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등장인물 집결
매년 가는 여행이었지만 장을 보는 시간은 늘 설렘으로 가득했다. 지하층의 식품매장은 휴가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붐볐다. 단연 인기가 가장 많은 곳은 정육코너였다. 손님을 끌기위한 각종 판촉행사가 주를 이루었고 시식코너는 우리로 하여금 선택의 딜레마에 빠지게 만들었다.
"국내산이나 수입산이나 큰 차이 없어. 오히려 요즘은 수입산 돼지고기가 더 맛있다니까? 가격은 훨씬 더 저렴하니 양은 풍족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질적인 측면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 고민할 필요가 없지. 한때나마 고기장사에 손을 댔던 사장님으로써 말해주는 간절한 충고야."
가영은 수입산 돼지고기를 한 점 입에 넣더니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한결같이 국내산을 고집하는 유희였지만 시식코너에서 맛을 보더니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특별히 수입산에 양보하도록 할게. 대신 삼겹살이랑 목살 비율은 7대 3으로. 알지?"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아주머니 들으셨죠? 고기는 두 근 반 정도 주시고 비율은 7대 3으로 잘라주세요."
가영과 유희가 고기를 고르는 동안 나와 혜나는 야채 쪽을 맡았다. 상추와 깻잎, 마늘과 고추를 골라 카트에 담았다. 부부라도 된 마냥 단 둘이 카트를 끌고 마트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것 자체가 나에겐 소소한 행복이었다.
"물이랑 음료, 기타 부대음식까지 다 골랐고 마지막으로 술만 남았네? 갑시다. 오늘의 메인코너로."
<제인오스틴>의 멤버 여섯 명은 모두 주당이었다. 술이 목적이 아닌 술자리의 분위기가 좋아서 만나게 된 사람들이 이 여섯 명이었으니 모임의 설립 의도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대학시절 학생회 임원으로 활약하던 내게 가장 좋은 점을 꼽으라면 단연 공권력 남용이었다. 학생회에서 주최하는 술 모임을 매일 같이 만들어서 좋은 사람들과 한잔하는 것이 나에겐 행복이었다.
물론 누구와 마시느냐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었기에 여러 번의 필터링이 필요했다. 코드 맞고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들을 추리고 추리다보니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이 여섯 명. 그때부터 우리는 <제인오스틴>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술자리를 갖았다. 술을 먹다보면 여러 얘기가 나오기 마련이고 결국 1년에 한번 씩 여행을 가자는 안건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어느덧 올해로써 이 여행도 6년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다들 나이가 먹고 사회로 진출하면서 술자리 모임이 뜸했진 건 사실이었으나 여행만큼은 어떻게든 유지해보자는 개개인의 노력이 있었기에 이번 일정을 맞출 수 있었다. 게다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이었기에 지금 이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일단 소주는 두당 2병씩만 마셔도 12병인데 스페어로 3병 추가하면 15병. 맥주는 피처로 5개, 여기에 소수의 취향을 고려해서 산사춘 1병에 백세주 1병 추가. 일단은 이 정도만 사고 가서 부족하면 더 사는 걸로."
주류선정에서는 누구의 이견도 없었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기계처럼 술을 옮겨 실었다. 가영은 개수를 세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카트를 밀었다.
"소주가 한 병 더 실렸는데 그냥 실고 가는 걸로."
계산대는 모두 만석이었다. 어림짐작하여 줄이 가장 짧은 곳으로 카트를 끌고 갔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주인공은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지. 이렇게 카드를 들고 멋지게 말이야."
하얀 얼굴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남자. 거만하게 올려 쓴 스냅 백에는 그와 어울리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NEW YORK YANKEES"
미국인처럼 작은 얼굴에 다부진 어깨를 자랑하는 경찬은 신용카드를 손에 쥔 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경찬의 어깨를 방패삼아 그 뒤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사람. 여리여리한 체구는 숨길지 몰라도 특유의 쾌활함만큼은 금세 들통 나고 말았다.
"윤지수. 뒤에서 그만 큭큭 거리고 어서 모습을 드러내라. 막내가 빠져가지고."
방패 뒤에 숨어 얼굴만 빼꼼 내민 지수는 싱글벙글이었다. 마치 방금 막 만화 속에서 빠져나온 캐릭터처럼 묘한 입체감이 살아 있었다.
"차원을 달리는 소녀."
그녀가 10학번 신입생으로 입학했을 때 내가 받은 첫인상이다. 모든 것이 특별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덕분에 신입생 때부터 주위에 남자가 끊이질 않았다. 여자들의 기준에서 가장 선호하는 ‘마른 몸매’도 그녀의 인기에 한몫했다. 자존심 센 혜나조차 그 부분에 대해서는 쿨하게 인정했다.
"지수 몸매는 타고 났어. 내가 피땀 흘려 쟁취한 걸 쟤는 갖고 태어난 거야. 여자입장에서 이렇게 부러울 수가 없는 거지."
남자로 하여금 소유욕을 일으키는 여자만큼 무서운 팜므파탈이 또 있을까. 그러나 그녀는 단 한 번도 남자의 구애를 허락하지 않았다. 내 바로 앞에서 방패처럼 지수를 가리고 있는 경찬이 얼마 전 당선자로 지목되기 전까진.
강경찬. 나와 같은 05학번 동갑내기로 학생회 임원진 중 한명이었다. 내가 홍보부장을 맡아 열심히 펜대를 굴릴 때 그는 축구공을 갖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체육부장이란 타이틀에 딱 맞는 체격과 운동신경, 거기에 터프한 성격까지 갖췄기에 여자 후배들 사이에선 선망의 존재로 거론되어왔지만 그는 오직 한곳만 바라보았다.
윤지수.
그러나 그녀는 경찬에게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승부욕 강한 경찬으로서는 애가 탈 수밖에 없는 상황. 우린 술을 마시며 몇 년 간 원인분석을 했지만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최후에 내린 결론은 너무나 추상적인 것이었다.
"너나 나나 그녀들이 받아줄 때까지 최선을 다하자. 간절함이 하늘까지 닿았을 때 우주도 우리의 소원을 들어줄 거야."
경찬의 끝도 없는 투정을 받아주느라 힘들었던 나로서는 어떻게든 마무리 짓고 싶었기에 얼렁뚱땅 던진 한마디였으나 그것이 현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늘부터 지수랑 만난다. 고맙다. 그때 너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됐어."
한 달 전쯤 걸려온 한통의 전화를 시작으로 기적은 연달아 일어났다. 나 역시 혜나와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커플이 된 사실은 <제인오스틴> 멤버들 사이에서는 비밀이었다. 설령 모두가 눈치 채고 있더라도 쉬쉬하고 넘어가자는 주의였다. 모임 내 커플이 탄생하면 언젠가는 헤어지기 마련이기에 그 모임은 지속성을 갖기 힘들었다.
나름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제인오스틴>이었기에 섣부른 공개연애는 커다란 민폐가 될 수 있었다. 혹시나 결혼을 한다면 모를까 그 전까지는 절대 발설금지였다.
"자, 카드는 저에게 주시고 카트의 물건 좀 계산대에 올려주시죠. 힘 센 형님."
가영은 경찬으로부터 카드를 뺏은 뒤 습관적으로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카트를 꽉 채웠던 물건들이 바코드 찍는 소리와 함께 일사분란하게 빈 박스로 옮겨졌다. 남자들이 박스를 하나씩 짊어지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 트렁크 좀 열어 주시죠. 선재 형님."
들고 있던 박스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듯 떨어트린 가영은 관자놀이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유명 브랜드 사의 회색 티셔츠는 이미 땀으로 물들어 버렸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박스를 트렁크에 옮겨 실었다.
"정말이지 미국 SUV는 트렁크도 엄청 넓구나."
경찬은 박스를 트렁크에 실으며 부러움에 가득 찬 눈빛을 보냈다.
"1년짜리 고액 할부금이 걸려있는 자동차야. 부러워 할 필요 없어."
2016년산 포드 익스플로러를 사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2016년 4월 4일. 내 기준에서는 로또를 맞은 날이다. 유명 잡지사에서 1년짜리 연재 오퍼가 들어옴과 동시에 예전부터 틈틈이 써오던 추리소설이 공모전에 당선되는 겹경사가 터져버린 4월 첫째 주 월요일. 내가 가장 싫어하는 월요일이었지만 그날만큼은 달력에 적힌 Mon이 그토록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곧바로 향한 곳이 대전에 하나 뿐이 없는 포드 전시장. 딜러와 3시간가량의 협상 난투극을 펼친 끝에 원하는 가격표를 얻어냈다. 그리고 내가 동원할 수 있는 현금자산을 모두 털어 2/3가량의 금액을 납부했다. 물론 남은 금액은 자연스레 신용카드의 몫이었다.
그날부로 난 드림카를 손에 넣었다. 물론 1년간 할부금의 노예로 살게 되었지만 내 상환능력에 대한 의심은 조금도 없었다. 공모전 상금과 더불어 도서 출간 후에 매달 입금될 인세. 거기에 추가적으로 점점 더 늘어만 가는 원고 오퍼가 자신감을 북돋아주었다.
"차 자랑은 이쯤 해두시고 얼른 출발하자. 덥다."
혜나는 머리에 걸치고 있던 선글라스를 끼더니 뒷좌석에 올라탔다. 자연스레 지수가 그 뒤를 따랐다.
"세금징수원이 자연스레 사업주 옆에 타는 거지? 유희야.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차에 빨간 딱지 붙여버려. 국고로 환원시키지 말고 네가 갖는 거야. 오케이?"
경찬은 시덥잖은 농담을 던진 뒤에 조수석으로 사라졌다.
"너무 밟지 말고 정속주행하면서 쫓아와. 막혀봐야 2시간이면 도착할거야."
"본부 받잡겠나이다."
가영은 과장된 동작으로 경례를 하더니 유희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뒤 두 대의 외제차가 이마트를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과속단속 카메라의 인내심에 맞춰 달리던 차들은 하이패스를 통과하자마자 굉음을 내며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