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삶에서 내가 칼리아 새튼을 인식한 것은 서기관 시험을 합격하고 난 뒤였다. 그 전에 아버지나 어머니의 편지로 해밀턴 백작님이 재혼을 하셨다는 소식은 간간히 들어왔지만 그녀는 편지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름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서기관 시험에 합격하고 황궁에서 본격적으로 근무하기 시작하면서, 내게 해밀턴은 현재에 소속된 곳이 아닌 과거에 더 가까운 곳이 되고 말았던 것 같다. 그 덕에 왜 해밀턴 백작님이 갑작스럽게 그녀와 재혼을 하셨는지 그 배경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우리 앞에 선 그녀는 2년 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 전에 에리카가 열일곱이었으니, 분명 삼십대 중반은 되었을 나이다. 에스틴 제국의 귀족 여성이 평균적으로 결혼하는 나이는 성년으로 치는 십칠 세에서 이십대 초반이므로.
하지만 눈가에 잡힌 잔주름 몇 개를 제외하고는 20대라 이야기해도 속을 정도로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는 무언가 모른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내 곁에 있는 닥터 코닝의 부인이 남편의 사랑을 받아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그녀는 무언가 다른 마법적인 비법을 사용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다.
“괜찮습니다. 부인.”
우리를 대표해서 해밀턴 백작님이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순간 나와 닥터가 거의 동시에 긴장을 했다. 닥터는 미래에서 온 나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상태여서 그녀가 나중에 어떤 짓을 한다는 것을 전부 아는 상태다. 시간을 거슬러온 나는 당연지사고.
“죄송합니다. 이 아이가 복도에서 조금 산만하게 바람에 제 주의가 흐트러졌나 봅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뒤에서 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녀 하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직 여성이라기보다는 소녀에 더 가까운 그녀는 호기심 많은 눈으로 응접실 안에 있는 우리를 일일이 관찰하고 있었다. 얼마 전 봤던 얼굴에 비해 확실히 어린 티가 난다. 그녀는 칼리아 새튼의 딸 에리카였다.
“에리카 너도 얼른 사과해야지. 너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잖아.”
새튼 부인이 딸을 앞으로 이끌면서 자상하게 말했다. 그러자 에리카가 쭈뼛거리면서 앞으로 나왔다. 이전 삶에서 자랑처럼 어른스럽게 말고 다녔던 그녀의 화려한 붉은 머리는 양 갈래로 땋은 상태였다. 본디 나이보다 어리게 보이는 효과가 있었지만 열다섯인 에리카에게는 잘 어울리는 머리였다. 에리카가 꼬박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단다. 어린 아가씨.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간혹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우리 딸과 비슷한 또래인 것 같은데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지?”
에리카를 바라보는 해밀턴 백작님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딸을 홀로 키우던 아버지라 그런지 어린 소녀를 보면 그저 함박웃음이 나오시나 보다. 그러자 새튼 부인이 웃으면서 딸 대신 대답했다.
“이제 겨우 열다섯이 되었답니다.”
“그러십니까? 여기에 있는 내 딸 오펠리아는 얼마 전에 열일곱이 되었지요.”
두 사람의 대화가 화기애애해진다. 분명 두 사람은 오늘 여기서 처음 만난 것이 맞다. 그런데도 왜 이런 식으로 친하게 대화를 나누게 되는가. 순간 불길한 느낌이 감돌았다. 칼리아 새튼을 피해서 해밀턴 백작님을 겨우 설득해서 수도로 모셔왔는데 수도에서 이렇게 사건의 원흉과 바로 맞닥뜨릴 줄이야. 그것도 우연과 우연을 겹쳐서 말이다.
설마 정해진 운명은 아무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다시 한다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황태자 전하와 만나게 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해도, 찰스 버밍턴과 만난 것은 완전 우연이 아니었던가. 나는 서둘러 둘의 대화를 갈라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저기 잠시만요.”
그런데 내가 행동을 하기도 전에 구원군이 우리의 뒤에서 나타났다. 바로 이곳의 지배인이 하녀와 함께 우리가 빌릴 옷들을 잔뜩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자 오펠리아가 반가운 얼굴로 지배인과 옷 쪽으로 다가갔다.
“아니 뭘 이렇게 많이 가져오셨나요?”
“어제 새로 품위 있는 중년 신사분을 위한 대여용 의복이 들어왔었답니다. 일단 사이즈가 맞는 것은 죄다 뽑아왔으니 한번 입어보시죠.”
지배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에 오펠리아의 얼굴에도 미소가 전염되었다.
“어머 정말 잘 되었어요.”
조금만 더 길게 대화했다면 여기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을 새튼 부인과 에리카는 거대한 짐을 들고 들어오는 지배인과 하녀를 피해 밖에 서 있던 상태였다. 그 덕에 그녀들은 오펠리아와 지배인이 나누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다.
‘응?’
오펠리아와 지배인의 대화에서 ‘대여용 의상’이란 말이 나오자 순간 새튼 부인의 표정에 조금 금이 간다. 무언가 잔뜩 기대한 것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표정이다. 나는 그 미세한 표정의 변화를 마음속에 잘 간직해 두었다.
“저희들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다음 순간 그녀들은 잠시 목례를 한 후에 자신들의 방으로 떠났다. 우아하게 자신의 응접실로 걸음을 걷던 새튼 부인과 달리 에리카가 새초롬하게 뒤를 돌아다보았다. 우리를 돌아본 그녀의 눈동자는 마지막에 나를 응시한 상태였다.
칼리아 새튼이 해밀턴 백작님과 재혼을 한 것은 분명 해밀턴 백작가의 재산을 노렸기 때문이리라. 아까 백작님과 대화하면서 그녀의 시선이 백작님과 오펠리아의 차림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기에 나는 더욱 그런 인상을 받았다. 그렇기에 백작가의 유일한 핏줄인 오펠리아와 백작님 두 사람을 동시에 독살하려 했을 테고. 그러면 백작님은 왜 그녀와 결혼을 하신 것일까?
아까 두 사람의 대화를 관찰했을 때 느낀 것은 백작님이 그녀에게 일반적으로 만난 사람 이상으로 호감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수도 린턴으로 떠나고 두 달도 되지 않아 두 사람은 전격적으로 결혼했다는 것을 보면 분명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서 결혼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테오, 테오는 이게 잘 어울리겠다. 너의 눈 색과 맞는 깊은 네이비라 신선해보여. 이걸로 입어봐.”
내가 나만의 생각에 빠진 동안 오펠리아는 한시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세 남자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전부 고른 상태였다. 나를 위해서는 남색의 정장과 고급스러운 문양의 스카프를 골랐고, 코닝을 위해서는 차콜의 차분한 정장과 붉은 벽돌색의 타이를 고른 그녀다. 자신의 아버지인 백작님을 위해서는 윤이 나는 검은색 슈트와 멋진 무늬의 타이를 골라두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오펠리아가 자신이 고른 옷을 내 목 근처에 대어주었다. 순간 속에서 묘한 기분이 올라온다. 왠지 무언가를 시작할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어머니께서 해밀턴의 양장점에 끌고 가셔서 비슷한 동작을 하셨을 때는 귀찮음 그 자체였는데 말이다.
“응. 괜찮은 거 같아.”
“그러면 여기 구석에 있는 탈의실로 가서 갈아입고 와. 내가 자세히 봐줄게.”
“응.”
나는 그녀에게 그렇게 대답하고선 응접실 안쪽에 구비된 탈의실로 향했다. 이곳 응접실 안에는 칸막이로 된 탈의실이 함께 있었기에, 여기에 옷을 맞추거나 빌리러 온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할 필요 없이 여기서 옷을 갈아입고 수선할 부분을 수선한 다음, 빌려가는 시스템인 것 같았다.
뒤돌아보니 오펠리아가 자신의 아버지와 외숙에게도 옷을 대어보고 권하고 있다. 의상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내가 그녀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한창 아름다움이 물이 오르는 열일곱 처녀가 아니던가.
나는 탈의실로 들어가서 내가 입고 있던 옷을 벗고선 여기의 대여용 옷으로 갈아입었다. 수도 린턴의 잘나가는 양복점에서 만든 옷답게 내게 맞춘 옷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옷은 잘 맞는 편이었다. 내가 옷을 입고 나가자 오펠리아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역시 내가 생각한 대로야. 정말 옷이 잘 받는다.”
“그래?”
거울 속에 나 자신을 비춰보니 그녀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내 옆에 있는 지배인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그녀의 표정도 상당히 좋은 편인 걸 보니 오펠리아가 옷을 잘 고른 건 맞는 모양이다.
“나는 좀 어떠냐?”
탈의실의 문이 열리고 백작님이 옷을 챙겨 입고 나오셨다. 오펠리아가 아버지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정말 멋지세요. 역시 아버지는 검은 색이 잘 받으세요.”
“그러니?”
백작님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딸이 이렇게 다정다감하게 아버지를 챙기는 것이 무척이나 기쁘신 모양이었다. 아까 새튼 부인의 딸 에리카를 봤을 때도 이런 비슷한 눈이었던 것 같은데.
순간 내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해밀턴 백작님이 왜 갑자기 칼리아 새튼과 결혼을 서두르셨나 하는 것 말이다. 어쩌면 오펠리아를 위한 결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수도 린턴으로 떠난 이후 의기소침한 딸이 새로 생긴 여동생과 함께 기운을 되찾았으면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