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또 다른 희생자
"범인은 애초에 교살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을 거야. 그러나 신체에 한번 남은 증거는 절대 지워지지 않아. 그래서 잔혹한 짓을 하기로 결심한 거야. 과감하게 식칼로 지수의 손목을 그었지. 옷에 피가 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만 개의치 않았어. 왜냐면 가장 먼저 일어나 발견한 사람의 역할을 맡을 테니까."
난 경찬의 옷을 가리켰다. 피가 과도하게 튀겨 옷 이곳저곳을 수놓고 있었다.
"더구나 손목을 긋기 전에도 용의주도함을 보여줬어.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교묘한 형태로 사선을 그었으니까. 오른손잡이가 범인으로 보이게끔 미리 설계를 해놓은 거야. 주요 타깃은 바로 나였겠지."
경찬은 들고 있던 칼을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웃으며 박수를 쳤다.
"정말이지 추리소설 작가님의 상상력은 대단하구만. 다시 한 번 감탄했어. 그런 식으로 이중 트릭을 만들어 최종적으로 날 범인으로 몰아세우다니. 그런데 내가 아는 범인은 바로 너야. 결정적인 증거도 갖고 있지만 지금 보여줬다간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숨겨놔야겠지."
경찬은 결정적인 증거라는 말에 강한 억양을 넣으며 내 반응을 살폈다. 나 역시 예상치 못한 단어에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 웃어보였다.
"재밌네. 그래서 결정적인 증거는 언제쯤 개봉할 예정이지?"
"그건 당연히 경찰들이 이곳에 도착한 뒤지. 그럼 자연스럽게 네가 범인이란 걸 증명해 보일 테니까 너무 서두르지 마. 대신 그때까지는 둘 다 살아있어야 돼."
그때 뻐꾸기가 집밖으로 나와 무거운 공기의 흐름을 깨뜨렸다. 녀석은 여섯 번이나 울며 아침이 다가왔음을 알렸다. 실제로 바깥의 어둠은 물을 너무 많이 먹은 듯 점점 더 옅어지고 있었다. 비록 빗줄기는 꾸준히 퍼붓고 있었지만 그 틈에서 희망의 싹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말에는 나도 동의 해. 경찰이 오기 전까지 더 이상의 피해자가 나와서는 안 돼. 경고 하나 해두자면 지금부터는 입안으로 어떤 물질도 넣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무려 두 번이나 의식을 잃었다. 잠에 빠졌다는 표현보다는 무언가에 의해 정신을 잃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범인은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사람들의 입으로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첫 번째로 가영은 입을 통해 청산가리를 흡입함으로써 즉사했어. 범인이 가영의 종이컵에 몰래 넣어놨겠지. 그 다음은 모두가 잠에 빠진 틈에 혜나가 살해됐어.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우리가 잠에 빠지게 된 계기인데 처음에는 생리적인 현상으로 치부했지만 그게 아니었던 거지. 우리는 잠에 빠지기 전 모두 커피를 마셨어. 아마 그 안에 수면제가 들어 있던 거 같아. 지금 생각해보면 잠에서 일어난 뒤에도 뭔가 멍한 느낌이 오랫동안 지속됐거든."
"수면제? 커피는 나랑 지수가 탔는데 그럼 우리가 수면제를 넣었다는 얘기야?"
유희는 노골적으로 화를 내며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했다. 지수가 죽은 현 시점에서 수면제를 탄 사람은 유희 한명으로 좁혀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커피를 탄 사람이 수면제를 넣었을 확률이 높긴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커피가 완성된 후에도 얼마든지 남들의 눈을 속여 수면제를 넣을 수 있어. 가령 설탕이나 여분의 커피분말에 수면제를 섞었다면 우리 모두 먹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니까. 범인은 우리의 성향을 꿰뚫고 치밀하게 준비한 거야."
"그럼 지수의 죽음은 어떻게 설명할 거야? 그땐 유희와 지수만 커피를 마시고 너와 나는 마시지 않았잖아."
경찬은 이건 어떻게 설명할거냐고 따지듯 물었다.
"물론 그때 우린 커피를 마시지 않았어. 대신 다른 걸 마셨지. 커피에 탄 수면제 성분보다 훨씬 더 강력한 걸 말이야. 아직도 뭔지 모르겠어?"
난 슬쩍 경찬을 떠보았다. 그 물건을 직접 배달한 건 경찬이었다. 애초에 혜나의 것이 아니었을 확률이 높다. 범인은 교묘하게 혜나의 담배와 바꿔치기한 것이다.
"설마 모르는 척 하는 건 아니지? 네가 직접 나에게 건네준 담배 말이야. 물론 너는 혜나 방에서 주웠다고 했지만 그 말을 너무 쉽게 믿어버렸어. 덕분에 환각까지 보면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으니까."
"환각? 그게 무슨 소리야? 너도 보았겠지만 나도 그 자리에서 같이 담배를 태웠잖아. 그런데 전혀 그런 걸 느끼지 못했어. 물론 잠이 쏟아진 건 사실이지만 그 이상의 이상증세는 나타나지 않았어."
경찬은 전혀 모르겠다는 순진한 얼굴로 나와 유희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나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접근할거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한 내 책임이었다. 내 욕구를 참지 못하고 담배를 찾는 순간, 멈춰있던 범행의 톱니바퀴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어찌됐든 지금부터는 몇 시간만 더 버티면 되니까 다들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자. 돌발행동인 즉 자신이 범인이란 걸 어필하는 일 밖에 안 될 거야."
나는 경찬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경고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자신이 원하던 바라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어디론가 걸어갔다.
"어디 가는 거야?"
본능적으로 그의 행보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런 소심한 내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킥킥 거리더니 마지못해 행선지를 말해주었다.
"화장실 갑니다. 물도 빼고 잠 좀 깰 겸 세수도 하려고요."
그는 빈정거리더니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화장실 문을 닫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유희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지금으로써는 어떻게든 내가 범인이 아니란 걸 증명해 보여야 했다.
"유희야 내 말 잘 들어. 아까 말했듯이 범인은 경찬이야. 경찬이가 나한테 준 담배에 마약 성분이 들어있던 거 같아. 담배를 두 개나 태웠으니 환각작용이 보인 건 당연했던 거고. 그 틈에 수면제에서 자유로웠던 경찬이가 범행을 저지른 거야. 그리고 혜나의 죽음도 마찬가지야. 그 철제사다리를 옮길 수 있는 건 남자밖에 없어. 분명 똑같은 낚시 줄을 이용해서 혜나와 지수를 죽인거야. 이따 경찰이 와서 식칼과 낚시 줄에 묻은 지문을 검사해보면 모든 게 밝혀지겠지만 그 전까지는 나를 믿고 잘 따라줘야 해."
난 낮고 빠르게 요점을 정리해 전달했다. 그러나 유희는 좀처럼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심쩍은 눈빛으로 힐끔거리며 날 쳐다보는 것이었다.
"왜 그래? 뭔가 문제가 있는 거야? 그런 거라면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줘. 상황을 알아야 나도 반박을 하고 널 도와줄 수 있어."
난 진심을 다해 그녀를 졸랐지만 돌아오는 건 묵묵 대답이었다. 나도 모르게 언성이 더 높아지려는 찰나 공기를 가르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세상 모든 고통을 담고 있는 듯 끔찍하고 악랄했다.
"화장실이야. 강경찬!!"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유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선 이미 모든 신뢰가 사라지고 없었다.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뇌는 작동하지 않고 오직 본능이 움직이는 대로 화장실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약속이라도 한 듯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소화기, 소화기가 필요해."
나는 혼잣말을 하며 소화기를 찾아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내 동작 하나하나가 슬로우비디오처럼 느껴졌다. 오직 심장만 빠르게 요동칠 뿐 주변세계는 너무나 태연했다.
"끄아악. 제발 좀 살려줘!!!"
경찬의 비명소리는 문을 뚫고 나와 멈춰버린 세계를 깨부쉈다. 그의 비명은 좀처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난 속으로 몇 번이고 물으며 소화기로 손잡이를 내리쳤다. 그러나 당황한 탓에 손잡이는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빨리 좀 열어봐!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나겠어!!"
보다 못한 유희도 손으로 문을 두드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면서 다시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지체는 곤란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가까스로 영점을 잡은 뒤 있는 힘껏 내리쳤다.
"됐어! 옆으로 비켜서 있어!"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걸 확인한 뒤 발로 문을 찼다. 그리고 또 한 번. 있는 힘을 다해 세 번째로 발길질을 하자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떨어져 나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화장실 안으로 뛰어 들어간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유희는 바닥에 구토 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좀......... 살려줘."
경찬은 죽어가고 있었다. 얼굴을 포함한 상반신이 부식이라도 된 듯 그 형체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옆에는 투명한 수조가 뒹굴어져 있었다. 그 안의 내용물은 굳이 확인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황산. 어째서 황산을 맞은 거야?"
나는 뒤늦게 세면대와 연결된 고무호스를 뽑아 물을 뿌려보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경찬의 얼굴은 검게 타버렸고 눈은 이미 보이지 않는 듯 굳게 닫혀 있었다. 표피와 진피를 거쳐 피하지방까지 타 들어간 최소 3도 화상이었다. 급히 응급실로 옮기면 살 수도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당.........했어."
경찬의 꼭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누명을 쓰고 사약을 마신 죄인처럼 그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더 이상의 비명은 무의미하다는 걸 알아차린 걸까. 경찬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범인이 아니었던 거야? 그럼 도대체 범인이 누구야?"
난 차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죽어가는 친구 앞에서 진범만 쫒는 내 꼴이 한심했고 범인으로 매도한 친구가 이런 식으로 죽는 게 가슴 아팠다. 그러나 경찬은 이미 기도까지 잠식당한 듯 쉽게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범인은............."
경찬은 목소리를 내다말고 몸을 부르르 떨더니 천명음을 내기 시작했다. 쌕쌕거리며 숨 내쉬기를 반복하더니 더 이상 목소리를 내기는 힘들다는 듯 손을 들어올렸다. 나와 유희는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과연 그가 본 범인은 누구인가?
경찬의 손이 서서히 손가락으로 바뀌더니 누군가의 앞에서 멈춰 섰다. 그 손가락은 분명 문 앞에 서 있는 유희를 가리키고 있었다. 천명음을 내며 기침을 하던 경찬은 마지막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는 너무나 슬픈 얼굴로 웃고 있었다. 마지막 유언을 전하려는 듯 입을 벌린 경찬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