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나 역시 비를 맞으며 이대로 죽는 건 어떨까. 혹은 유희를 따라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방법도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낭떠러지를 내려다보았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유희는 물살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진 듯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죽을 생각이야?"
스스로에게 물었으나 쉽게 답하지 못했다. 오히려 내 머리는 죽음을 강하게 부정하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좌우로 흔들었다. 결국 난 죽음을 포기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쯤 다함께 차를 타고 올라온 길이 보이자 또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때만 해도 모두가 즐겁게 웃고 있었는데.
다함께 저녁식사를 하던 자갈밭을 지나 저택 앞에 다다랐다.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음침해 보이는 분위기였다. 중문을 열고 들어가자 군데군데 시체들이 보였다. 거실 카펫 한 편에 가영, 탁자에 엎드린 지수, 화장실에 누운 경찬까지 한명한명 침대보로 덮어주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바닥 이곳저곳에는 빗물이 떨어져 있었다. 이럴 때면 누군가가 화를 내곤 했지만 지금은 조용했다.
"샤워나 해야겠다."
소름끼치는 침묵이 싫었던 걸까. 혼잣말을 하며 여자 화장실로 향한 나는 태연히 샤워를 했다. 따뜻한 온수에 몸을 맡기고 나니 정신이 한결 맑아지는 것 같았다.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세면대에 걸린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행여나 악마의 모습이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내 얼굴 그대로였다.
샤워를 마친 뒤 냉장고에서 소주를 한 병 꺼내와 소파에 앉았다. 같이 건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게 슬펐지만 혼자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사실 더 이상의 맨 정신은 필요하지 않았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모든 상황이 정리되어 있을 것이다. 경찰들이 저택 내를 조사할 것이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리바이를 답하면 될 것이다. 누가 몇 시 경에 어떻게 죽었는지를 논리적으로 답해 줄 자신이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내 추리도 곁들어서 들려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들은 아마추어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겠지만.
소주병을 통째로 입에 물고는 몇 모금을 들이켰다. 비린내가 목구멍을 타고 코로 역류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빨리 취하고픈 마음에 쉬지 않고 알코올을 들이부었다. 내가 술을 먹는지 술이 나를 먹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빠르게 한 병을 비워냈다.
"주(酒)아일체."
빈속에 들이부은 술은 곧바로 역류해 입 밖으로 넘어왔다. 몇 번의 헛구역질 끝에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은 나는 갑자기 나오는 하품을 손으로 막았다. 때마침 뻐꾸기가 집밖으로 나와 일곱 번을 울어대며 아침이 왔음을 알렸다. 평소라면 내가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잠시 뒤에 봅시다."
나는 술 냄새를 풍기며 소파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눈을 감고 어제 집을 나온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떠올려 보았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천천히 살펴보고 싶었으나 알코올은 사색보다는 숙면을 도와주었다. 지난 시간의 스토리는 부드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빛을 먹은 필름처럼 흐릿해졌다.
그렇게 영사기를 돌리던 나의 의식이 어느 장면에서 멈추었다. 그건 집안에 파리넬리의 ‘울게 하소서’가 울려 퍼지던 순간이었다. 모두가 공포에 빠져 귀를 막았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위쪽이다. 재빨리 다락방 문을 열고 들어가 LP판을 돌리고 있는 휴대용 전축을 발견했다. 나는 전축의 전원을 눌러 LP판을 멈추었다. 그러나 아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전원을 눌러보았지만 비웃기라도 하듯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이거 왜 이러지?"
나는 뒤돌아 질문을 했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락방에는 오직 나 한 사람만 우두커니 서 있었다. 기억의 왜곡. 뭔가 잘못되었다. 다락방을 나가려고 했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장난하지 말고 문 좀 열어봐."
나는 있는 힘껏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히려 음악소리는 점점 더 커지더니 내 목소리를 완전히 삼켜버렸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이건 꿈이야!! 깨어나야 돼!!"
문을 두드리는 주먹에서 피가 쏟아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느껴져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손의 기능을 완전히 잃을 정도의 상태에 접어들자 문득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비밀의 문."
이것이 꿈이 아니라면 비밀의 문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사다리를 이용하면 비밀의 문을 통해 밑층으로 내려갈 수 있다. 나는 다락방 바닥을 더듬으며 비밀의 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까와는 다르게 눈에 띄는 나무틀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거울 밑에 있던 비밀의 문은 귀신이 곡할 노릇처럼 사라져버렸다.
"이곳에 나갈 수 있는 문은 없어."
바닥에 바짝 엎드려 탈출구를 찾고 있던 내게 누군가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렸다. 그 어투는 예전부터 상당히 거슬리던 지인의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는 걸 인정해버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음악소리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죽은 자는 입을 열지 못하지."
그의 얼굴을 보기 전 스스로를 다독이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게 얼마만이야. 우리의 학회장님. 김동훈 학생. 잘 지냈어?"
안경을 쓴 채 포마드를 바른 말끔한 인상이다. 예나 지금이나 하얀 피부는 변함이 없다. 흰색 셔츠에 회색 면바지를 입은 모습이 영락없는 학생의 모습이다. 혜나는 동훈의 저런 모습에 매력을 느낀 걸까?
"아직도 졸업을 못한 거야? 때가 어느 땐데 스쿨 룩이야."
귀신에게 도발을 하는 나 자신이 우스웠지만 분명 진심이 섞여 있었다. 혜나로 인한 열등감은 평생이 가도 사라지지 않으리라. 그러나 항상 그렇듯 열등감을 느끼는 주체만 흥분할 뿐 그걸 지켜보는 상대는 여유가 있다. 동훈 역시 그저 웃기만 할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긴 웬일로 온 거야? 아니, 질문을 바로 해야겠구나. 내 꿈에는 어쩐 일로 납신 거야?"
분명 꿈인 걸 알고 있으면서도 초조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압박감을 떨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질문을 퍼붓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항상 그의 앞에서 작아지는 내 모습이 싫었다.
"아직 듣지 못한 대답이 있어서 왔어.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순간 온 몸에 한기가 스며들며 털들이 일제히 곤두섰다. 그는 몇 년 만에 나타나서 내게 예상치 못한 질문을 했다. 일단은 모르는 척 잡아떼는 것이 우선이었다.
"할 말? 무슨 얘기를 하는 지 잘 모르겠는데. 그 시절 할 말은 늘 많았지. 같이 학회를 꾸리는 입장에서 의견차이도 제법 있었으니까."
그의 얼굴을 보며 시치미를 뗐지만 좀처럼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귀신이라서 내 머릿속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굳이 찾아와서 물을 필요가 없을 텐데. 설마 내 입에서 진심을 듣길 원하는 건가? 미안하지만 그 시절 내 진심이 무엇이었는가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현실이고 바로 지금이다.
"지금 네 현실은 엉망이 되었잖아. 친구들이 모두 죽고 너 하나만 살아남았으니."
정말로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걸까? 동훈은 눈빛하나 변하지 않고 내가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어쩌면 제 3자의 입장에서 나보다 내 상태를 더 잘 알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과연 그가 정말 전지적 시점을 갖고 있다면 범인도 누구인지 알고 있지 않을까?
"혹시 너 범인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는 거야?"
꿈속에서 범인을 묻는 꼴이 탐정을 자처하던 내 모습과는 대조적이었으나 본연의 호기심을 해소하지 못하자 결국 비 과학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질문을 던지면 곧바로 답을 주는 네이버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의 두뇌를 추월하는 인공지능처럼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담화를 이끌어 갔다.
"질문을 먼저 한 쪽은 나인 거 같은데? 답을 해주면 나 역시 누가 범인인지 알려줄게."
동훈은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며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그 순간 갑을관계에서의 우위를 점쳐보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답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갑, 그것을 갈구하는 사람이 을이었다. 난 을의 위치에서 몸을 낮춰 패배를 인정했다.
"좋아. 내가 먼저 답 할게. 그날 너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지. 물론 네가 오지 않아 말해 줄 수 없었지만 지금이라도 얘기해줄게."
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 배수진을 친 이상 더 이상의 후퇴는 없었다.
"너도 예상했겠지만 혜나와 관련된 이야기였어. 학회가 마무리 될 무렵이었으니까 우리의 관계도 확실히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 너도 알다시피 너와 혜나는 커플이었고 난 그저 짝사랑이나 하는 해바라기였으니까. 둘 사이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려는 질척거리는 해바라기였지."
그 시절 내가 공들인 노력들이 떠오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사랑은 한쪽의 노력만 갖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둘 사이를 인정하고 그만 두려고 했어. 나 혼자 이러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우스워 보였거든. 이제 나도 졸업반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정신을 차리자고 결심한 거야. 그땐 분명 그렇게 결심했어. 너와 혜나의 결별설이 떠돌기 전까지는."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대강당에서 교양과목을 듣고 있는데 앞자리에 앉은 타 학과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얘기 들었어? 영문과 학회장이랑 그 여우랑 헤어졌다는데? 학회장이 이별통보를 했는데 그 기집애가 울고불고 장난 아니었대. 그래서 일단은 비공식적으로만 헤어진 상태래. 무슨 지들이 연예인도 아니고 웃기지 않냐? 조만간 공식석상에서 기자들 모아다가 결별 발표라도 할 기세야."
"어머, 정말? 예전부터 그 학회장이 아깝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헤어지는구나. 여자가 너무 매달려도 매력 없는데. 스스로 제 무덤을 팠구나."
흔하디흔한 대학가 찌라시는 한귀로 흘려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좀처럼 펜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상한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면서 급기야 강의실을 뛰쳐나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들은 말이 사실이야?"
말없이 눈물만 흘리는 혜나 앞에서 더 이상 어떤 얘기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학과 동 건물 옥상에서 오랫동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던 감정이 마침내 정체성을 찾았다.
"분노."
나는 마치 그날로 돌아간 듯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동훈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동훈은 여전히 평정심을 잃지 않은 채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그날 네게 하려고 했던 말. 그리고 네가 그토록 궁금해 하던 그 말."
마침내 길고 길었던 이야기의 기 승 전을 지나 결에 도달했다. 그 결론을 입 밖으로 꺼내기가 두려웠지만 더 이상 물러설 길이 없었다.
"부탁을 하나 하려고 했어. 혜나와 헤어지지 말라고. 네가 원한다면 무릎이라도 꿇을 참이었지. 혜나가 그토록 처절하게 우는 모습을 본 순간 자존심이고 뭐고 다 집어던졌으니까. 혹시 나였으면 안 될까 하는 기대감에서 시작한 레이스였지만 역시 나로서는 안 되는구나 하고 좌절해버렸거든."
죽지 않는 한 이번 생에서는 만날 수 없는 인연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짝사랑을 하는 조연배우가 나일 줄 몰랐고, ‘안 되나요’ 같은 노래가사를 내 입으로 부르게 될 줄 몰랐다. 이토록 처절하게 아플 거라면 시작하지 않았을 텐데 후회도 해보았지만 아마 다시 돌아간대도 난 같은 선택을 했으리라.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있어. 내가 학회장이라면 학술제가 끝나고 난 뒤에 이별통보를 했을 텐데 굳이 학술제 전에 말한 이유가 뭐지? 배우의 감정기복은 곧바로 무대 위에서 나타날 텐데. 물론 혜나가 아무렇지 않은 척 훌륭한 연기를 펼쳤지만 그 속마음은 어땠을지 생각 한번 안 해봤지?"
혜나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커튼콜까지 웃음을 유지했다. 무대의 막이 내리고 나서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혜나를 부축해주었지만 괜찮다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진짜 이별을 실감한 듯 뒤풀이 때에도 말 한마디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동훈 역시 별 말없이 주변의 얘기만 들어줄 뿐 평소처럼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지 못했다. 다소 어색한 분위기에서 뒤풀이는 끝이 났고 1년간 고생한 임원들은 그렇게 등을 돌려 각자의 길로 걸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넌 거짓말처럼 사라졌지."
동훈이 사라지고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전대미문의 실종 사건이었지만 학교 측에서는 이미지 실추를 피하고자 언론과의 접촉을 꺼려했다. 경찰은 유일한 가족인 홀어머니를 상대로 탐문수사를 펼쳤지만 결국 동훈을 찾아내진 못했다. 경찰의 말을 빌리면 동훈의 어머니는 심한 알코올 중독을 앓고 있어 판단력을 기대하긴 어려운 상태였다. 보다 못한 학과 임원진들이 자체적으로 전단지를 돌리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여봤지만 헛수고였다.
결국 ‘김동훈 실종’은 미제사건으로 처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