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다.
오늘 학교생활은 그 어떤 때보다 더 힘들었다.
몸의 피로도 피로지만, 인용이를 필두로 여러 애들이 쉬는 시간에 내게 다가와 꼬치꼬치 캐물어 정신적 피로가 쌓인 탓도 있다.
한소윤이 왜 보자고 한 거냐. 어디서 무얼 했느냐. 왜 두 시간이나 걸렸느냐.
귓가에 딱지가 생길 만큼 반복된 질문들에 맥을 추릴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머리를 풀 스로틀로 돌려서 ‘한소윤이 잃어버린 물건을 내가 돌려줬는데, 물어볼 게 있다고 해서 답해주러 간 거다. 용건이 끝난 한소윤은 바로 돌아갔고 나는 몸이 아파서 양호실에 들렸다 왔다.’라는 완벽에 가까운 변명을 한 건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물론 그에 만족하지 않고 더 집요하게 캐묻는 애들도 있었다. 인용이는 쉬는 시간마다 달려와서 징징거렸다.
한소윤의 프라이버시라며 일축하지 않았다면 쉬는 시간 내내 시달렸을 게 분명하다.
한소윤도 이걸 예상했기에 나만 혼자 교실로 올려 보낸 걸지도 모른다.
웬수 같은 계집애 같으니라고.
잠시라도 설렌 나에게 죽빵을 갈기고 싶었다.
어쨌든 겨우 해방된 나는 책가방을 정리해 등에 메고 교실을 나섰다.
“따라 와.”
이런.
교실문을 한 발자국 나섰을 뿐인데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소윤에게 앞길이 막혔다.
“어디를?”
“연구소.”
짤막하게 말한 한소윤은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앞서 걸어갔다. 그 무자비한 행동에 나는 교실 안쪽에서 느껴지는 시선들을 애써 외면하며 한소윤의 뒤를 쫓았다.
“연구소는 이번 주 금요일부터 가기로 했는데?”
나는 월수금마다 상이생태학연구소에 당분간 직무체험이라는 명목 하에 연수생으로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초성 본부장님이 먼저 겪어본 다음 대위마 정화협회에 몸을 담글 건지, 감시받는 일반인으로 살아갈 건지 정하라며 권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거절할 이유 따위 없었던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성급히 결정하기보단 조금이라도 알아보고 판단하는 게 낫다는 건 유치원생도 아는 일이니까.
어쨌든 그렇게 이번 주 금요일부터 연구소로 출근하게 되었는데, 오늘은 수요일도 아닌 화요일이다.
“아까 내가 쓰러진 거 때문에 그래?”
“가면 알아.”
말 해주면 어디가 덧나는지 한소윤은 그 이후로도 입을 꾹 닫고 걸어가기만 했다.
‘평범하네.’
어제 밤 연구소에서 나가면서 생각한 거지만, 대위마 정화협회의 한국본부라고 하기에는 너무 평범한 건물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김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모름지기 비밀결사라면, 그에 맞는 비밀기지를 가져야 하는 법 아닌가.
“빨리 와. 시간 없어.”
연구소 앞에서 허튼 생각을 하고 있는 내게 앞서가던 한소윤이 재촉했다.
나는 대충 알았다는 몸짓을 하며 한소윤을 따라갔다. 그리고 ‘상이생태학연구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적혀있는 배너를 지나, ‘상이생태학이란?’으로 시작하는 동영상이 재생되는 액정TV를 넘어 엘리베이터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한소윤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버튼 패널 옆에 있는 카드단말기 앞에 섰다.
삑.
‘이곳에 카드를 대 주세요.’
교통카드 단말기처럼 친절하게 안내문이 적혀있는 곳에 한소윤은 주머니 속에서 꺼낸 은색 바탕에 파란색 테두리의 카드를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확인 되었습니다.‘하는 음성과 함께 벽 한쪽이 열리더니, 새로운 패널이 등장했다.
지하를 뜻하는 B가 붙는 숫자의 수는 10개를 넘어섰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비밀기지 같은 건가.’
난 꿈 많은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설렜다.
연구소 외견만 보고 실망했는데, 내부에 이런 멋진 장치로 공간이 숨겨져 있다니.
역시 사람이든 뭐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되는 법이다.
한소윤은 감탄하고 있는 나를 무시하고 B3이라 적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얼마 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지하 3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티 하나 없는 복도와 굳건히 닫힌 철문이 보였다. 한소윤은 그곳으로 다가가 철문 옆에 있는 디지털 도어락 같이 생긴 곳에 숫자를 입력하고 지문을 인식키는 듯 엄지를 대어 꾹 눌렀다.
띵동-
흔히 들을 수 있는 알림 소리와 동시에 열린 문의 안쪽은 생각보다 더러웠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서류들, 알 수 없는 물체가 담긴 병들, 이상한 부적과 악세서리, 알 수 없는 기계장치. 정리되지 않은 책상들이 약 30평정도 되는 공간에 이리저리 흩어져있었다.
“여긴 어디야?”
실망감이 가득한 내 질문에 한소윤이 담담하게 말했다.
“연구개발실.”
“과연.”
나는 다시 한 번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긴. 층이 그렇게 많았는데 이런 장소도 있기 마련이겠지.
그렇게 나름대로 납득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와 손을 덥썩 잡더니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반갑네. 연구팀장을 맡고 있는 정훈이라 한다네. 정말로 해부. 아니, 연구하고 싶게 생겼군 그래.”
정리 되지 않은 검은색 반곱슬 머리와 그에 대비되는 과도할 정도로 깨끗한 백의. 연구자라는 걸 과시하고 싶은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요즘 시대에 보기 힘든 단안경을 끼고 있는 30대 초반의 남자는 내 손을 놓더니 이제는 내 팔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어제와 같군. 평범한 인간과 다를 게 없어. 오딘의 눈으로도 건질 수 있는 게 없다니. 근육부터 신경계까지 모든 게 정상이야. 우리처럼 은혈이 심장부근에 뭉쳐있는 것도. 크흠. 다시 봐도 엄청나군. 그야말로 바다와도 같은 양의 은혈이야. 이렇게 많은 양의 은혈을 가지고도 용케….”
“저기. 무슨 소리신지?”
“신경 쓰지 말고 떠들게 내버려 둬.”
피곤한지 다크서클이 진하게 생긴 이초성 본부장님이 뒤쪽에 있던 문을 열고나오며 말했다.
“저 아저씨. 이럴 때면 꼭 정신 나간 거 같지만…. 음. 그래. 진찰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냥 무시하고 이리 와. 아. 소윤이 너는 이제 가 봐도 돼. 안내 고맙다.”
목을 뚜둑뚜둑 꺾은 본부장님이 그렇게 말하며 자기가 나왔던 곳으로 다시 들어가자 나는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갔다.
본부장님을 따라 들어간 곳은 이상한 한기가 느껴지는 상소였다. 차갑다기보다 오싹한 느낌의 한기에 나는 온 몸을 절로 떨렸다.
‘여긴 뭐하는 곳이야?’
나는 본부장님이 서있는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수백, 수천 개의 은장도가 마치 박물관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평범한 형광등의 빛도 아름답게 반사하고 있는 은장도들을 보며 나는 왜인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뭐지? 갑자기 왜 이래?
알 수 없는 감정에 기분이 복잡해진 나에게 본부장님이 물었다.
“무슨 생각해?”
“예?”
움찔.
놀란 나를 보더니 본부장님이 은장도 하나를 꺼내더니 이어 말했다.
“멍 때리지 말고 이리 와서 이거 잡아봐.”
나는 그 말에 상념을 떨치고 본부장님 손에 들려있는 은장도를 바라봤다.
끙.
한소윤의 은장도처럼 잡자마자 내 손에 흡수되는 건 아닐지 불안한데.
“걱정 말고. 자.”
본부장님은 마치 회식자리에서 술을 권하듯이 말했다.
거절하면 뒤가 안 좋을 거란 생각에 나는 주저하면서도 결국 은장도를 잡았다.
“봐. 문제없지?”
나는 끄덕이며 은장도를 살펴봤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은장도와 다르게 완벽한 민무늬에 아무런 특색도 없는 은장도.
“앞으로 배우겠지만 먼저 은장도에 대해 짧게 설명해주자면, 은장도는 ‘은혈귀의에게서 채취한 능력에 무기나 파사의 힘이 담긴 도구를 합성해 만든 무기’라고 알아두면 돼.”
하나도 모르겠지만 나는 알아들은 척 했다.
물론 본부장님은 내가 못 알아듣는 걸 눈치 채곤 피식 웃었지만.
“그냥 그렇게만 알아둬. 여하튼 은장도는 타입과 등급으로 구분할 수 있지. 네가 지금 들고 있는 건 커틀러스 타입의 E등급 은장도고. 줘봐.”
본부장님은 내게서 은장도를 건네받더니 자신의 가슴에 꽂았다.
“은장도를 몸에 꽂고 무기로 바꾸는 과정을 우리는 간단하게 ‘해방’한다고 말해. 반대는 ‘해제‘라하고. 간단하지? 뭐.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니까 외울 필요는 없고.”
그렇게 말한 본부장님의 가슴에서 은색 액체가 피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은색 액체들은 공중으로 비산하더니 자기네들끼리 뭉쳐서 커틀러스 모양으로 변했다.
그 커틀러스를 잡아 가볍게 휙휙 휘두른 본부장님이 말을 이었다.
“은장도는 사용자에게 큰 힘을 주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체능력은 기본이고, 때때로 마법이나 기적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 능력들까지 말이야.”
휙휙. 휙휙휙!
본부장님이 커틀러스를 휘두르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고, 끝내 그 속도는 인간이 낼 수 있는 한계점을 넘어섰다.
과연.
어제 한소윤과 본부장님의 인간 같지 않은 신체능력은 전부 은장도의 힘이었다는 건가.
이어 본부장님이 자신 가슴에 꽂혀있던 은장도를 뽑자 커틀러스가 다시 액체가 되어 은장도로 흡수 되었다.
“자. 봤듯이 어디까지나 은장도는 인간의 도구일 뿐이야. 쓸 때 쓰고, 안 쓸 땐 몸에서 때어놓으면 되는 도구. 그런 도구이니만큼 당연히 너도 은장도를 자유자재로 빼놓는 게 가능할 줄 알았어. 해방만 하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소윤이한테는 오늘 돌려받으라고 말해두었지. 그런데 이게 웬걸.”
본부장님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 말대로라면 내 오른손에 있는 은장도는 확실히 비정상적이다. 아니, 내 몸이 비정상적인 건가?
“어때? 아저씨.”
정훈 연구팀장님이 본부장님의 말을 듣곤 고개를 저었다.
“어제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어있던 학생의 은혈과 ‘레이크’가 오늘와선 완전 융합해버렸다네. 허허.”
“진짜로? 하아.”
정훈 연구팀장님의 말이 끝나자 본부장님이 질렸다는 듯이 되물었다.
은혈. 은색 피.
나는 내 심장부근에 고여 있는 액체를 떠올리며 물었다.
“제 몸속에 있는 액체를 은혈이라 하는 건가요?”
“엉. 은혈귀들의 피이자 그 녀석들이 가진 힘의 원천. 그걸 은혈이라 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