가주와 만나서 좋을 일이 없지.”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도 그는…….”
“제가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기 계신 백작님과 오펠리아, 그리고 돌아가신 저의 어머니와 누님뿐입니다. 그는 단지 저와 아버지를 공유했을 뿐입니다.”
닥터가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식전주를 전부 비웠다. 인간에게서 가장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바로 가족의 문제다. 그런데도 저렇게 산뜻하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었던 걸까. 당사자가 아니니 물론 전부 알 수는 없다.
“아, 여기 있는 아이멜군이 오펠리아와 결혼한다면 가족이 조금 더 늘긴 하겠군요.”
닥터가 그렇게 말하고 내게 미소를 보냈다. 사람들을 많이 대하는 이다운 직업적인 미소가 아닌 진짜 미소다. 그의 가족 범위에 나까지 포함된다고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간지럽다. 무언가 닥터 코닝에게 자기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포근한 기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우리가 식사하는 개인실의 문이 열리고 들어와야 할 샐러드 요리 대신에 30대 중반의 잘 차려입은 신사가 폭풍처럼 갑자기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남자는 최고급 소재와 최신 유행의 옷과 구두로 휘감은 상태였다. 나는 아무런 설명 없이도 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외모는 오펠리아는 물론 닥터 코닝과 정말 많이 닮은 편이었다. 물론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알맹이가 다르면 어떤 식으로 분위기가 달라지는지 그는 잘 보여주는 편이었다.
“좋은 저녁입니다, 해밀턴 백작님. 왜 이렇게 호텔에 머물고 계시는 겁니까? 수도에 올라오셨으면 당연히 이 처남을 찾아오셨어야지요.”
“찰스.”
백작님이 애써 불쾌감을 아래로 누르며 그의 인사를 받으셨다. 이런 식으로 사전 연락이나 약속 없이 남의 집이나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개방적인 린턴 사교계에서도 상당히 실례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은 얼굴로 식탁에 앉아있는 나와 닥터 코닝을 차례로 응시할 뿐이었다.
“무슨 일인가? 여기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백작님이 그래도 연장자의 아량을 보이시며 자신의 처남인 남자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그가 오만한 눈썹을 한쪽으로 올리며 대답했다.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자네의 누나인 케이트가 사망한지 7년이 다 되어가네. 그녀의 장례식 때 자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은 하고 있겠지?”
“아, 그거야 제가 젊고 철이 없었을 때의 일이 아닙니까?”
찰스 버밍턴, 지금은 작고한 아버지에게서 작위를 물려받아 버밍턴 백작이 된 그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자신에게 향한 비난을 받아쳤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잘 알지 못했으나 20대 말이었던 그가 누나의 장례식에 술에 취해 나타나 사람들의 앞에서 추태를 부렸다는 이야기는 이후에 들어 알고 있다.
새로 손님이 들어오자 조금 당황한 웨이터가 밖에서 새로 의자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 그의 곁으로 다른 웨이터가 새것으로 보이는 냅킨과 식기를 들고 따라왔다. 우리가 식사하는 테이블은 딱 4인이 먹을 수 있도록 되어있는 곳이라 의자가 모자랐던 것이다.
이런 레스토랑을 하다보면 아주 드물긴 하지만 간혹 저렇게 예약하지 않은 손님이 나타나서 자리를 마련해야할 때도 있다. 그래서 웨이터들은 이런 일이 생길 경우에 대비해 예비 의자를 준비해 대응하는 편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던 버밍턴이 한손을 들어 그들의 행동을 저지했다.
“잠깐, 기다려.”
“뭔가?”
백작님이 여전히 불쾌함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처남을 응시했다. 일단 무례고 뭐고 들이닥친 손님이니 대놓고 쫓아낼 수는 없다. 합석은 이미 기정사실이 아니던가. 새로운 의자가 오는 것은 당연한데 그 움직임을 멈추다니. 뭔가 느낌이 좋지 않다.
“네가 좋겠군.”
버밍턴의 눈이 테이블에 앉은 백작님과 오펠리아를 지나 그녀 옆에 앉은 나를 응시했다.
“네?”
갑자기 지목을 받은 내가 조금 놀라 반문했다. 그가 무슨 뜻으로 나를 지목하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서다. 그러자 버밍턴이 단호한 태도로 내게 명령하듯 말했다.
“네가 자리를 비켜주면 되겠다고. 일어나. 나이도 제일 어리니까 조금 있다가 식사를 하도록 해.”
정말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가 왜 저런 말을 했는지는 대충 알겠다. 새로 내어온 테이블과 의자는 아무래도 원래 세팅되어있는 테이블과 의자에 비해 격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곳에 앉기에는 자신이 너무 귀하고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불청객 주제에 정말 어이가 없어서.
“찰스.”
해밍턴 백작님이 경고하듯 버밍턴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왜 버밍턴이 나를 지목했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나이가 가장 어리니 만만하다 여긴 것이리라.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 해주려는 찰나 백작님이 다시 입을 여셨다.
“그렇게 말하면 자네가 여기서 제일 늦게 왔으니 자네가 기다려야지. 안 그런가?”
“아니, 저는 그게…….”
“초대받지 않은 손님과는 그다지 식사하고 싶지 않으니까 조금 기다리게. 아니면 다음에 약속을 잡던가.”
“…….”
찰스 버밍턴이 무언가 기분이 상했다는 얼굴을 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금 나를 향한다. 나는 몸을 움츠렸다. 이럴 때에는 연약한 척을 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래야 이후의 피해가 적을 수 있고 상대를 방심케 할 수도 있으므로.
“나중에 약속을 잡죠.”
찰스 버밍턴이 그렇게 말하고선 밖으로 나갔다. 폭풍처럼 나타났던 그는 사라질 때도 같은 방식으로 사라진 것이다. 자리에 남은 우리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