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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작가 : 홍단
작품등록일 : 201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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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알레테아(5)
작성일 : 17-12-14     조회 : 304     추천 : 0     분량 : 5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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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이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 누가 방에 들어와 말을 걸고 있는지 살폈다. 분명 문을 잠가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새 자신의 방 안에는 온통 피투성이가 된 라키샤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예의 그 새까만 눈동자로 리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들어온다는 기척도 없이 들어온 라키샤의 뒤로 방문이 휑하니 열려 밖의 별빛을 방 안으로 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기척도 없이 들어왔다는 것보다도, 새까만 눈동자보다도 두려운 건 방금 잘라낸 것처럼 피가 뚝뚝 떨어지는 열 개의 손가락이었다. 살을 저며 내지 않아 정상적인 오른손에 한가득 잡힌 열 개의 손가락. 그 아래로 핏물이 떨어져 리이의 방 바닥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그야말로 공포스럽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위대하신 신들과 싸우는 악마가 바로 저런 모습일까 싶어지는, 원초적인 공포의 화신과도 같은 모습에 리이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리이의 심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공포스러운 까만 눈은 리이를 빨아들일 듯 바라보며, 다시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리이, 뭐해? 혹시 길드장님 어디 가셨는지 알아? 라쉬미가 길드장님의 심장을 먹고 싶대.”

 

  다행히도 ‘일단은’ 길드장님이 도망친 것을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저렇게 집요하게 물어 보는 것을 보니...

 

  리이는 이미 피투성이가 된 한쪽 손과 정상인 다른 쪽 손을 들어올리며, 모른다는 식의 제스처를 취했다.

 

  불필요한 제스처였다. 오히려 피투성이가 된 손이 아리다 못해 시려 오는 자세였으니. 하지만 이런 불편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가는 창문으로 늘어뜨린 커튼을 들키고 말 것이었다. 어떻게든 가리는 것이 상책이었기에, 몸과 손으로 최대한 가려 보겠다는 취지에서였다.

 

  원래대로라면 알레테아 아가씨를 내려보내고 상황을 살핀 뒤 커튼을 풀어 내릴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빠르게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도 아무런 기척도 없이.

 

  당장은 들키지 않은 것 같지만, 묶인 커튼이 늘어뜨려져 있는 것을 들켰다가는 최악의 위기가 도래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라키샤는 아무리 미친년이라고는 하나 전투 등 제반 상황에서의 상황판단능력만큼은 발군인 자였다. 능력 자체도 강했지만,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아지지 않던 그 교활한 모독자를 포획하는 데 성공한 녀석이었다. 어떻게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면 모독자를 포획할 수 있는지, 간단한 전투 한 번 치른 것만으로 파악해 내고 그대로 실천에 옮긴 녀석을, 도저히 과소평가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녀석이 커튼이 단단히 묶여 늘어져 있는 것을 본다면 길드장이 어디로 도망치고 있는지 파악해 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지금은 시치미 뚝 떼고 그렇지 않은 양, 아무것도 모르는 양 굴어야 한다. 리이는 여전히 손을 들어 올려 늘어진 커튼을 가린 자세로, 라키샤에게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몰라. 난 회복하느라 바빴어.”

 

  제발 속아라, 속아 줘라... 리이는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지만, 실제로는 가슴 속이 부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알레테아가 무사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쳐 대는데 막으려야 막을 수가 없었다.

 

  “흐음, 그래?”

 

  라키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리이를 바라보았다. 저 새까맣고 끔찍한 눈동자에 무슨 감정이 숨어 있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저 눈이 죽음을 부르는 사안이라고 하면 믿을 수준인 눈.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적어도 리이의 말에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긴 했다는 점이었다. 일단 장단을 맞춰 주고는 있으니까. 적어도 바로 공격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떻게든 먹히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리이는 계속 모르는 척 연기했다.

 

  “네가 기부하라고 하는 걸 막으려다가 죽을 뻔했어. 이 날개라는 거, 다치면 아픔도 느껴지고 생명에도 무리가 간다고. 손가락도 그렇고...”

 

  라키샤는 그의 이야기가 흥미롭다는 듯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피가 잔뜩 묻은 몸으로 다리를 꼬았다가 폈다가 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듣고 있다는 듯이 리이의 푸념을 들어 주었다.

 

  그 모습이 마치 소녀가 구전동화를 들려주는 이야기꾼 앞에서 낭독되는 이야기를 감상하는 모습과 같았다. 상황 자체는 그런 평화로운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지만 그딴 것을 신경 쓸 겨를 따위 없었다.

 

  어쩌면 시간을 많이 벌 수 있겠어. 다행이야 - 하고 리이는 나름 안심까지 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런 안심과 희망은, 별안간 튀어나온 라키샤의 말에 의해 무참히 박살나 버리고 말았다.

 

  “재미있다. 그럼 내 이야기도 들어 줄 거야?”

 

  “원한다면.”

 

  “꺄아, 정말? 그럼 이야기해도 되지? 리이 손들고 있을 필요 없는데 왜 들고 있어?”

 

  “... 그냥 별 거 없어.”

 

  “아니잖아. 그 뒤에 있는 커튼 가리고 있는 거잖아?”

 

  천진난만하게 하는 말에 리이의 얼굴이 아주 잠시 동안 싹 굳어졌다. 하지만 들켜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했다. 리이는 애써 웃는 낯을 유지하며, 라키샤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커튼이라니?”

 

  “리이가 다쳤는데, 길드장님이 안 다치게 하려고 돕지 않을 리가 없잖아. 혹시라도 길드장님 도망치는 거 도울까 봐 미리 날개 부러뜨렸는걸. 날아가진 못했을 거고,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라키샤의 시선이 이미 창문의 커튼을 향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뛰어나가 창문 아래로 몸을 던지려는 듯, 라키샤의 몸체가 창틀 쪽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그만해! 이 권속 녀석이...”

 

  리이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라키샤에게 달려들었다. 위험하다. 이미 이 녀석은 모든 것을 알고 자신을 농락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사냥 전, 한밤의 유희를 위하여, 고양이가 쥐의 숨을 끊기 전 쥐를 가지고 놀듯이.

 

  이미 그르치고 말았지만, 어떻게든 막아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들켰지만,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하지만 라키샤에게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그의 손끝에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까 전에 느꼈던 것과 같은 끔찍한 격통. 리이는 그대로 주저앉아 바닥을 굴렀다. 그렇지 않는다면 미쳐 버리고 말 그런 격통이었다.

 

  “으아아! 아아아아...!!!”

 

  “시끄러워. 길드장님한테 기부 받아야 하는데 왜 이리 방해꾼이 많아?”

 

  검은 금속으로 된 날카로운 칼날을 빙그르르 돌리며, 라키샤가 볼멘소리를 했다.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그 칼날에는 리이의 피가 잔뜩 묻어 있었으며, 어느새 라키샤의 손에는 손가락 하나가 더 들려 있었다.

 

  “자, 그럼 기부를 받으러 가 볼까... 라쉬미가 거짓말쟁이의 심장을 먹고 싶어 하니까...”

 

  그 말과 함께, 바람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리이의 방에 라키샤는 남아 있지 않았다.

 

  손가락을 잘린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리이와 피 웅덩이를 제외하고는 마치 아무도 오지 않았던 것처럼, 고요히. 모든 것이 처음과 같았다.

 

 ✳

 

  알레테아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따라 달리고 또 달렸다. 밤의 거리는 개미새끼 하나 없어 비명을 질러도 금방 삼켜질 것만 같은 적막함이 가득하다. 기묘할 정도로 끈적한 기류에 별만이 둥둥 떠 있는 하늘만이 밤의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묘한 바람이 부는 새까만 밤, 적막한 거리를 달리면서 자꾸 리이 생각이 났다. 리이와 헤어지던 그 순간이 자꾸 떠오르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리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더 이상 다치면 안 되는데. 많이 아파 보였는데.

 

  리이는 평소엔 까칠한 편이지만, 이런 무섭고 위험한 일이 생기면 항상 몸을 던져 구해주곤 했다. 그리고 항상 아까 같은 다정한 모습까지 보이면서, 자신을 달래 주었다. 그 큰 날개로 자신을 덮어 주고, 위험할 때면 자신을 번쩍 안아 들고 날아 위기를 탈출했다. 언제나. 알레테아가 가족과 도시모든 것을 잃은 바로 그 때부터 변함없이 그러했던 리이였다.

 

  하지만 지금 리이는 너무 많이 다쳐 있었다. 피를 엄청나게 흘렸고, 평화의 신에게 하사받은 아름다운 날개도 고깃덩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리이가 알레테아를 지켜주고 싶어도 지켜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다쳐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괴로워하고 있을 때 알레테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다. 아아, 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나약한 존재란 말이더냐. 금수 같은 시간들을 보내오면서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리이가 위험에 빠진다는 것을 상상한 적이 없었는데, 정작 마주하고 나니 몰려든 것은 두려움이었다. 자칫하면 자신도 끔찍한 꼴을 당하고 말리라는 두려움... 오만가지 감정 중 수면 위로 가장 빠르게 떠오른 것은 자기 자신의 안위를 향한 욕망이었다.

 

  역겨워. 알레테아는 갑작스레 자다 말고 미친년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도 끔찍했지만 그 와중에도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자신이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기묘한 밤공기에 섞여 역겨움은 더욱 배가 되어 들어온다.

 

  솔직히 손가락 하나로 퉁칠 수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주고 해결을 보려 했을지도 모른다. 길드원들도 몇몇은 손가락이 날아간 것 같았으니...

 

  문제는 지금 라키샤가 노리는 것은 ‘심장’이라는 것에 있었다. 손가락이 아니라, 심장.

 

  ‘거짓말쟁이의 심장을 원한다고 똑똑히 말했어! 미친년! 도대체 왜 이딴 일이 생기는 거야...’

 

  악몽이야 항시 꾼다 해도, 한밤중에 미쳐버린 길드원에게 쫓기기까지 하는 상황에 놓일 줄이야. 안 그래도 죄를 용서받지 못해서 심란해 죽겠는데 이젠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고통을 받고 있었다. 아니, 사실상 죽음의 위기에까지 직면해 있다 봐도 무방하리라.

 

  ‘신이시여, 제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알레테아는 소리 없이 한탄했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자기가 이딴 꼬락서니에까지 빠지게 되는지... 어두운 상점 거리에서 홀로 뛰는 알레테아의 가슴 속으로 지독한 고통이 휘몰아쳤다. 부조리와 노력해도 해방되지 않는 죄인의 낙인. 그리고 역겨울 정도의 자기혐오까지. 이것들이 가슴을 좀먹어 들어가는 고통이었다. 기도를 올려도 별이 무심하게 빛을 비추기만 할 뿐, 변하는 건 없었다.

 

  ‘어쩌면 방법이 잘못되어서 죄가 안 씻겼는지도 몰라. 껄끄러운 방법을 써서 모독자를 잡은 것 때문에 신께서 화가 나신 거지.’

 

  왜 신께서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걸까 - 하고 이것저것 추론을 하며 알레테아는 열심히 거리를 달렸다. 신전까지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십 분에서 십오 분 정도만 더 달리면 이 도시의 신전에 도달할 터였다. 일단 도달하기만 하면 어느 정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되면 바로 영주에게 요청하여 리이의 안위부터 확인하리라.

 

  ‘신전에서 날뛰었다가 신께 징벌을 받으리란 것을 모르는 멍청이는 아니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라키샤는 모독자의 권속이니까. 모독자의 권속이 신전에 들어간다면 신께서 처리를 안 하실 이유가 없었다. 성스러운 신전을 더럽히는 일이니까.

 

  그렇게 여러 가지로 짐작하던 알레테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애초에 모독자에게 힘을 받았다는 야만인 녀석을 받아들였던 게 잘못이었던 거야, 하고 생각하면서. 신께서 용서하지 않으신 것도 모독자의 권속을 이용해서 모독자를 잡았다는, 불경하고도 껄끄러운 방식 탓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알레테아는 이때까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것도 두 가지나 모르고 있었으니, 첫째는 라키샤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신을 향하여 맹렬하게 뛰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묘할 정도로 조용하게, 그러나 토끼를 쫓는 짐승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향하여 똑바로 뛰어 오고 있고, 그대로 뛰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잡히리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첫째였다.

 

  그리고 둘째는 - 자신이 뛰고 있는 대로변의 틈새에서, 검은 존재가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알레테아가 자신이 숨어있는 곳 가까이로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검은 존재는 자주색 안광을 뿜으며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사냥감을 기다리며 매복해 있는 짐승 같았다.

 

  맹렬한 스피드로 추격해 오는 짐승과 도사리는 짐승. 불행히도 아무 것도 모르는 토끼 같은 알레테아는 두 존재 모두를 모른 채 도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도사리고 있던 짐승 쪽이 더 빨랐다. 결국 알레테아가 검은 존재가 있는 골목길을 지나치려던 그 순간, 하얀 팔이 뻗어 나와 그대로 알레테아를 끌어 당겼다. 비명조차 없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에 알레테아는 그대로 검은 존재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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