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결해보이기 위해서인지 모든 벽이 하얀색으로 도배되어있는 어떤 방. 그곳에서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거 데자뷰인가.’
얼마 전에도 이런 비슷한 곳에서 눈을 떴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곳은 병원, 그것도 1인실이라 편의를 위한 가구들이 여럿 존재했다면 이곳에는 가구라해도 침대 하나와 다용도 수납장이 끝이라는 것.
아. 환자복 대신 교복을 입고 있다는 것도 달랐다. 주머니 속에 있던 지갑과 스마트폰 등이 전부 사라졌지만 말이지.
‘꿈은 아닌 거 같고.’
꿈이라도 괜찮았을 텐데 애석하게도 정신을 집중하니 가슴속에 있던 예의 그 액체가 1/4정도 차있는 게 느껴졌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왼팔에 건틀릿을 만들었다. 그러자 내 왼팔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건틀릿을 꼈다.
‘아니, 끼고 있는 거 맞나?’
내가 건틀릿을 만들지 않은 오른손으로 왼팔을 쓰다듬었더니 양쪽의 감촉이 제대로 느껴진다.
분명 은색으로 된 건틀릿임에도 불구하고 내 팔은 금속의 느낌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피부와 갑옷이 일체화 한 것처럼.
나는 이어서 투구를 입고 오른손으로 내 얼굴 부분을 만졌다.
매끈했다. 잡티는커녕 코도 눈도 입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 내 입술로, 콧날로 내 갑옷의 감촉을 알 수 있었다.
거기다 숨이 어디로 쉬어지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분명 공기를 마시고 내뱉으며 호흡하고 있다.
‘신기하네.’
나는 고개를 털었다.
얼마동안 기절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교 시간이 지나고도 남을 것이다. 엄마랑 하린이가 걱정하고 있을 텐데, 이런데서 쓸데없는 탐구심을 전개해 나갈 시간은 없다.
“그래서 여기는 어디냐.”
그 어떤 싸구려 모텔방도 여기보다 공들여 꾸몄을 것이란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삭막한 방이다.
창문도 없고 어딘가로 통하는 문만 두 개 달랑 달려있다.
한 쪽 문에는 발 매트가 있는 것이 화장실 같았고 다른 한쪽엔 신발장과 현관이 있는 걸로 보아 밖으로 나가는 문 같았다.
‘그냥 나가도 되나?’
마음 같아선 당장 이곳을 탈출해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난 여기가 어딘지도, 이곳 건물의 구조도 모른다. 괜히 나가서 헤매다가 초록머리의 남자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치도곤만 치를 수 있다.
거기다 나를 특별히 구속하지 않고 이런 방 안에 둔 건 일단은 해치지 않겠다는 의미 일 터. 괜히 방을 나서거나 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리는 편이 좋을 수도 있다.
“끙. 모르겠네.”
나는 그리 중얼거리며 다시 침대에 앉았다. 편하게 생각 좀 하고 싶어 꺼낼 때와는 반대로 액체를 몸속에 가둔다는 느낌으로 운용하여 갑옷을 벗었다.
“힘들다.”
갑옷을 입을 때는 그리 집중 할 필요도 없었는데, 왜인지 벗을 때는 조금 집중해야 했다.
‘이걸 벗는다고 할 수 있으려나? 에이 뭐 어때.’
나는 아예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기지개를 한 번 피자 생각이 차곡차곡 정리 됐다.
‘그래. 일단은 가만히 있자.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
죽일 거였으면 진작 죽였을 거고, 생체 실험을 하는 등 험하게 굴 생각이었다면 이런 곳에 홀로 내버려두지도 않았을 거다.
엄마나 하린이가 많이 걱정 하고 있겠지만, 진짜 걱정하는 상황에 빠지는 것보단 낫겠지.
나는 마음 편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체감으로 대충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 나에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오셨나.
나는 방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과 담담하게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물었다.
“…누구세요?”
방 안으로 들어온 건 한소윤도, 내가 손목을 부러트린 여자아이도, 날 후려 팬 초록머리의 남자도 아닌 처음 보는 여성이었다.
스물 중반 정도 되었을까. 진회색 오피스룩에 깔끔한 단색 리본으로 올림머리를 정돈한 그 여자는 한손에 서류가방을 들고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몸 상태는 좀 괜찮으세요?”
그 여성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로 나에게 인사를 건네자 나도 얼떨결에 대답했다.
“어. 네. 괜찮아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이지인이라고 해요. 급작스러운 상황에 많이 놀라셨죠?”
나는 사업지원팀장 이지인이라 적힌 사원증 목걸이를 걸고 있는 여자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며 말했다.
“네. 안녕하세요. 어…. 그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내가 상상했던 그림은 녹색머리나 한소윤이 찾아와서 칼을 내 목에 들이밀고 여러 가지 협박과 회유를 병행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디 사무소의 영업사원 같은 분위기의 여성이 찾아와 기분 좋은 미소로 응대하니 당황한 것이다.
다행히도 이지인은 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내 생각이 정리될 때 까지 기다려주었다.
“여긴 어디죠?”
마음속 혼란을 정리한 내가 이지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과연 대답을 해줄까?
내 걱정과는 다르게 이지인은 알아듣기 좋은 어조로 시원하게 말했다.
“이곳은 상이생태학연구소라고 한답니다.”
…알아듣기 좋은 어조지만, 나는 알아먹지 못했다.
내가 머리에 물음표를 여러개 띄우자 이지인은 그 뜻을 다시 풀어서 설명해주었다.
“다른 말로 대(對)위마 정화협회 한국본부라 해요.”
“…….”
“후후. 천천히 설명해드릴게요. 따라오세요.”
이지인은 그렇게 웃으며 나를 밖으로 인도했다.
나는 이지인을 따라 한 층계를 내려와 소회의실이라 적혀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어쩌구저쩌구 연구소라고해서 나는 꽤나 기대했지만, 이 건물의 형태는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건축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있던 3층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회사 건물 같은 구조였고, 그건 이 소회의실이 있는 2층도 마찬가지였다.
약간 실망한 나에게 이지인이 서류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건넸다.
“먼저 여기. 돌려드릴게요.”
이지인은 내 스마트폰과 지갑. 그리고 여벌의 집 열쇠를 나에게 건넸다.
나는 받으면서도 의아했다.
왜 지금?
이렇게 순순히 건네줄 거라면 침대 옆에 놔두던지 했으면 되었을 텐데.
그리 생각하며 스마트폰의 전원버튼을 누르자 지금 시간이 화면에 올라왔다.
오후 9시 32분.
다행히 날짜는 바뀌지 않았지만 충분히 늦은 시간이었다.
엄마랑 하린이가 걱정하고 있을 텐데. 지금 전화라도 해두는 게 나으려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내 표정을 읽은 이지인이 상냥하게 말했다.
“아! 지금은 쓰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요. 학생 어머님에게는 저희가 연락해두었으니까요.”
“예?”
어떻게 알고?
아니, 바보 같은 의문이다. 내 스마트폰은 안 잠가놓으니까 연락처를 뒤지면 충분히 알 수 있겠지.
중요한 건 ‘어떤 말’을 해둔 건가다.
댁네 아들이랑 대판 싸워서 기절시켜두었습니다. 같은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걱정하지 마세요. 상식적인 핑계거리를 준비했거든요. 그것보다 학생.”
“네.”
그 상식적인 핑계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지만 이지인이 순식간에 분위기를 진중하게 바꾸며 말하는 바람에 나는 물어볼 타이밍을 놓쳤다.
“학생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는 건가요?”
“예. 전혀.”
드디어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의 해답을 알려주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생각에 나는 귀를 쫑긋 세워 경청할 준비를 했다.
“먼저…. 미안해요. 저희가 빠르게 사건을 해결 했으면 학생이 이런 일에 휘말리지도 않았을 텐데.”
이지인은 갑작스럽게 사과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다.
“사건이요? 어떤 사건 말씀하시는 건지?”
나는 요점을 짚었다. 예상대로 이지인은 내 질문에 대한 답 대신 이상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천천히 설명해드릴게요. 학생은 혹시 ‘은’ 하면 뭐가 떠오르나요?”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고 오히려 역으로 질문 받았지만 일단 나는 일단 성실히 대답했다.
“은….이면 은메달. 두 번째. 콩. Ag. 은수저. 항균….”
내가 단어를 나열하자 이지인은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라. 작금의 사태를 고려해볼 때 분명 내가 말한 것처럼 평범한 건 아닐 것이다.
그래. 평범하지 않는 것.
분명 한소윤의 검도, 여자애의 단검도, 녹색 머리의 남자의 망토도, 내 갑옷도 모두 은빛이 가미됐었다.
은색의 무구.
나는 혹시나 하며 말했다.
“마물 퇴치라던가?”
“맞아요. 파사. 부정한 것을 멸하는 힘. 은의 본질이죠.”
이지인이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쳤다.
뭔 뜬구름 잡는 소리야?
어처구니 없어하는 나에게 이지인은 더욱 진지하게 말했다.
“학생은 귀신이 있다고 믿나요?”
“아뇨. …설마?”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곧 흠칫하며 말했다.
“네 맞아요. 이 세계에는 상식을 벗어난 수많은 초자연적 존재들이 실존하고 있어요. 귀신, 요괴는 물론이고 크립티드라 불리는 생명체들까지. 저희는 그것들을 통칭 위마(危魔)라 부르죠.”
이지인은 과학기술이 발전된 현대시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 뜬금없게도 초자연적 존재들이 실체한다고 설파했다.
위마? 완전 사이비과학이 다름없네.
평상시였다면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당장 자리를 박차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내 가슴속에 아직도 그 ‘액체’가 느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그것들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어요. 말했죠? 은에는 파사의 힘이 있다고. 힘이 약한 위마는 평범한 은을 가까이 대는 것만으로도 쉽게 무력화 할 수 있어요. 강한 위마도 저희의 방식으로 정제한 은이면 바로 슥삭.”
자신의 목을 그으며 말하는 이지인을 보며 나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못 믿으시겠죠? 그래서 준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