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마피아게임, 시작
펜션 근처 자연경관도 한몫했다.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과 지저귀는 새들, 그리고 그 밑으로 길게 뻗은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도시와는 완전히 별개인 파괴되지 않은 자연. 다른 세상 속에 웅장한 저택 한 채가 길게 늘어선 산들을 병풍삼아 우리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저택으로 향하는 길목은 깔끔하게 정리된 자갈들로 깔려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신발장이 위치한 작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앞을 또 다시 중문이 막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중문마저 밀어 제치자 마침내 거대한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높은 천장에 달린 클래식한 느낌의 샹들리에였다. 12구의 캔들형 전구가 저택 내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홀 왼쪽으로는 다 빈치의 작품인 ‘최후의 만찬’에서 본 듯한 기다란 식탁이 위치해 있었고 12개의 의자가 줄지어 있었다. 제일 끝에 있는 의자 뒤편에는 벽걸이용 바로크 전화기가 걸려 있었는데 다이얼을 잡고 돌리는 시스템으로 옛날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홀 오른편에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4인용 소파가 놓여 있었고 그 앞으로 원형의 커다란 카펫이 깔려 있었다. 카펫에는 카인이 곤봉으로 아벨을 내려치려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긴장감마저 들었다.
"색채화가인 티치아노의 그림이야. 제목은 ‘카인이 아벨을 죽이다’. 원작은 베네치아 성당에 있어서 쉽게 구경할 수 없지만. 이건 아무래도 CG로 그려낸 거 같은데 현실감이 원작 못지 않아!!"
평소 예술작품에 조예가 깊은 유희가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카인과 아벨은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두 아들이야. 형 ‘카인’은 농부였고 동생 ‘아벨’은 양치기였어. 카인은 사람이 낳은 최초의 사람이었고, 아벨은 최초로 사망한 사람이었지.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써 최초의 살인을 저지른 거야. 그 장면을 담은 명화가 바로 이 작품이지."
설마 대한민국 산 속 펜션에서 이런 명화를 보게 될 지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는 다시 한 번 펜션지기의 안목에 놀라며 박수를 쳤다.
소파 맞은편에 부엌이 보였고 그 옆에 공용화장실이 있었다. 부엌 안은 아담한 식탁과 냉장고, 다양한 조리기구로 가득 찬 주방 싱크대가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간이 화장실이 하나 더 있었다. 여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아무래도 남녀가 화장실을 공유하는 것은 모두에게 찜찜한 일이었다. 화장실 안에 샤워시설까지 함께 구비되어 있었기에 부엌을 가운데에 두고 미묘한 경계가 그어졌다.
공용화장실 옆으로는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이 꽤나 높은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앤티크 느낌의 고목나무 계단은 한걸음 뗄 때마다 깊은 울림을 내뱉으며 더 높은 곳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자그마한 공간의 계단참 왼쪽으로 방문이 하나 보였다. 문을 열어보니 더블사이즈의 침대와 화장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다행히 침대 밑 수납함에 여분의 이불이 빠져나와있는 것을 확인했다. 바닥에서 자야하는 남자들에게는 필수 아이템이었다.
"아무래도 이 문은 다락방으로 향하는 통로 같은데 왜 막아 놨지?"
경찬은 계단참 끝 쪽 벽에 달린 허름한 나무문을 흔들어 보았지만 자물쇠 때문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강제로 문을 부수면 개방할 수 있겠으나 괜한 호기심 때문에 변상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공포영화의 공식이지만 막아놓은 문을 억지로 열고서 좋은 일이 생기는 경우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어. 그냥 포기하고 내려와."
유희는 1층 소파에 편안한 자세로 누운 채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어느 새 혜나와 지수는 부엌에서 채소를 씻고 있었다. 아무래도 유희 혼자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듯 했다. 남자들은 밖으로 나와 바비큐 그릴에 숯을 넣고 불을 지폈다. 야외 테이블에 일회용 보를 씌우고 대충 식사준비를 마쳤다.
"슬슬 쏟아지려고 하나 본데?"
경찬은 순식간에 바뀐 여름하늘을 보며 불안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 짙은 시멘트 빛깔의 먹구름이 진을 치기 시작했다. 당장 비가 떨어져도 마냥 억울해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조급한 마음을 감추려고 애썼지만 철판위에 고기를 얹는 손길은 점점 더 빨라졌다.
여자들 역시 눈치 챘는지 양손에 접시를 들고 허둥지둥 뛰쳐나왔다. 밥과 채소, 어묵 탕이 테이블 위에 정갈히 놓이니 만찬의 준비는 끝이 났다.
"아직 끝난 게 아니죠. 첫잔은 모두 소맥입니다. 제조 자격증이 있는 제가 말아 올리겠습니다."
가영은 프로의 손길로 금세 여섯 잔을 제조했다. 경찬은 잘 익은 고기와 소시지를 앞접시에 담아 테이블에 올리고는 잔을 들었다. 여섯 명 모두 잔을 드는 동시에 시선이 내 쪽으로 집중되었다. 모임 전통 의식이 거행되는 순간이었다.
"매년 소소하게 이뤄지는 여행모임이지만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모르기에 오늘 하루가 너무나 소중합니다. 지금 이 시간, 여기 여섯 명이 함께 있어서 너무나 좋습니다. 오늘만큼은 바깥세상은 잊고 우리만의 추억을 만듭시다. 제가 ‘제인 오스틴’을 선창하면 여러분이 ‘포에버’를 외쳐주시면 되겠습니다. 자, 그럼 ‘제인 오스틴’!!"
"포에버!!"
고요한 어둠이 찾아온 산속, 여섯 명의 건배가 세상을 깨웠다. 주위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다. 누군가의 간섭 또한 없다. 그저 이 세상에 오직 여섯 명만 존재하듯 마음껏 떠들 수 있는 환경이 존재함에 우리는 돈을 주고 이곳을 샀다. 예전 선조들이 자연을 벗 삼아 놀았다는 말의 의미를 몸소 느끼며 여유 있게 술잔을 들어올렸다.
"과연 값어치를 제대로 하는구나. 이 정도면 하루 숙박으로 백만 원도 아깝지 않겠어."
경찬은 양팔을 뻗어 자연의 내음을 폐부 속으로 있는 힘껏 흡입했다.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모습에 너도 나도 경찬을 따라했다.
"나는 자연인이다."
왁자지껄 웃으며 마시고 떠들던 중 약속이라도 한 듯 일순간 적막이 찾아왔다. 그리고 절묘한 타이밍에 하늘이 움직였다.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하늘이 양 쪽으로 갈라지듯 거대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 떨어지겠다. 빨리 안으로 들어가자."
일행 모두는 먹다 남은 음식과 술을 챙겨 저택 안으로 대피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엄청난 양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태풍을 동반한 폭우여서 강풍 또한 대단했다. 비는 바람에 실려 수직이 아닌 사선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그 비는 그대로 저택 유리창에 떨어져 쉼 없이 노크를 해댔다.
그때 저택 내부에 뻐꾸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지수는 흠칫 놀란 듯 몸을 움츠렸다. 가만 보니 1층 벽 상단에 오래된 뻐꾸기시계가 둥지를 틀고 있었다. 뻐꾸기는 아홉 번을 힘겹게 들락거리더니 제 임무를 마치고 집 안으로 사라졌다.
"벌써 아홉시야? 슬슬 씻고 본격적인 게임에 돌입하자고."
일행은 남녀 나뉘어 각각 샤워실에 들어가 여행으로 지친 몸의 피로를 풀었다. 여자들은 샤워를 마치고 저택 내 전화로 가족과 통화를 했다. 남자들은 모두 내 놓은 자식마냥 전화기와는 거리를 두었다. 모두가 다시 한 자리에 모인 시간은 아홉시 반쯤이었다. 개운해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조금은 노곤해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가영이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자, 자. 지금부터 ‘제인 오스틴’ 연례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참석하신 귀빈께서는 모두 카펫 위에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갖고 계신 휴대폰은 모두 제출해주세요. 반납시간은 내일 이곳을 떠나는 12시가 되겠습니다. 어차피 터지지도 않는 휴대폰 빨리 꺼내서 주세요."
가영은 일행들을 재촉해 바구니에 휴대폰을 걷어서는 식탁 한편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부엌으로 사라지더니 잠시 뒤 직접 술상을 봐왔다. 둘이 들고 나온 상당한 크기의 상 위에는 마른안주와 새로 끓인 어묵 탕이 떡하니 올라와있었다. 가영은 속전속결로 말벌주의 뚜껑을 열어 향을 맡았다.
"오, 향이 장난 아닌데? 일단 벌(罰)주로 세 잔 따를게. 이 놈 색깔 좀 봐."
가영은 흥분한 듯 약간 손을 떨며 술을 따랐다. 일회용 종이컵에 가득 담긴 말벌주는 기이한 향을 풍기며 일행들을 유혹했다. 이로써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행사의 ‘시작’만이 남아 있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 지금부터 제 6회 마피아 게임의 막을 올리겠습니다."
난 연례행사의 개막식을 알렸다. 모두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언제나처럼 여행에서 지분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게임인 만큼 모두의 기대감도 컸다. 서로를 의심하며 마피아를 찾아내는 단순한 게임이지만 그 과정은 스릴로 가득 차 있었다. 뻔뻔한 연기자와 무죄의 관객들이 맞붙는 두뇌게임. 이 게임은 다섯 명 중 최소 두 명 이상이 죽어야 끝나는 살벌한 룰을 갖고 있었다.
"게임의 룰은 모두 알고 있겠지만 혹시 모르니 다시 한 번 설명을 하고 시작하도록 할게."
나는 헛기침을 한 뒤 이목을 집중시켰다.
"일단 여섯 명 중 한명은 사회자 역할을 해야 돼. 그가 이 게임을 이끌어가는 진행자라고 보면 되지. 그리고 남은 다섯 명 중 두 명은 마피아, 세 명은 시민의 역할을 맡게 돼. 역할분담 역시 사회자의 몫이야. 모두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안 사회자는 두 명의 마피아를 지목한 뒤 그들끼리만 서로의 신분을 확인하게끔 유도하지. 게임의 용어 상 이 부분을 ‘밤의 영역’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굳이 이런 틀에 박힌 룰에 얽매이지 않기로 해. 그리고 ‘아침의 영역’이 찾아옴과 동시 모두가 고개를 들어 마피아가 누구인지 추리하기 시작하지. 그러나 방금 말했듯이 우리는 ‘밤과 아침’의 경계를 허물어 버릴 거야. 언제든 누군가를 심판대에 올려서 처형시킬 수 있는 셈이지. 최종 승자는 마피아 두 명을 모두 처형시킨 시민 팀이 되거나, 시민 두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마피아 팀이 되겠지? 팀플이 가장 중요한 게임이란 건 더 이상 말 안 해도 알 테니 생략하기로 하고. 마지막 당부사항은 한 판만 하고 끝낼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한 게임당 제한시간으로 10분을 둘 거야. 5분에 한 명씩은 죽어야만 하는 슬픈 운명인 셈이지만 빠른 전개를 위함이니 다들 이해해주기를 바래."
내 설명이 끝나자 모두가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혜나가 손을 들며 외쳤다.
"그럼 사회자 결정은 어떻게 할 거야?"
언제나 그랬듯 사회자 결정은 제비뽑기로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미리 나무젓가락도 챙겨온 터였다. 그러나 경찬은 또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사회자가 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첫 게임의 사회자는 나름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해. 이 게임의 막을 올리는 진행자이니까. 그래서 내 생각은 아까 카드 뽑기에서 당첨된 지수가 사회자를 맡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다들 어때? 어떻게 보면 제비뽑기에서 당첨된 거랑 큰 차이 없자나?"
지수는 갑작스런 지목에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무 생각도 없던 차에 처음부터 사회자를 맡으라니 당황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연스레 주요 직책을 넘겼다.
"카드 뽑힌 것도 억울한데 첫판부터 사회까지 보라고요? 막내차례는 조금 더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대신 다른 분을 지목할게요."
지수는 손가락을 들어 경찬을 가리켰다. 경찬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술을 덜 마시게 하려고 배려한 자신의 의도가 빗나간 것이 씁쓸한 듯 보였다. 사회자는 누가 게임에서 이기든 상관없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본인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겠지만."
사회를 맡은 경찬은 앞에 놓인 잔에 맥주를 따르더니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천천히 내뱉었다. 그의 표정에서는 경건함마저 느껴졌다.
"자, 그럼 마피아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주세요."
경찬의 한마디에 다섯 명 모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곧 경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이 가는 곳으로 모든 이가 촉각을 곤두세웠다.
"자, 누구를 마피아로 뽑아볼까. 첫 판이니까 아무래도 연기력이 가장 좋은 사람을 뽑아야겠지? 일단 한명은 뽑았고."
경찬은 몸을 숙여 손가락으로 내 뒷목을 찔렀다. 첫판부터 지목 당하다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는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리고 몇 바퀴 더 돌더니 마피아 지목을 완료했다.
"자, 두 명의 마피아를 지목했습니다. 지금부터 마피아 두 명만 조용히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해주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눈길을 돌려 확인하는데 혜나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녀의 입 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
"자, 확인하셨으면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주세요. 과연 누가 두 명의 마피아일까요. 그들은 이미 서로를 확인했습니다. 속으로 숫자 다섯을 세어주시고 동시에 고개를 들어주세요."
5초의 정적은 5분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눈을 뜨는 순간, 갑자기 들어온 불빛에 모두들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부터 연기는 시작된 셈이다. 냉정한 관찰과 그를 토대로 한 결론이 도출되어야 한다.
"지금부터 5분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한명을 지목해서 처형대에 올려주셔야 합니다."
경찬은 모든 비밀을 아는 입장에서 편하게 관람을 시작했다. 초조한 다섯 명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웃어야 할까, 진지한 표정을 지어야 할까. 어떤 표정을 짓더라도 의심을 피해갈 수는 없다. 가장 먼저 운을 뗀 사람은 유희였다.
"가영 오빠가 말 한마디 없는 게 뭔가 수상한데? 이렇게 진지한 박가영은 처음 보는 거 같아. 뭔가 중요한 직책이라도 맡았나 보지?"
유희는 가영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그러나 가영은 피식 웃을 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날 지목할 줄 알았지. 하지만 난 마피아가 아니야. 시민이라서 이렇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거라고. 봐봐. 굉장히 편안해 보이지 않아?"
가영은 눈을 껌뻑거리며 최대한 순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지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봤을 때 마피아 중 한명은 지수야. 지수를 위하는 경찬이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고나 할까?"
나는 방심한 지수에게 칼날을 겨누었다. 지수는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며 날 보고 인상을 썼다.
"경찬이는 애초부터 널 사회자로 삼으려고 했어. 왜냐면 술을 마시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네가 그 조건을 거부하자 결국엔 마피아로 지목한 거지. 다들 알겠지만 대체로 마피아가 패할 확률은 높지 않아. 세 명의 시민이 서로를 의심하며 죽일 확률이 훨씬 더 높지. 고로 지수가 마피아일 확률이 굉장히 높아."
내 논리를 듣던 혜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너다운 추리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근데 경찬이 형은 왜 지수가 술을 마시는 걸 원하지 않는 거야?"
가영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러나 그 질문은 곧바로 유희에 의해 차단되었다.
"오빠, 그건 이따 진실게임 할 때나 물어봐."
유희의 촌철살인에 모두들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지만 그 와중에도 서로의 가짜 얼굴을 찾기 바빴다. 그때 혜나의 뜻밖의 추리가 시작되었다.
"내 생각에 마피아는 선재 오빠 같아. 경찬 오빠가 첫 게임에 의미를 두는 걸 보면 대충 뽑진 않았을 거야. 객관적으로 연기력이 가장 좋은 선재 오빠를 뽑았겠지. 또 한명의 마피아는 서브 역할 정도만 해주면 되니까."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봐도 당황한 듯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황 그 자체를 연기로 끌고 가야 했다.
"무슨 논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날 죽이면 후회할 걸? 물론 네가 시민이라는 전제하에 말이야. 날 이렇게 죽이려고 하는 거 보면 아무래도 마피아겠지만."
배수진을 쳤다. 아무래도 그녀는 초반에 마피아 한 명을 죽임으로써 자신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둘 생각인 듯 보였다. 그렇다면 나 역시 같은 전략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둘이 서로를 의심하며 죽이려 한다면 시민들에게 충분히 혼선을 줄 수 있다.
"자, 다들 의심하는 상대가 한 명씩은 있는 거 같은데 슬슬 누군가를 처형대에 올릴 시간이야. 방금 막 4분이 지났어.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한 명을 처형대에 올리겠습니다."
경찬은 손목시계를 보며 1차 처형시간의 데드라인을 말해주었다. 1분 안에 누군가는 처형대에 올라가야 한다. 그게 나만 아니면 된다. 슬슬 무임승차 전략을 쓸 때가 왔다.
"난 여전히 가영 오빠가 의심돼. 난 가영 오빠한테 한 표."
유희는 얼굴 옆으로 손바닥을 올리며 가영에게 투표를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혜나와 눈이 마주쳤다. 여기서 한번은 틀어야 한다고 무언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는 그걸 정확히 리시브했다.
"난 솔직히 가영 오빠는 잘 모르겠어. 만약 마피아였으면 더 오버하지 않았을까? 흠, 난 생각이 바뀌었어. 선재 오빠가 처음엔 의심스러웠는데 옆에 앉아있는 지수가 너무 조용해. 분명 얘가 이렇게 조용한 성격은 아닌데."
혜나는 얼굴을 내밀어 옆에 앉은 지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수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인상을 찌푸리며 울상을 지었다.
"아, 언니 저 정말 아니에요. 나 정말 억울해."
그녀의 앙탈이 귀엽다는 듯 혜나는 볼을 꼬집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바로 지금이 내가 나설 타이밍이었다.
"난 초지일관으로 지수가 마피아라고 생각해. 내 촉을 벗어날 수 없지. 미안하다. 지수야."
난 혜나에게 힘을 보태며 시민 한명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가영만 핸들을 틀지 않는다면 계획은 성공이었다. 그러나 가영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형, 지수가 마피아라고 확신해요? 저는 솔직히 형이 의심스러운데."
순간 등줄기가 오싹했지만 표정은 미동조차 없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능숙하게 대처에 나섰다.
"좋아. 내가 의심스러우면 날 처형대에 올려도 좋아. 다만 내가 마피아가 아니라면 지수를 다음 처형대에 올려줘. 그건 가능하겠지?"
내 평온한 표정은 완벽했다. 가영은 길게 한숨을 뿜더니 지수를 바라보았다.
"지수야. 미안하다. 아무래도 나 설득된 거 같다. 미안하지만 잘 가라."
가영까지 지수에게 투표한 결과 처형대에 올라갈 사람이 정해졌다. 지수는 여전히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소용없었다. 경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수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과연 심판대 위 그녀의 운명은? 답을 이미 알고 있는 두 사람은 속으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윤지수 양이 처형대 위에 올라왔습니다. 그녀는 마피아가 아닙니다."
심판이 끝남과 동시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넷 중 둘은 거짓연기를 하고 있었다.
"맙소사. 말도 안 돼. 이렇게 되면 혜나 아니면 선재 형이 마피아라는 소린데?"
가영은 유희의 팔을 흔들며 우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유희는 망부석 여인네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자, 바로 갑시다. 저는 가영오빠를 처형대 위에 올리고 싶습니다."
유희의 일관된 주관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건 혜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영은 눈이 뒤집히기 직전까지 갔지만 정작 당사자는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유희는 투표가 끝났고 나머지 세 분도 투표를 서둘러 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처형대에 올라갈 사람은 정해져 있는 거 같은데요?"
경찬은 시계를 보며 게임을 서둘렀다. 가영은 나와 혜나를 번갈아보며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저 둘이 마피아인 걸 확신하기 때문에 둘 중 아무나 선택할게요. 저는 혜나를 처형대 위에 올리고 싶습니다."
가영은 이미 반쯤 포기한 듯 체념한 말투였다. 혜나는 가영에게 받은 만큼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저도 가영오빠를 처형대 위에 올리겠어요.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혜나는 오싹한 미소를 지으며 가영을 노려보았다. 이제 최종 선택은 내 손에 달렸다. 가영은 문득 좋은 생각이 난 듯 날 회유하기 시작했다.
"선재 형, 형이 마피아가 아니라면 혜나를 처형대에 올려서 그걸 증명해 봐요. 그렇다면 형을 믿고 끝까지 함께 가죠."
가영은 사뭇 진지했으나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었다.
"그렇구나.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럼 저는 박가영 군을 처형대 위에 올리겠습니다."
가영은 비명을 지르며 두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미 늦었다. 경찬은 조용히 가영 뒤로 다가가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마치 고해성사를 주고받는 신부와 신도처럼 경건한 얼굴이었다.
"박가영 군이 처형대 위에 올라왔습니다. 박가영 군은 마피아가 아닙니다."
경찬의 판결과 동시에 유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동시에 나와 혜나는 하이파이브를 하며 승리를 만끽했다. 마피아가 시민을 압도한 기분 좋은 첫판 승이었다.
"내가 얘기했잖아. 난 마피아가 아니라고."
지수와 가영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목청을 높이며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너무 늦었다. 벌주는 이미 시민들 앞에 한잔씩 놓여 있었다. 가영은 크게 한숨을 쉬더니 한입에 벌주를 털어 넣었다.
"오, 멋지다. 남잔데?"
나와 경찬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지만 정작 가영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몸에 좋은 술인지는 몰라도 엄청 독하네요. 와 심장이 아려와."
가영은 헛기침을 하며 물을 들이켰다. 눈치를 보던 유희와 지수 역시 마지못해 벌주를 홀짝거렸다. 마치 사약이라도 받는 듯 두 아녀자는 신음을 토하며 약을 모두 비워냈다. 시민들의 처벌이 끝이 나자 박수세례가 터져 나왔다. 시민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다음 게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