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세상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지옥이에요.”
엘피스의 앞에 그대로 선 채, 남자는 담소의 첫 머리를 떼었다.
“경전에 따르면 현재 만신전에서 받들어지는 20인의 신들이 처음부터 권속을 부리고, 각자의 관할 영역과 관련된 위대한 힘을 지닌 신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하지요. 하지만 한 여인이 최고신을 일깨워, 위대한 존재로 발돋움하게 되면서 현재의 신의 모습으로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화에서 가르치는 것이죠.”
“그 감사의 표시로 신들은 제국을 세우고, 여인을 최고신의 백성이자 제국의 첫 번째 황제로 임명하였다고 전해지죠. 제국의 황제는 최고신에게 권력을 위임받아 신에게 명령을 할 수 있는 권능을 얻었고 말입니다. 이후의 황제들도 마찬가지였고요.”
“거기까지는 저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만...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까?”
“역대 황제들은 신께 받은 권위를 업고 온갖 패악을 부려 왔습니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수틀리는 곳에는 신벌을 내려 왔었지요. 제국 역사에 따르면 2대 황제는 자신의 즉위식 때 한 소녀가 기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소녀가 속해 있던 도시에 신벌을 내렸다고 하고, 15대 황제는 당시 음유시인들이 부르던 노래가 자신을 조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망상에 빠져 제국 안의 모든 음유시인을 잡아와 혀를 잘라 버렸다고 합니다.
황제는 자신이 신들의 힘으로 제국을 수호하고, 병들지 않게 한다고 주장합니다만, 제국은 황제에 의해 병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국인의 목숨이란 황제의 입김에 달려 있고, 자유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모독자인 저를 구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절 구해 구시고, 보살펴 주신다면 언제든 목숨이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아시는 분께서 말입니다.”
“...저는 이 도시의 영주입니다. 이 도시는 폭력의 신을 주신으로 모시는 대도시인 라이너 시의 영역권 내에 있어, 라이너 시를 다스리는 영주의 말씀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지금 도시 이곳저곳을 빨갛게 장식하고 있는 것도 폭력의 신을 기리는 축일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뭔가 괴로운 듯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다.
“라이너 시의 영주는 신의 명에 따라 제국 외부의 야만인들을 처리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저희 같은 부속 도시의 영주들도 도시의 시민들을 이끌고 이 작업에 참가하지요. 야만인들은 악마의 저주를 받은 자들로 인육을 탐하는 잔인무도한 족속이라 가르침을 받아 왔기도 했고, 수백, 아니 수천 년 전부터 행해지는 당연한 일이라기에 저도 영주 자리를 아버지께 물려받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폭력의 신은 폭력을 통해 억압해야 인간이 멸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죠. 신의 의지가 닿지 않는 영역에 있는 야만인은 적절한 압박을 통해 제국을 해칠 생각을 못 하게 해야 한다고 여긴다더군요.”
“야만인들이 기근으로 인해 제국의 국경을 침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야만인을 처리하러 갔었습니다. 제국인들을 뜯어 먹으러 아귀 같은 자들이 온다고... 공문이 내려서요. 그 때가 아버지의 뒤를 이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사실상 처음으로 야만인 처리에 직접 참여를 하게 되었죠. 벌써 십 년도 더 전 일이네요.
전 그들이 악마의 저주를 받은 식인종이니 다 죽여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자리로 나갔습니다. 숫돌로 칼을 갈고, 활을 정비하고. 태워 버리기 위해 불 잘 붙는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하. 악마의 하수인이라더니, 저희가 나간 곳에 있던 자들은 제국인과 다를 바 없는 인간들이었습니다. 똑같이 두 손과 두 발이 달리고, 열 손가락을 가진 자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야만인이라고 칭하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제국 밖에 사는 거주민들이고, 같은 인간이죠. 사실 그들이 인육을 먹는다는 것도...”
엘피스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표정이 절망과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고통스러운 진실을 말했다가는 그가 완전히 무너질 것만 같았기에, 엘피스는 말을 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었다.
“전 그 당시 겨우 이십 살 조금 안 넘는 세상물정 모르던 청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배워 왔던 신들의 가르침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고요. 하지만 라이너 시의 영주께서는 그들을 일제히 학살할 것을 명하셨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신들은 왜 저 야만인들을 미워하는가. 악마의 저주를 받았다는 자들이 왜 이리 우리와 다를 바 없는가...
하지만 고통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영주께선 제게 처음이라 전투를 하는 데 익숙하지 않을 거라면서 대신 다른 작업을 맡겼습니다. 야만인 아이들은 돈이 된다면서, 아이들을 약탈해 오면 개중 건강한 아이는 골라내고, 병든 아이이거나 약해 빠진 아이, 그리고 식인 습성이 있는 아이는 죽이라고 명을 내리더군요. 제 성엔 지금 갓 태어난 갓난아이가 기다리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렇다고 명을 따르지 않으면 신벌이 내릴 테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전 학살의 현장에서 잡아 온 아이들을 제가 데려온 군사들 중 몇몇을 뽑아 오른 쪽과 왼쪽 두 집단으로 분류시켰습니다.
왼쪽 방에 격리된 아이들은 상품으로 팔려 나갔고, 오른 쪽 방의 아이들은 들어가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손바닥 크기가 제 새끼손가락만큼도 되지 않는 작은 어린아이까지도 칼로 찍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영주의 목소리는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을 제가 징집해 온 군인들에게 맡기고 전 막사에만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비명소리와 원망하는 목소리, 그리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머릿속에 가득이 울려 퍼지더군요. 미쳐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군인들은 더 괴로웠겠죠. 하룻밤 사이에 집행하던 군인 세 명이 자살했습니다. 신벌을 피하면서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저흴 통솔하던 영주님은 제 분류 작업에 굉장히 만족해하시며,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하시더군요. 결국 그 일 이후 저희 도시에서는 약탈해 온 아이들을 잡아 상품을 분류하고 판매 가치가 없는 것들을 처리하는 일을 담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지옥이 또 어디 있을까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제 귓가에서 끊어지지를 않습니다.“
“위버멘쉬라 부르셨던 건 거기서 연유한 것이었나 보군요. 모독자들은 신들의 압박에 반발하는 의미에서 자신들을 위버멘쉬라고 부르니까요. 절 도와주신 건 정의감이 드셔서 그러신 겁니까?”
“제게 정의란 게 있을까요. 그저 나약한 놈일 뿐이죠. 결국 전 학살을 막지도 못했으니까요.
가장 최근의 원정에서 야만인 여자아이 두 명이 제 막사 안에 숨어든 적이 있었습니다. 막사의 침대 아래 숨어 있다가 들키니까 기겁을 하더군요. 분류하는 줄에서 어떻게 도망쳤는지... 둘 다 상품 가치가 없어서 죽을 운명이란 게 빤히 보였습니다.
차마 죽게 내버려둘 수가 없어서 한밤중에 몰래 도망치게 해 주었습니다. 그걸 제외하곤 아무 것도 못 했어요. 겁쟁이에, 비겁자니까요.”
“여자아이 두 명 말인가요.”
“네. 큰 녀석은 하얀 머리카락에 눈동자가 새까만 녀석이었는데, 작은 여자 아이를 한 명 붙들고 있더군요. 작은 녀석은 여느 야만인들처럼 검은 머리카락이었지만요. 예쁘게 생기긴 했지만 큰 녀석이나 작은 녀석이나 비쩍 말라서 써먹을 데가 없다고 죽일 게 뻔히 보였습니다.
큰 애가 덜덜 떨면서 부디 동생만은 살려달라고 비는데, 차마 그냥 둘 수가 없어서 먹을 걸 좀 챙겨 주고 도망치게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그것뿐이었습니다.
정작 분류되며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거나, 죽지 않더라도 노예로서의 비참한 삶밖에 기다리고 있지 않은 저 수많은 아이들은 구해 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어요! 전 천치이고, 비겁자입니다.
신벌이 두려워서, 차마 할 생각도 못하고, 그저 제 손에 피 안 묻히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정작 제 도시의 사람들은 그 비인간적인 작업을 하면서 병들어 가고, 피를 잔뜩 묻히고 있는데도... 하.”
그리고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말을 잠시 멈춘 영주의 눈은 너무나 슬퍼 보였기에, 엘피스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도시민들은 징집되었다가 돌아올 때마다 동요했습니다. 당연하죠! 그런 미친 짓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정기적으로... 하지만 그 일에 대해 떠벌리는 자들을 신벌 방지를 위해 죽여야만 했습니다. 마음에 골병든 자들도 알아서 솎아 내야 했고요. 전 그걸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 짓을 앞으로 제 자리를 물려받게 될 제 딸아이도 해야 한다는 게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딸이라면...”
“아이들이 여럿 있기는 하지만, 막내인 알레테아가 사람들과 잘 친해지더군요. 똑똑하다고 보긴 어렵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능이 있어서, 그 아이에게 영주 자리를 물려주려고 생각 중이었습니다. 지금은 수도로 공부를 하러 나가 있죠.”
영주는 그제서야 시종일관 짓고 있던 우울한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활짝 웃고 있다기보다는 씁쓸함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고 보는 게 옳겠지만 말이다.
“여기, 이 초상화가 그 애의 얼굴을 그린 겁니다. 절 아주 똑 빼다 박았죠...!”
그러면서 벽에 걸려 있던 초상화 하나를 가리켰다. 아버지와 똑 닮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말괄량이 같은 귀여운 얼굴의 여자아이가 그려진 초상화였다.
“부디 이 아이는... 아니, 미래에는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폭압이에요. 이런 미친 짓거리를 하지 않으면 신벌을 받게 되고, 황제는 이런 반인륜적인 일이 일어나든 말든 폭정을 일삼습니다. 제국인들의 마음은 점점 병들어 가는데, 그걸 도려내려고만 하지 고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남는 것이라곤 하얀 뼈와 빈껍데기뿐일 텐데도 말이지요.”
영주는 두 손을 모아 얼굴을 감싸며, 거의 흐느끼듯 말을 이었다. 아까까지는 웃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딸과 딸이 살아갈 미래를 생각하니 절망감이 몰려온 듯 했다.
그런 그를, 엘피스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 같잖은 위로는 오히려 독이 될 뿐이다.
“엘피스 님. 몰래 금서를 읽고, 조사를 하면서 당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자아의 신이 신벌을 내리는 도시에서 태어나 수많은 금서를 집필하고, 신의 백성들과 싸워 오며 많은 제자를 육성하시다가 결국엔 위대한 존재의 자리에 오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악마의 힘이 아니라, 스스로요. 그런 분이라면 이 세계를 어떻게든 바꿀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품었습니다.”
“전 그저 개인에 불과합니다. 위버멘쉬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다지 힘이 강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도와 드리고 싶었습니다. 위험에 처하셨을 때 어떻게든 돕고 싶었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작은 보탬이 된다면...”
영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북받쳐 올라오는 것이 있었는지, 그는 엘피스의 손을 꽉 잡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를 있었을까. 다시금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가 깨졌을 때, 그가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부디 미래를 지켜 주십시오. 아이들이 이 지옥에서 사람들이 살아가지 않도록, 못난 아비가 살던 세상을 그대로 살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염치없는 말씀이지만, 제 딸아이를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엘피스를 위해 그가 준비해 왔던 것들을 스스럼없이 내놓았다.
하도 찌르고 썰어대느라 피와 기름이 잔뜩 끼어 있던 단검은 완연히 새 것이 되어 있었고, 그 외에도 여러 종류의 무기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단검부터 대거, 석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기들이 집합되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쉬이 구하기 어려운 특상품이었다.
그리고 이전에 입던 걸레짝이 된 옷을 대신하여 튼튼하게 짜인 옷과 그 위를 덮는 짙은 검은색 로브가 함께 들려졌다. 자고 있을 때 치수를 쟀는지 딱 맞는 옷이었다.
엘피스는 말없이 검은 로브를 집어 뒤집어 써 보았다. 준비한 사람의 진심 덕인지, 속옷 바로 위에 입었음에도 따뜻함이 느껴지는 옷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엘피스는 도시에 신벌이 내려 영주와 도시민들이 몰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