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현대물
은혈록
작가 : 실라인
작품등록일 : 201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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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마무리(1)
작성일 : 17-12-17     조회 : 312     추천 : 0     분량 : 5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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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착한 곳은 어딘가의 넓은 실내였다. 바닥에 신비로운 문양의 마법진과 옆에 있는 기묘한 장치만 제외하면 실내 인테리어가 트레이닝룸과 판박이였기에 나는 이곳이 연구소 지하 중 한곳이라고 추측했다.

 아무런 경과 없이 바로 이동되어서 그런지 너무 현실감이 없네.

 ‘멀미도 안 나고 승강장 벽에 부딪치지도 않았고 벽난로를 이용하지도 않아 매우 지루했다‘라고 최초의 텔레포트 사용 경험담은 짧게 평한 내게 마법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지인 누나가 다가오며 물었다.

 “몸은 괜찮아요?”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내 몸을 살피는 이지인 누나는 오늘 한숨도 자지 않았는지 눈 밑에 살짝 다크서클이 생겨있었다.

 나는 푹 자고 왔는데.

 괜히 미안해진 나는 머쓱하게 대답했다.

 “네. 멀쩡하죠.”

 “그래도 따라오세요. 검사 한 번 해야겠어요.”

 이지인 누나는 내 손을 잡아 이끌자 본부장님도 동의하며 어서 가라는 듯 손짓했다.

 “끝나고 이상 없으면 바로 집에 가도 돼. 다른 일은 나중에 해결하자고.”

 “끙…. 네.”

 다른 일.

 드래곤이나 백윤현에 관련된 일이거나 …서유진과 관련된 일이겠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괜히 머리가 복잡해지만 검사 결과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애써 머리 한 구석에 쑤셔 넣으며 이지인 누나를 따라나섰다.

 

 

 검사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

 이지인 누나가 그늘진 표정으로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머뭇머뭇 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저기….”

 “네.”

 “그. 유진이는.”

 으엑.

 지금 가장 기피하고 싶은 화제를 꺼내오다니.

 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이지인 누나는 꺼진 불씨를 조심스럽게 다독이듯 상냥하게 말했다.

 “기본적으로는 착한 아이에요.”

 “…네.”

 TV 등에서 문제아의 보호자가 나올 때 자주 언급되는 진부한 단골 대사지만 암울함이 깃든 그 눈빛에 나는 차마 ‘그쪽 앞에서야 그러겠죠.’라며 빈정거리지 못 했다.

 “그 애는. 그 애는 그저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 못 할뿐이니까.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본심은 분명 달랐을 거예요. 거기다 유독 학생한테 더 혹독하게 굴었던 이유는 아마….“

 이지인은 긴장 때문인지 바싹 마른 입술을 침으로 한 번 적신 후 말했다.

 “레이크…. 때문일 거예요.”

 나는 얼떨결에 내 오른손을 쳐다봤다.

 “이거 때문이라고요?”

 “정확히 말하면 전 소유주 때문이죠. 자세한 이야기는 언젠가 본인한테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어찌 되었든 학생한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더 너그럽게 봐달라고는 못 말하겠지만, 조금. 반 발자국만 물러나 넓은 시야로 지켜봐주시면 안될까요?”

 이지인 누나의 간청에 나는 더 감정이 복잡해졌다. 내가 원인이 아닌데 날카롭게 쏘아댄 점에서 서유진에게 더 화를 내야 되는 건지, 이지인 누나에게 왜 그렇게 싸고 도는 지를 짜증을 부리며 캐내야 하는 건지, 냉철하게 다 됐으니 꺼지라고 말해야 되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 나는 그것들을 차분히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결국 내 최종 저지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고요.”

 하지만 그거라도 감지덕지라는 듯 이지인 누나가 방긋 웃으며 나를 이끌었다.

 “고마워요. 자. 가죠!”

 

 

 

 

 

 

 

 

 

 검사 결과 나는 수면 마법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단 하나의 이상도 없었다.

 어쩐지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차 안에서 그리 오래 뻗어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수면 마법이라. 무섭다 진짜. 갑옷을 입은 상태에서도 통하려나? 언젠가 테스트 해달라고 해야지.

 나는 갑옷을 입으면 마법이 안 먹히길 바라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배고프다.’

 아침에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로 여태까지 푹 자버렸다.

 정오가 넘은 시간. 문을 열고 방을 나서봤지만 엄마와 하린이는 이미 집을 나선 건지 적적하기만 했다.

 나는 냉장고를 열어 적당한 반찬들을 꺼내고 밥을 퍼서 식탁위에 올렸다.

 ‘평온하네.’

 식사를 시작한 나는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에 마음이 풀어졌다. 격전을 치른 다음 날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심신이 여유로우니 오히려 심심할 정도였다.

 모레까지 푹 쉬라는 전언을 들은 만큼 온종일 어떻게 늘어져있어야 편할까 고민하는 내 귓가에 불길한 소리가 파고들었다.

 위이이이잉

 그것은 내 스마트폰이 만든 문자가 왔다는 진동 소리.

 나는 식탁 옆에 놔두었던 스마트폰을 들어 제발 하잘 것 없는 광고이길 빌며 메시지 함을 열었다.

 - 3시까지. 연구소 대신 카페 오르골로 와.

 서유진의 문자를 보며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싸우자는 건가? 싸우자는 거 맞지?’

 귀중한 주말 오후. 뭉그적거리는 사치 좀 부려보려 했더니 쉴 틈을 주지 않네.

 더군다나 명령조. 아무래도 정말 싸우자는 거 같았다.

 이지인 누나가 넓게 봐달라고 했지만 상대가 이런 마음이라면 어쩔 수 없지. 좋다 이거야.

 마음을 다잡은 나는 전투 모드가 되어 힘껏 투지를 불살랐다.

 

 

 

 

 

 상대방에게 잘 보일 필요성을 찾지 못 했지만 그렇다고 예의를 못 지킨다는 공격을 굳이 받아드릴만한 바보는 아니기에 나는 최대한 깔끔하게 씻은 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스마트폰에 담긴 음악을 감상하며 거리를 걷자 연구소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페 오르골.

 한 번도 온 적은 없지만 스쳐지나가며 많이 본 곳이다.

 이 카페를 인터넷으로 검색해봤는데, 이곳은 살짝 어두운 조명으로 분위기를 잡아주고 이름처럼 교양 있는 선율을 가진 음악을 항시 잔잔하게 깔아 놓는 카페라고 한다.

 그 검색결과에 걸맞게 내가 문을 여는 순간 맑은 음악이 내 귀를 간질였다. 이어 15평의 작은 카페의 구석. 이 투명한 음색을 감상하던 서유진이 나를 발견했는지 이쪽이라는 듯 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가까이 다가간 내게 서유진이 눈썹을 살짝 모으며 말했다.

 “너. 옷….”

 “옷? 왜요?”

 내가 되물으면서 자리에 앉자 서유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더니 메뉴판을 건네주며 물었다.

 “아니. 뭐 마실래?”

 ‘왜 저래?’

 나는 영문을 알 수 없기에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메뉴판을 건네받았다.

 내가 사는 건 아닐 테고. …비싼 거 마셔도 되려나?

 하지만 괜히 지고 들어간다는 느낌에 그건 생각으로 그쳤다. 나는 길고 긴 마법의 주문을 읊을 능력이 없는 나는 그냥 메뉴판에 있는 수많은 차 종류 중 하나를 대충 골랐다.

 작은 카페라 그런지 직원이 찾아와 주문을 받았다.

 그 후 음료가 서빙으로 도착할 때까지 우리 사이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이게 바로 신경전이라는 건가?’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의도적인 침묵을 고수한다. 협상의 기본이라고 어디선가 들었지만 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초조해지기만 했다.

 과감하게 내가 먼저 선공을 가해야 하나? 아니면 역시 정석적으로 침착을 유지하며 기다려야 되나?

 조마조마하게 차를 홀짝이며 눈치를 보는 내게 서유진이 입을 달싹이다 결국 선수를 취했다.

 “인정할게. 내 잘못이야. 미안해.”

 인성 봐라 네 잘못이잖아 미친놈아.

 를 잘못들은 거 아니지 지금?

 칼도 안 들어갈 정도로 굳건한 철옹성이 갑자기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모습에 나는 당황한 나머지 마시고 있던 차를 조금 흘려버렸다.

 “지금까지 혹독하게 몰아친 점. 어제 너에게 잘못을 추궁한 점. 전부 사과할게.”

 서유진의 모습은 학창시절 싸웠을 때 선생님의 중재 하에 화해의 악수를 건네는 학생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 톨의 거짓도 담기지 않은 순순한 눈으로 나를 똑바로 마주하며 진심을 고하고 있다.

 어떤 의미로 회심의 일격을 맞은 나는 넉다운 된 상태로 빤히 서유진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반 발짝 뒤에서 넓게 봐달라는 이지인 누나의 말이 떠올랐다.

 서유진의 다른 면모를 봐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나는 코웃음 쳤다. 서유진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냉혈인이라고 여겼으니까. 오늘 부른 이유도 싸우기 위해서일 거라는 편견을 가진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섣부른 추측이었다. 서유진이 나를 몰랐듯이 나도 서유진을 알지 못 했다. 서유진도 자신을 낮추고 사과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 사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 거야?’

 애초에 냉정히 돌이켜보면 그렇게 큰일도 아니었다. 그저 가족이 다쳐 공황에 빠진 사람이 뭣도 모르고 억지를 부리며 폭언을 쏟아낸 것뿐이다.

 ‘아니. 그것만은 아니지.’

 서유진은 그 전부터 나에게 폭언을 일삼았다. 큰일이 아니라는 한 마디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그래도 뭐라 뭐라 욕한 내가 잘잘못을 논할 자격이 있을까? 지금까지의 울분이 쌓였다곤 해도 가족이 다친 사람한테 욕설을 퍼부었는데.’

 사적이고, 어찌 보면 작은 다툼인 만큼 상대방이 사과한 이 시점에서 끝내는 게 서로룰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유진이 제안했다.

 “팀을 떠나고 싶다면 수속을 밟아줄 테니까.”

 나는 반사적으로 됐다고 말하려다 멈칫했다.

 ‘팀을 떠날 기회인가?’

 지금이야 서유진이 자신을 낮추고 있지만 언제 다시 이런 일이 또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지내본바 화목해 보이는 강성하의 팀에 비해 6팀의 분위기는 내게 그야말로 사막과도 같이 팍팍하다.

 남녀의 문제를 떠나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던 친분의 벽이 나를 가로막고 있다. 그걸 부수기 위해선 많은 노력과 심혈을 기울여야 할 텐데, 굳이 내가 그럴 필요가 있나?

 답은 당연히 ‘아니다.‘지만 나는 결국 생각을 번복했다. 팀을 유지한 채로. 시간이 지나 언젠가 이 삭막한 관계가 해결되길 바라며 그 동안 비니지스적인 관계로만 지내기로 말이다.

 괜히 팀을 옮겼다가 문제아, 혹은 골칫거리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고 강성하가 있는 팀도 이러지 말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비온 뒤에 홍수 날지도 모르지만, 땅이 굳을지도 모르지. 이번 계기로 내가 조금이나마 스며들지도 모르잖아?

 “됐어요. 번거롭게 그러고 싶지는 않네요.”

 내가 제안을 사양하자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모습으로 기다리던 서유진의 표정이 조금 펴졌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렇게 끝나면 지금까지 고통 받던 내가 너무 불쌍하니까.

 “를 주세요.”

 “…뭐라고?”

 서유진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어벙한 얼굴로 말했다.

 “한 달에 세 번. 팀장님을 깔 권리를 주세요. 물론 그 때 팀장님은 절 까면 안 되는 옵션으로요.”

 즉흥적으로 떠올린 아이디어지만 나는 괜찮은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부도덕적인 갈굼이나 납득할 수 없는 폭언에 대항할 수 있는 권리라니. 이 얼마나 멋지고 찬란한가.

 솔직히 말해서 너도 좀 당해봐라 라는 생각도 들어있다.

 당연하지만 서유진 입장에선 쉬이 허락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하극상을 마음대로 일으킬 수 있는 권한을 하급자에게 부여한다는 건 상급자로서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그렇지만 고작해야 한 달에 세 번. 명령의 거부도 아니고 그저 투덜거리겠다는 소심한 반항이다.

 그걸 알고 있는지 서유진도 병을 앓는 사람처럼 한참을 끙끙거리며 고민하고는 분한 듯이 OK사인을 내렸다.

 “…알았어.”

 나는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YES! 하고 외쳤다.

 언젠가 허물없는 사이가 되던 완전히 갈라서든 깨지게 될 구두약속이지만 당분간은 유용하게 쓸 수 있겠지.

 농담 섞인 조약이 맺어지자 한층 가벼워진 분위기가 된 카페에서 나는 남아있는 차를 마저 목 안으로 넘기고 서유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시금 잘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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