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 녀석에게 걸리면 죽을 지도 몰라요. 왜 도와주는 거죠? 같이 도망쳐요!”
엘피스는 알레테아가 외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시 과거를 생각하고 있었다. 과거 만났던,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걱정하던 바로 그 남자를.
이제 자신의 앞에 그 남자와 똑 닮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 남자가 가장 걱정하던 아이, 미래에 진리를 보고 자유를 얻게 되길 바라던 그 아이가, 부쩍 큰 모습으로 자기 앞에 서 있었다.
“난 네게 빚이 있어.”
“네?”
“정확히 말하면 네 아버지께 빚이 있지. 여기까지다. 빨리 도망치고, 다 잊어버려.”
그렇게 대답을 하며, 골목길 안쪽으로 알레테아를 밀어 넣는 엘피스의 모습은 무언가 애수어린 느낌마저 들게 했다.
소중한 것을 다시 생각하듯이, 잠시 잊었던 약속을 상기시키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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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간 거야? 길드장님 어디 갔어? 라쉬미가 배고프다는데, 어디 갔어...”
하얀 머리카락의 소녀가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 소리가 거의 늑대가 달을 보며 우는 것과 같이 밤의 거리에 웅웅 울려 퍼졌다.
“길드장님 거짓말이나 하고... 난 믿었단 말이야. 길드장님이라면 거짓말 안 할 거라고 믿었단 말야...”
소녀의 목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거친 목소리를 낸 지 얼마지 않아 숨이 막히도록 꺄르륵대다가, 갑자기 뚝 멈추고 연신 비명을 질러 댔다. 문자 그대로 정신병자처럼 그렇게 홀로 웃다가 비명을 지르다가를 반복하며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이대로 물러가 준다면 고마울 일이었다. 싸움 없이 끝낼 수 있다면,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일도 없었으니까. 그렇게만 되면 일부러 어렵게 풀지 않아도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엘피스의 기대를 간단히 저버렸다. 헛된 기대감을 품은 지 채 몇 초도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소녀가 엘피스가 숨어 있던 기둥을 향하여, 정체불명의 검은 금속으로 이루어진 무언가를 날렸던 것이었다. 팔뚝 정도 길이의 끝이 엄청나게 날카로운 검은 창 같은 물체였다.
문제는 그 검은 물체가 어마어마하게 단단하다는 것에 있었다. 경도가 어찌나 높은지, 기둥에 우직 소리를 내며 거대한 금이 생겨 버렸다. 단순히 금이 생기는 정도로 끝난 것도 아니었고, 기둥을 관통하여 엘피스의 눈 언저리에 간신히 닿을락말락할 정도까지 깊숙하게 꽂혀 있었다.
“거기 있어? 거짓말쟁이의 심장을 찾으러 왔어! 곧 가지러 갈게.”
제기랄, 역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나 보다.
하긴, 아까까지 알레테아와 기둥 바로 뒤 골목길에서 나름 대화라면 대화랄 것까지 했는데 저 소녀가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알레테아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부터도 거리를 좁혀 가며 기척 없이 추격해 온 자인데, 눈치가 그렇게 나쁠 리 없었다.
결국 계획이 어렵게 흘러가게 되려나 - 하고 약간은 아쉬워진 엘피스였다. 사실 알레테아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게 한 시점에서 계획이 제대로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지라, 그렇게 심히 아쉽지는 않았다. 다 잊어버리라 했다지만 그걸 칼같이 지키는 사람을 지금까지 단 한 병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쉬움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엘피스는 천천히 몸을 기둥 밖으로 돌려, 소녀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알레테아가 도망칠 때까지 시간을 벌고 나서 다음을 기획해야겠다고 여기면서.
어차피 이렇게 된 것, 피를 흩뿌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해서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더라도 일단 막고 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엘피스는 모습을 드러낸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짓말쟁이의 심장이라니, 설마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건가?”
“어? 언니 누구야~? 예쁘게 생겼다. 키 되게 커!”
말이 안 통할 것 같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말이 안 통하다니... 제대로 사고를 하기는 하는 걸까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엘피스의 감각이 저 소녀가 극도로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온몸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숨 막히는 살기가 피부 사이로 스며들어갔다.
엘피스는 언제든지 대처할 수 있도록 로브 안에 숨겨둔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딱딱한 무기들 사이 알맞은 것을 골라잡아, 언제든지 꺼내 급박하게 시작될 전투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긴장을 좀 했는지, 손에 살짝 땀이 맺혀 있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엘피스를 소녀는 새까만 눈으로 또렷이 응시했다. 동공이라곤 보이지도 않는 불길한 눈으로, 입은 굳게 다문 채 응시하고만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극도로 위험한 분위기를 풍길 뿐 그냥 미친 사람 같았는데, 그렇게 똑바로 서서 응시하고 있으니 한층 더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더해졌다.
“라쉬미가 그러는데 언니가 무섭대... 그러니까 빨리 지나가게, 좀 알려 줘. 길드장님 어디에 숨겼어? 숨겼잖아...
네가 숨겼잖아!”
앞부분까지는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목소리였는데, 마지막 단어만큼은 기괴할 정도로 크게 울렸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엘피스도 깜짝 놀랄 정도로, 거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밤의 상점가를 잔뜩 메워 놓았다.
그리고 그 말인지 비명인지를 내뱉은 순간, 소녀의 몸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손에서 아까와 같은 검은 금속으로 된 창을 만들어 내더니, 바로 엘피스의 정면으로 창을 집어 던졌다.
그 일련의 움직임이 물 흐르듯 이루어졌다. 통상적인 사람이었다면 바로 가슴에 직격당해 죽었을 정도로 엄청난 빠르기로. 말라붙은 소녀인 주제에 얼마나 힘이 센 거야, 싶을 정도로 창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엘피스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그러나 엘피스는 창이 날아 올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는 듯 미리 로브 속에서 꺼낼 준비를 하고 있던 무기를 꺼냈고 - 그대로 짧게 휘둘러 검은 창을 쳐 내 버렸다.
꺼낸 것은 이전부터 애용해 왔던, 제자가 만들어 주었다는 그 단검이었다. 한 뼘 반 정도나 될까말까한 단검이었으나, 엘피스는 그 작은 단검의 칼등을 이용해 간단한 움직임만으로 가슴으로 직격해서 날아오던 검은 창을 쉽게 튕겨 냈다. 마치 그게 좀 긴 이쑤시개라도 된다는 것처럼, 너무나도 가볍게 튕겨 내 버렸다.
그리고 튕겨내진 검은 창이 바닥에 떨어져 나가기도 전에 엘피스는 로브 안에 수납해 두었던 석궁을 꺼내 들었다. 언제라도 한 발만큼은 바로 쏠 수 있도록 화살이 미리 장전되어 있는 석궁이었다. 엘피스는 석궁을 꺼내들자마자 지체 없이 소녀의 머리를 향하여 석궁을 발사했다. 자세를 잡을 새도 없이, 오로지 감으로만 조준하여.
발사한 그 순간이 되어서야 튕겨나갔던 검은 창이 바닥을 구르며 ‘챙’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엘피스는 그런 것을 상관할 시간이 없다고 여기며 바로 두발 째를 준비했다. 첫 번째 쏘았던 화살의 궤적을 확인하면서.
그러나 두발 째를 장전하기도 전에 소녀는 엘피스 바로 앞으로 짓쳐들어왔다. 엘피스의 화살이 잘못 날아간 건 아니었다. 엘피스의 화살은 소녀의 머리를 정확히 직격했다. 다만 소녀는 첫 번째 발사한 화살을 피하는 대신 까만 금속으로 된 작은 방패를 만들어 내 화살이 머리를 공격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었다.
엘피스는 화살이 방패에 맞아 무용지물이 되자마자 바로 두 번째를 장전했으나, 소녀는 화살이 채 장전되기도 전에 엘피스의 바로 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것도 언제 벌써 만든 건지 검은 금속으로 된 꼬챙이를 오른손에 든 채로 엘피스의 턱밑까지 와 있었다. 왼손은 여전히 너덜너덜한 상태로 몸이 움직일 때마다 덜렁거렸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어디 숨겼어! 내놔! 계속 막기나 하고... 이번엔 손가락만으론 안 끝날 거야!”
소녀는 악을 쓰며 꼬챙이를 그대로 엘피스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엘피스의 턱 아래를 관통해서 꼬치구이로 만들고 싶었던 건지, 턱 아래쪽에서부터 꼬챙이가 솟아 올라왔다.
그러나 그런 동작을 해 준 것은 정말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팔을 쭉 뻗는 큰 동작을 취하면 빈틈이 생기기 마련인지라... 엘피스는 그 틈을 노려 소녀를 공격했다. 발 한 쪽에다 힘을 있는 대로 모은 뒤 다른 쪽 발을 들어 그대로 소녀의 배를 걷어 차 버린 것이었다.
어찌나 세게 걷어찼는지 소녀의 몸이 그대로 튕겨나가 상점가 길바닥 중앙에 처박히고 말았다. 형편없이 구겨지는 수준으로 처박힌 소녀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으으으 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신음 소리는 어딘가 뼈가 부러졌다던가 해서 아픔에 겨워 내는 소리라기보다는 적의에 찬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엘피스는 소녀를 감상할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연민할 생각도 없었다. 저 소녀를 걷어차지 않았다면 자신의 턱이 꼬챙이에 꿰뚫렸을 테니까. 바로 처리해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엘피스는 잠시 떨어뜨려 놓았던 석궁을 다시 장전했다.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못 움직이게 할 필요는 있었다.
석궁의 화살촉에는 맞은 자를 마비시키는 독이 발라져 있었기에, 이 정도로 하고 끝낼 생각이었다. 정말 죽일 생각이었다면 걷어찰 때 신발 끝에 장착해 두었던 작은 칼을 사용했을 터였다. 적의에 찬 신음을 빨리 거두도록 하고 자신은 이쯤에서 물러날 필요가 있었다.
엘피스는 석궁에 장전했던 화살을 소녀의 넓적다리 부분을 향해 정확히 조준했다. 이것으로 대충 빚도 갚고, 자신도 피를 흘리지 않고 끝낼 것이었다. 예상보다 매우 쉽게...
그러나 그 순간 뭔가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자신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임에도, 순식간에 패퇴할 것만 같다는 기이하고도 소름끼치는 감각이, 엘피스의 온몸을 휘감았던 것이었다.
‘뭐지, 이 불길한 느낌은...’
엘피스는 그 불길함에 자기도 모르게 석궁을 쏘는 것도 멈추고 뒷걸음질을 쳤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이대로 쉽게 끝날 리가 없다고 몸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뒷걸음질을 친 순간 - 갑자기 눈앞이 시꺼메졌다. 그러나 절대 시력을 잃었다던가, 눈이 감겼다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뒷걸음질 치기 직전 자신의 머리가 있던 곳에, 까만 금속으로 된 머리 크기의 구체가 생겨났던 것이었다.
구체는 중력의 방향을 따라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지며 쿵 하는 소리를 냈다. 속이 꽉 차 있었는지 아주 묵직한 금속음이 났다.
만약 뒷걸음질을 치지 않았다면, 저 구체가 자신의 머리통 속에서 형성되었을 터였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내부에서부터 머리가 박살이 났겠지...
“킥킥킥... 그걸 피하네. 어떻게 알았지?”
어느새 소녀가 히죽거리며 살짝 당황한 상태인 엘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맞은 충격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입에 묻은 피를 손으로 슥 문질러 닦으며 소녀는 웃어 보였다.
“하지만 다음 거도 피할 수 있으려나? 이제 그만 비키고 길드장님 어딨는지 알려 주면 손가락 다섯 개 기부 받는 거로 용서해 준다고, 라쉬미가 말하랬어.”
엘피스는 소녀를 잠시 바라보았다가, 땅에 떨어진 검은 구체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너무 쉽게 풀린다 했더니. 이런 까다로운 능력이 발목을 잡았다.
저 소녀의 능력이 손에서 검은 금속으로 된 물체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추측했던 자신의 패착이었다. 정상적인 오른손에서 계속해서 검은 물체를 소환해 내는 능력 자체는 금속의 경도가 단단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신경 쓸 게 없다고 여겼는데, 단순히 그런 정도에서 그치는 능력이 아니었다.
녀석의 진정한 능력은 원하는 위치에 검은 금속으로 된 물체를 형성하는 능력이었다. 지금까지 자신과 싸웠던 것도, 심지어 대차게 얻어맞은 것도 그저 탐색전의 일환일 뿐. 진짜 목적은 방심시킨 후 움직임이 멈추었을 때 머리 위치에 금속 구체를 형성하여, 머리를 내부부터 박살내버리는 것이었다.
만약 피하더라도, 그런 능력이 있다면 얼마지 않아 상대를 만신창이로 만드는 것쯤은 일도 아닐 능력이었다. 구체가 생기는 위치는 구체를 만드는 소녀나 정확하게 알 테니까. 감으로 잡는 것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다만 한 번에 하나씩밖에 만들지 못하는 것 같았고, 거리 제한이 있는 게 확실했다. 거리 제한이 없다면 아까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바로 위치를 조준하면 되는데, 그러지 않고 창을 던졌으니까. 어느 정도 거리 제한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이런 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거리가 어느 정도까지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도망치다 머리만 폭발하고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도망치면 바로 비밀통로를 수색하려 들 텐데, 알레테아가 신전에 도착하기엔 아직 시간이 부족했다.
‘역시 피 튀기면서 싸우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나 보군.’
엘피스는 그리 다짐하며, 다시 몸을 움직여 간발의 차로 검은 구체에 머리가 터지는 것을 피했다. 아직까지는 대충 언제 어디에 구체를 형성할지 감으로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싸울 때 움직임에 제약이 생길 터였다. 거기다 또 하나 문제가 있었는데, 검은 물체는 만들어진 이후에도 없어지지 않는 것 같다는 문제였다. 아마 없어지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없어지는 것 같은데, 이대로라면 상당히 큰일이었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 피해야 하는 만큼 피하는 순간만큼은 다른 것에 집중을 할 수가 없어 무방비일 터였다. 그 사이에 아까처럼 검은 금속으로 된 무기(꼬챙이든, 창이든)로 공격해 온다면 막을 재간이 없었다.
‘젠장. 어렵게 흘러가겠어...’
그런 엘피스의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아니면 알더라도 관심이 없는 건지 소녀는 오른손에 기다란 꼬챙이를 다시 쥐었다.
“이제 설득하는 거도 질렸어! 아까부터 방해나 하고. 참 나쁜 사람들이야. 아까 걔는 손가락 열 개로 끝냈지만, 이번에는... 라쉬미가 무서워하니까, 안 무섭게 내장을 뽑아서 줘야겠다. 히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