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알레테아의 넘쳐흐르는 기쁨을 막아서는 데는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죄인의 낙인을 벗게 되리라는 환희에 가득 차 흐느끼기 직전까지 가느라 목이 멜 때로 멨는데, 저 한 마디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
그저 어안이 벙벙해질 따름이었다. ‘단’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지?
알레테아는 눈이 동그래져서 평화의 신을 바라보았다. 물론 이내 고개를 숙이고 경의를 표하기는 했지만, ‘단’이라니. 뭔가 조건이라도 내거신단 말인가? 예기치도 못했던 불안감이 알레테아를 엄습해 왔다.
“그대가 어젯밤 어떤 여성의 도움을 받았다지.”
갑자기 왜 그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거지? 평화의 신께서 그 정도까지 신경 써 주신단 말인가. 알레테아는 갸웃하는 표정이 되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검은 로브를 두르고 있었지요... 그녀가 아니었다면 전 이미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도움을 받은 건가?”
“네? 아, 아아... 처음 보는 여자였습니다.”
뭐야. 그 여자가 누구이기에 갑자기 이쪽으로 화제가 돌아간 것인지. 알레테아는 당황스러웠다. 죄를 사해주신다 하시더니, 돌연 어젯밤의 그 여자에 대해 물으시는 것이 뭔가 심히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군. 하... 거 참. 그 아비에 그 자식이란 말인가. 더러운 죄인의 굴레란 벗어날 수 없는 것이란 말인가.”
평화의 신은 혀를 끌끌 차며 저런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알레테아가 대답할 새도 없이,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자네의 아버지께서 모독자를 숨겨 주는 죄를 저지르셨지. 자네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 신벌을 피했네만. 당시 만신전에서는 자네의 거취를 결정하는 문제를 두고 위대한 20명의 신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당최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이미 환희 따위는 꺼져 버린 지 오래였고, 그 자리를 혼란만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신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알아듣고 싶지 않았다.
“자네에게 신벌을 내려야 한다는 의견과,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이 대립했다네. 결국 자네에게 신벌을 내리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지만...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아비가 모독자를 도와주었고, 그런 피를 받은 자가 모독자에게 스스럼없이 굴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어리석은 결정이었지. 위대한 신으로서 그런 잘못된 판단을 하다니. 반대한 이들은 반성을 해야 할 필요가 있어.”
“이해가 안 됩니다. 저는 모독자 따위를...”
“이쯤 되면 알아들어야 하지 않겠나? 멍청해 빠져서는... 자네는 아비처럼 모독자를 끌어들이고 만 거야. 자네를 도와주었다는 그 여자가 모독자란 말이야! 그것도 자네 아비가 숨겼던, 바로 그 모독자를!”
쿵 하고 머리를 잔뜩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평화의 신이 열화와 같이 화를 내며 알레테아를 향하여 폭언을 퍼부었지만, 귀에 제대로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말도 안 돼. 그 여자가 모독자라고?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냐.
아버지가 숨겨 줬던 모독자라고... 그 여자가...
하, 하. 알레테아는 헛웃음을 지을 뻔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설명이 되었다. 모독자란 본디 위대한 신의 자리를 노리는 사악한 악마의 권속으로서, 신을 모독하기 위한 힘을 받는 자들을 칭했다.
그들의 힘은 신을 모독하는 힘인 만큼 위대한 신의 것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위대하신 신들께서 자신이 주관하는 영역과 관련된 권능을 발휘하고, 선택받은 백성을 두며, 불로불사와 막대한 재생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버멘쉬’, 혹은 ‘XX의 위버멘쉬’ 따위로 칭하며 자신들이 선택한 영역과 관련된 권능을 발휘하고, 권속을 부리며, 불로불사와 막대한 재생능력을 지녔다. 그래봤자 열화판일 뿐인 건지 위대하신 신들보다는 대체로 약한 편이었지만.
그 여자는 ‘아버지께 빚이 있다’고 했었는데, 당시에는 얼마나 어렸을 때 빚을 진 거지? 라고 의문을 품었었다. 나이도 자신보다 어려 보였으니까.
하지만 모독자인 이상, 불로불사를 누리므로 그런 시간적 개념이 의미가 없었다. 아마 아버지께서 숨겨 주셨을 때도 그 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을 터였다.
빚이 있다고 하던 게, 그리고 다 잊어버리라 했던 게 이런 의미였다니. 알레테아는 명치를 세게 맞기라도 한 듯 멍하니 앞만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 알레테아를 향해 말씀을 전하는 평화의 신의 목소리는 자애로움 따위는 이미 날아가고 시니컬함만이 가득했으며, 미소 또한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알레테아를 하찮다는 듯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영주가 말하길 자네가 도움을 받았다는 그 자리에서 대량의 혈흔이 발견되었다더군. 그런데 그 혈흔의 양이 통상적인 인간 - 아니, 웬만한 선택받은 백성조차도 살아남을 수 없는 수준이어서 내게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 같다고 아뢰었다네. 다행히도 이 몸이 그 모독자 녀석의 이목구비를 기억하고 있어서 말이야...”
“하지만 저는 정말로 몰랐습니다! 신이시여!”
“자색 눈동자를 가졌다는 자네의 증언을 듣고 바로 기억해 냈지. 가장 최근에 악마에게서 힘을 얻은 모독자... 그 계집이 자네를 도운 걸세! 바로 나의 신성한 도시에서!”
평화의 신은 화가 난 듯 거대한 날개를 활짝 폈다. 그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거의 중앙 홀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준이었다. 날개가 펴지면서 하얀 깃털이 알레테아의 머리 위로 이리저리 흩날렸으나, 알레테아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억울하다. 결국 모독자란 것들은 끝까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잘못한 것이라고는 모독자가 모독자인지도 모르고 도움을 받은 것뿐이었다. 그것도 신벌과, 도시의 멸망과, 아버지의 죽음을 부른 모독자 따위에게 도움을 받았다... 운명의 장난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리라 싶었다.
아니, 자신이 어리석었다. 멍청한 년! 다 잊어버리라 했는데, 잊어버리지 않고 괜히 오지랖을 부렸어. 그게 자신의 잘못이요, 죄였다.
이대로 죄인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걸까? 더한 일이 내려오는 걸까? 그럼 도대체 왜 죄를 사해 주려 했다고 말씀하신 거야... 날 놀리려고? 절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서?
다 포기하고 싶고, 지친 마음만이 적막한 가슴을 공허하게나마 가득 채웠다. 세상이 밉고, 멍청한 자신이 밉고, 모독자란 존재가 미웠다. 왜 계속 나타나서 자신을 이리도 괴롭히는지. 그냥 그 때 죽게 내버려 두지! 나 같은 멍청한 건 어차피 이런 꼴 났을 텐데.
알레테아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울컥 흘러 나왔다. 도저히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인생이 이 따위야. 신께 기도를 그렇게 올렸는데, 신께서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런 게 아니었던 건가? 애초에 더러운 피가 흘러서 가까이 갈 수도 없단 말인가? 한탄이 깊이 스며든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흘러 내렸다.
“어디서 죄인 주제에 신성한 신전 바닥에 더러운 얼룩을 묻히느냐! 당장 그만두지 못할까!”
알레테아를 신께 데리고 왔던 신관장이 역정을 내며 알레테아를 나무라더니, 예의 그 지팡이를 꼬나잡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이번에야말로 골통을 까 놓을 절호의 기회라는 듯이.
하지만 알레테아는 들은 척도, 본 척도 안 하고 펄펄 눈물을 흘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추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알레테아는 절망에 빠져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죄인 따위가 말을 들어 먹지를 않는군. 신이시여, 제가 이 년을...”
“됐다.”
“네?”
지팡이를 들고 사납게 다가오던 신관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평화의 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예, 예. 죄송합니다!’하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원래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더니만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진 알레테아의 곁으로, 평화의 신께서 슬쩍 미끼를 던졌다. 마치 일부러 구렁텅이에 빠뜨려 놓고 낡아빠진 동아줄 한 오라기를 내려 주듯이, 평화의 신은 아까 전과 같은 자애롭고 달콤한 목소리로, 알레테아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내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기회를 주려 하네.”
“...?”
“자네의 피는 매우 더럽다네. 죄인의 피지. 하지만 내가 죄를 사해주려 한다지 않았던가.”
“...도대체 어떻게 말입니까? 신이시여.”
알레테아는 훌쩍이는 목소리로 신의 속삭임에 응답했다. 미끼를 물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어떻게든 뭐라도 잡고 싶었나 보다.
“그대의 피를 더럽게 물들인, 그 계집을 잡아 오도록 해라. 그 사특한 계집은 위험하다. 너의 길드에 피해를 입혔던 모독자의 권속의 행방 또한 오리무중이라더군. 필시 어떤 목적을 이루려 끌고 갔을지도 모른다. 이전부터 간악한 계획을 세워 신을 무너뜨리려 하는 데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던 년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저희 길드는 상황이 최악입니다!”
“내 백성들을 보내 주겠다. 어떻게든 그 간악한 년을 포획해 내 앞으로 끌고 오도록 해라. 그 것만 성공하면, 내 특별히 네 죄를 씻어 주겠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알레테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하다고 연신 신께 예를 갖추었다. 감사할 만 한 상황이 아니었음이 분명했지만, 이 정도까지 몰린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 멀리, 제국 밖 야만의 땅에서는 하이에나라는 동물을 길들이기 위해 끔찍한 방법을 사용한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이에나를 길들일 때 동굴 안으로 몰아넣고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은 다음, 주인 될 자가 죽어가는 하이에나를 구해 줌으로서 주종 관계를 정립시킨다는 이야기였다.
알레테아의 꼬락서니가 딱 그 이야기 속 죽기 직전의 하이에나 같았다. 죽어가게 만든 이 따위는 이미 잊어버리고 희망을 생명줄을 내려주는 이에게 매달린다는 동물...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만, 전처럼 모독자의 권속을 이용해서 잡아서는 안 되겠지? 그런 더러운 짓을 해서 신들의 이름에 먹칠을 하다니, 이미 그것만으로도 신벌을 받아 마땅하구나. 하지만 특별히 자비를 내려 주겠다. 그리고 시간이 촉박한 만큼 최대한 빨리 잡도록 해야 하고... 그래, 일주일 시간을 주겠다.”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일주일. 일주일이라니! 너무나 짧았다. 그 여자가 도시를 떠났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아마 탐색만으로도 최소 일주일은 걸릴 텐데.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기다 모독자의 권속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도 걸렸다. 지금 이용 가능한 신입 녀석은 모독자의 권속인지, 신의 백성인지 확인도 되지 않았다. 자칫하다가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평화의 신께 선택받은 백성들만을 활용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불경한 말씀이나, 그들은 공격보다는 방어에 특화되어 있었고 전투력 자체는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다. 애초에 평화의 신께서는 싸움을 혐오하시니까.
간악한 여자인 데다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라키샤를 끌어들이기라도 했다면, 더더욱...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리이만 봐도...
그러나 조건을 조금만 완화해 주십사 알레테아가 청하기도 전에, 신께서는 조건을 하나 더 내걸었다.
“만약 조건을 지키지 못한다면 신의 말씀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여, 너희 길드 전체에 신벌을 내리도록 하겠다. 알겠느냐? 기한은 일주일이다.”
쿵 소리가 났다. 현실에서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무언가 묵직한 것이 어찌어찌 매달려 있다가 끊어지고 만 느낌이었다.
희망 따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신전에도, 방 안에도, 그 어디에도. 오로지 절망만이 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절망만이 가득한 길이 자신의 앞에 죽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절망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파멸이 기다린다. 길드에서 생과 사를 함께하고, 동고동락했던 자들. 그 모두가 신벌을 받게 되리라.
그 무수한 슬픔과 파멸을 도저히 견뎌내지 못하고 알레테아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라키샤에게 쫓기던 밤으로부터 사흘도 채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