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현대물
은혈록
작가 : 실라인
작품등록일 : 201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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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소윤(2)
작성일 : 17-12-14     조회 : 44     추천 : 0     분량 : 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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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소윤은 길고 긴 투 핸드 소드를 이름에 걸맞게 양손으로 잡은 뒤 나에게 돌진했다.

 ‘빨라!’

 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이해되지 않지만, 지금 저 한소윤이 내고 있는 속도는 인간이 낼 수 있는 속도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대각으로 크게 궤적을 그리며 다가오는 칼날.

 몸을 굴려 피하는 게 베스트지만 그렇게 반응할 틈도 없었다. 그저 반사적으로 검을 막기 위해 양팔을 간신히 들어 올리는 것이 한계였다.

 당연하지만 투 핸드 소드의 칼날을 평번한 손으로 가드 한다 해도 절대 막을 수는 없다.

 다가오는 칼날의 위력에 비하자니 내 팔은 땅에 굴러다니는 전단지 쪼가리보다도 더 연약해보였다.

 바람을 가르며 나에게 다가오는 저 투 핸드 소드는 분명 내 팔 따위는 가볍게 절단하고, 이윽고 몸통 또한 양단하리라.

 끔찍한 상상이 곧 현실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간절히 소망했다.

 무엇이든 필요했다. 저 날카로운 칼날을, 강한 힘이 담긴 검을 막을 수 있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좋았다.

 내 가족을 위해서, 내 행복을 위해서라도 내 인생이 이렇게 무의미하게 끝나선 안 된다.

 그래.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마음속으로 강하게 빌었다.

 ‘막아라! 막아줘!’

 그런 내 소망이 닿은 걸까. 칼날이 팔에 닿기 직전, 내 몸속 심장부근에 ‘어떤 액체’가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어? 어어?’

 그 액체는 몸집을 부풀리더니 혈액이 순환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스피드로 내 온몸을 헤집었다. 그 순간 나는 그 액체가 가져다준 청량감에 가볍게 몸을 떨었다.

 액체는 내 몸 구석구석까지 탐험하고 나서 만족했다는 듯 다시 심장부근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중 일부.

 얼마 되지 않는 일부분의 액체가 심장대신 내 양팔에 모여 응집했다.

 그리고.

 깡!

 검신과 사람의 팔이 부딪쳤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청명한 소리가 났다.

 “이건…. 또 뭐야?”

 고작 몇 분도 안 됐는데 오늘 학교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의문문을 쓴 것 같다.

 학교 수업 중에 질문을 이렇게 했으면 저번에 봤던 모의고사를 그렇게 망치진 않았을 텐데.

 어쨌든 쓸데없는 생각을 뒤로하고 내 현 상황을 심플하게 설명하자면 ‘내 팔이 은색이 됐다.’로 축약할 수 있다.

 ‘너무 줄였나?’

 정확히 말하면 내 손은 마치 은으로 된 건틀릿을 낀 것처럼 변했다.

 스르릉.

 전완을 전부 뒤덮고 있는 화려한 장식의 건틀릿을 멍하니 보고 있는 나를 뒤로하고 한소윤이 투 핸드 소드를 거뒀다.

 스마트워치로 보이는 손목시계를 힐끗 쳐다본 한소윤은 이번에도 누군가를 향해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목표대상 특이사항 발생. 등급 수성에서 금성급으로 상향조정합니다.”

 그리고. 바로 검을 휘둘렀다.

 “아 뭔데!”

 끝난 줄 알고 내심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나보다.

 흥분한 나머지 욕설이 나온 뻔 한 나는 건틀릿이 왜 생겨났는지에 대한 의문 따위는 잠시 접어두고 다시 한 번 더 칼날을 막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허리정도의 높이로 베어오는 칼날을 막기 위해서 나는 자세를 낮췄다.

 그때 한소윤이 무슨 짓을 한 건지 내게 다가오던 칼날이 방향을 바꿨다.

 순식간에 위로 치솟은 칼날은 올라갈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 머리를 향해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내 양손은 허리 쪽에 가있는 상태. 머리를 막기엔 이미 늦었다.

 ‘오늘 일진 더럽다. 진짜.’

 몇 번이나 더 고비를 넘겨야 될까. 이건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될까.

 칼날이 한 자도 안 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을 때 매 머릿속에 한 가지 방책이 떠올랐다.

 아까 내 몸을 휘저어 놓았던 액체들. 당시 나는 내 몸속에 있는 액체 중 일부가 팔로 응집해 건틀릿이 되었다는 걸 몸소 체감했다.

 거꾸로 말하자면, 내 몸에는 아직 이 건틀릿처럼 될 수 있는 액체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 액체를 다른 신체 부위에 모아 건틀릿처럼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면?

 손에 건틀릿을 덧씌운 것처럼 머리에도 헬멧 같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칼날이 한 치도 안 되는 거리에 당도하자 나는 건틀릿이 튀어나왔을 때처럼 눈을 질끈 감고 강하게 빌었고, 강하게 생각했다.

 ‘제발 되라!’

 깡-!

 ‘윽!’

 머리. 아니, 투구와 투 핸드 소드의 칼날이 맞부딪치자 작은 충격이 엄습했다.

 인용이와 내기했을 때 맞은 딱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팠다.

 칼로 머리가 쪼개질 뻔 했는데 이정도로 끝난 게 어디냐만.

 나는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한소윤과 거리를 벌렸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쇠의 느낌. 투구는 완벽하게 만들어졌다.

 칼날은 눈으로도 쫓지 못 할 정도로 빠르게 내려쳤지만 내 몸 안에 있던 액체는 그보다 더 빨랐던 모양이다.

 시야를 전혀 가리지 않고 호흡에 지장이 없다. 아마 얼굴 쪽이 뚫려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좋아. 한소윤이 공격하지 않는 이 틈에 나머지 부위도 만들어야 돼.’

 투구가 만들어졌을 때도 건틀릿을 만들었을 때와 같이 내 몸 안에 있는 액체 중 일부만 소모되었다.

 갑옷의 면적과 그에 따른 액체의 소모량을 계산해본 결과 전신갑옷을 만들어도 남을 정도의 액체가 남게 된다는 결론을 얻었기에 나는 한소윤이 다시 공격해오기 전에 전신갑옷을 만들기로 했다.

 투구를 만들었을 때와 같은 요령으로 마음속으로 강하게 명하자 내 의지를 받아드린 액체가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행위는 주변의 고요함을 조금도 해치지 않았다. 화려한 섬광이 터지는 일 또한 없었다.

 그저 잠깐. 눈 깜박이는 시간보다도 짧은 한 순간이 지났을 뿐이다.

 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완벽하게 무장했다는 것을.

 한소윤을 경계하면서 나는 내가 입은 갑옷을 살며시 내려다보았다.

 은색의 갑옷은 전체적으로 날카롭게 생긴 풀 플레이트 아머를 연상시켰다.

 몸에 딱 알맞아 날렵해 보이는 흉갑. 간결한 무늬가 세어진 폴드(fauld). 화려한 장식이 달린 폴드런 등.

 기본 은색 베이스에 붉은색으로 여러 장식이나 문양이 그려져 있는 이 갑옷은 마치 현실적인 갑옷이 아니라 게임이나 영화 등에 나오는 디자인을 리파인한 풀 플레이트 아머 같았다.

 “멋진데?”

 온 몸이 보호 된다는 안도감에 마음에 여유가 피어난 걸까?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을 저절로 입 밖으로 내버렸다.

 사실 이런 갑옷을 입어보는 게 남자의 로망 중 하나니까.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한소윤은 눈치 없게 그런 여유를 주지 않고 재빠르게 검을 또 한 번 크게 휘둘렀다.

 나는 속으로 감상할 틈 정도는 달라고 외치며 날아오는 검을 바라봤다.

 ‘뭔가 이상한데?’

 분명 한소윤이 휘두르는 검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정도로 빨랐을 터다 그렇지만.

 ‘느려.’

 지금은 마치 굼벵이처럼 느리다고 느껴졌다.

 ‘아니, 내가 빨라졌어.’

 검을 피할 때 주위의 쓰레기가 검풍에 휩쓸려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빨라진 것이라 확신했다.

 몸을 가볍게 뒤로 제치는 것으로 한소윤의 검을 가볍게 피한 나는 재차 들어오는 한소윤의 검무와도 같은 연격을 쉽게 건틀릿으로 쉽게 막아냈다.

 어찌된 영문인지 전신갑옷을 입자마자 몸놀림이 좋아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 감각도 한 단계 더 진화했다.

 연격이 만들어낸 공기의 흐름. 칼날의 궤적. 바람을 가르는 소리까지 모든 것이 이전보다 더 확연하게 할 수 있었다.

 마치 내 몸을 가두고 있던 얇은 비닐막을 뜯어낸 기분이다. 지금에서야 진정으로 세상과 마주한 것 같았다.

 만약 공기 속에 함유된 기분 나쁜 피 냄새가 아니었다면 상쾌함에 춤이라도 췄을 것이다.

 ‘어? 피 냄새?’

 내가 다친 것은 아니다. 첫 공격부터 갑옷으로 받아냈었기에 피를 흘릴 틈도 없었다.

 그럼 원인은 나에게 있는 게 아니라 한소윤에게 있을 텐데, 한소윤도 나와 싸우면서 딱히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한소윤이 작은 장신구를 가슴에 찔러 넣었을 때 분수처럼 쏟아졌던 은빛 액체가 역시 피였던 걸까?

 그렇지만 내가 입고 있는 은색 갑옷도 비슷한 물질로 된 것 같음에도 피 냄새 따위는 나지 않았다.

 ‘어…. 설마 그건 아니겠지.’

 나는 이상한 생각을 애써 털어냈다.

 그러던 와중 한소윤이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긴장한 표정으로 또 다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한소윤.

 “목표대상…. 특이사항 발생. 등급 금성에서…. 목성급으로 재조정합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곧바로 돌진해오지 않았다. 나를 경계하고만 있을 뿐이다.

 설마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한 걸 알아차린 건가.

 내가 잘못 한 게 없음에도 왜인지 양심이 찔렸다.

 그럴 리는 없겠지. 그리고 중요 한 건 그게 아냐.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어 자꾸만 떠오르는 생각을 억지로 흐트러트렸다.

 찾아온 기회를 쓸데없는 부끄러움으로 날릴 수는 없다.

 마음을 다잡은 나는 한소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왜 날 죽이려고 하는 건데?”

 나름 열성적으로 질문했다 생각했건만 한소윤은 내 물음에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답해줄 말을 고민하는 건지 일관적인 침묵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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