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관 뒤편은 우리만의 비밀공간이 되었다. 점심시간에 종종 만났다. 나는 그림을, 자인은 글을 썼다. 반면에 교실에서 우리는 남남이었다. 말을 안 섞고 일부러 같은 자리를 피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자인이 그렇게 하자고 정했다. 물론 다른 사람 앞에서 우리의 관계나 했던 작업을 발설하는 일은 없었다. 남들을 모두 속이는 재미가 있어서 나는 오히려 즐겼다. 우리만의 비밀공간에서 나는 죽음을 그렸다. 내 안에는 해변의 고래 말고도 온갖 죽은 것들로 가득했다. 심장 언저리에 타르타로스가 달려있는 것 같았다. 죽은 것들은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났다. 그럴 때면 나는 그림을 남길 수 있는 물건을 찾았다. 대상은 주로 교과서와 노트였다. 교과서 낙서를 계속 하다 보니, 나는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펼치면 페이지 양옆 가장자리를 두 팔로 가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지 않은 죽은 것들은 자신을 꺼내달라는 신음소리를 내었다. 나는 그림을 하루도 쉬지 못했다. 죽음은 자살이기만 하면 어떤 자살이든 그렸다. 자살의 방법과 사연은 다양했다. 그림 한 점을 그리는데 바쁘지 않으면 2~3일이 걸렸다. 한 번은 2주가 걸렸다. 존스타운에서 음독자살한 신도들을 그리면서 손가락이 부서질 뻔했다. 한 명씩 그리는 작업보다 909명에게 청산가리를 나눠주고 자살시키는 방법이 훨씬 빠르고 간결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이런 노동에서 내가 얻어간 것이라곤 자살에 대한 지식 밖에 없었다. 내가 직접 알아낸 것은 아니고, 자인이 설명해주어서 배웠다. 하지만 모두 유물론과 이원론에 따라 자살을 바라보는 입장이 다르다든지, 자살에는 이기적인 자살이 있고, 이타적인 자살이 있고, 아노미성 자살이 있다는 등 실생활에 쓸데없는 지식이었다. 작업을 하면서 자살에 점점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형체가 처음에는 손톱 끝과 머리카락 끝만 있었다. 그 다음은 팔뚝과 허벅지, 지금은 목 언저리까지 발전했다. 하지만 나는 근본적인 의문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해변의 고래는 내 앞에서 메탄가스만 연신 뿜어댔다.
자인은 시, 에세이, 산문을 썼다. 주제는 인간, 사회, 자연, 운명, 시간 같은 따분한 개념들을 다뤘다. 내가 자살만 다루는 것에 비해 범위가 더 넓었다. 자인은 원래 글을 교실에서도 썼는데, 담임한테 한 번 걸려서 혼난 후로 과학실 뒤편에서 몰래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글이 완성되면 유일한 독자인 내가 읽었다. 자인은 나의 감상이나 반응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다. 단지 읽어주기를 바랐다. 왜 자인은 글을 쓰는 걸까. 나였다면 공모전에 출품하거나 문집에 기재했을 텐데. 나는 자인의 속마음을 잘 모른다.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자신의 활동에 어떤 의의가 있는지 알 수 없다. 반대로 자인의 입장에서 나에 대해 알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자인의 속마음을 알아내는 능력을 터득했다면, 자인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자인을 다시 보게 되겠지. 신비로운 빛을 내는 별이 가까이에서 보면 흉물스런 암석덩어리에 불과하듯이.
자인의 글은 항상 좋았다. 나를 위해서 쓰지 않았겠지만 내 취향에 맞았다. 단어에 깃든 감성은 나뿐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도 끌어들일 만한 인력을 가졌다. 나만이 자인의 글을 독점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글을 몰래 다른 사람들에게 발표하고 싶은 충동이 한두 번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자인과 헤어질 마음이 없어서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한다.
자인의 모습은 항상 똑같았다. 벤치에 앉으면 무릎 위에 다리를 올리고, 허리를 숙인 자세를 취한다. 군살이 없는 다리 위에 놓은 노트는 꼭 도라에몽 노트다. 자인은 글을 쓸 때 왼손으로 노트의 스프링을 잡는다. 그러다보니 손바닥은 그릴에 그슬린 자국이 남아있다. 오른손은 샤프와 지우개를 바꿔드느라 신체에서 가장 바삐 움직인다. 오른손 중지 손가락 표면에는 피부병처럼 굳은살이 세 군데 돋아있다. 자인의 피부가 흰빛을 띄어서 진한 굳은살 색깔이 두드러진다. 무더운 날에 자인은 앞머리가 처마 위에 매단 시래기처럼 이마에 들러붙는다. 등에 교복이 달라붙어서 허리의 윤곽이 드러났는데도 개의치 않는다. 시선은 노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자인에 대해서 아는 정보는 별로 없었다. 자인은 글쓰기와 비밀을 좋아하고 팝송과 단 음식을 싫어한다. 나는 그 이상 알아내는 것은 포기했다. 목표하는 대학이 어딘지 형제자매가 있는지,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는지, 다른 취미는 있는지를 알아내서 자인이라는 인물에 살을 붙이는 행동이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모습 그대로의 자인이 좋았던 것이다. 우리는 놀라우리만큼 쉽게 친해졌다. 친한 친구끼리 하는 행동을 함께하는 사이였다. 아이스크림을 나눠먹거나 모포 하나를 함께 썼다. 비가 내리면 같이 비를 맞았다. 종이 울리면 같이 본관으로 뛰었다. 벌이 나타나면 같이 소리 질렀다.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 드로잉 노트와 도라에몽 노트로 쌓여갔다.
6월 15일 어제 새벽에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침 뉴스에서 나왔다. 과학고의 학생 김모군이 자기 집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했다. 반에서 제일의 소식통인 다경의 말을 따르면 투신자는 정신병을 앓은 경력이 없었다. 과학고에서 성적이 중상위권에 속했다. 부족함이 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 자살했다. 주변사람 중에 누구도 자살할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과학고 김모군까지 포함해서 연쇄적으로 세 명의 십대 자살자가 발생했다. 모두 자살한 시기, 장소, 방법, 동기가 달랐다. TV에 나온 전문가들은 패턴 찾기에 바빴고, 동네 사람들과 학교 학생들은 상상력을 발휘하는데 바빴다. 나는 그들의 노력과 상상력이 부질없게 보였다. 어떤 사람은 학교 측에 잘못을 돌렸다. 성적 때문에 학생들이 자살했다고. 입시위주의 경쟁사회가 그들을 자살로 내몰았다고. 자인은 단지 스트레스와 의지력만으로 설명되는 일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겉으로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돼. 과학과 논리는 인간을 잘못된 주장을 맹신하게 만들 위험이 있어. 자인은 이런 말만 하고, 어떤 해법도 제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하던 대로 계속하면 된다고만 말했다. 그때만 해도 자인에 대한 내 믿음은 변함이 없었다. 자인에게 깊이 빠진 나였으니까. 자인의 말은 옳아. 다른 사람들이 틀렸어. 자인이 쓴 에세이를 읽으며 믿음을 견고하게 다졌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기상청에서 예보한 날씨는 매우 흐림이었다. 하늘에 먹구름이 짙게 꼈다. 밀도가 다른 구름들을 찢어서 콜라주 기법으로 바탕에 붙인 것 같았다. 해를 분실한 낮에 차가운 대기가 흘렀다. 축축한 냄새와 더불어, 밤에게 빌린 어둠이 교실 창밖너머를 우울한 풍경으로 만들었다. 그날 4교시에 우리 반은 수학시간이었다. 키가 작고 머리가 벗겨진 수학선생은 칠판에 공식을 적고 있었다. 교실 안은 두더지 게임기였다. 30명 중에 10명만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15명은 혼절에 가까운 상태였고, 나머지 5명은 제출하지 않은 휴대폰을 가지고 랭킹을 올리는데 열중했다. 수학선생이 예고한 진도를 딱 맞췄을 때, 벨소리가 울렸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몇몇 남학생들은 이미 교실에서 자취를 감췄다. 칠판을 지우는 수학선생과 급식실로 가는 반 애들을 뒤로하고, 나는 교실 뒤편으로 달려갔다. 뒤편에는 쉰내 나는 사물함들이 놓여있다. 철제 사물함들은 산화구리 색깔에 앞에 달린 문이 움푹 들어가 있다. 남자애들이 의자나 자기 몸통으로 박은 흔적이다. 나는 내 자리 사물함을 열어서 수학교과서를 넣고, 드로잉노트를 꺼냈다. 늦게 간 사람이 매점에서 음료수를 사주기로 해서 나는 황급히 사물함을 잠갔다. 막 교실을 나가려고 내가 복도와 교실의 경계에 발을 놓았을 때였다.
열린 교실 창문으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무게가 많은 물체가 바닥과 부딪힌 소리 같았다. 교실 안에 남아있던 애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창문가로 모였다. 애들의 입에서 비명과 욕설이 섞여서 나왔다. 나도 그들을 따라 드로잉노트를 바닥에 던져두고, 창문가로 갔다. 시선이 창문 아래로 내려가다가 한 지점에 머물렀다. 해변의 고래, 목매단 여자, 독을 먹은 노인, 그리고 투신한 학생. 비상구 탈출 마크 같은 자세로 보도블록 위에 누운 시체. 그림으로 수많은 자살한 시체를 접했지만 실제는 처음이었다. 몸이 쪼그라들 것 같았다. 자인이 그랬었다. 인간에게는 생존 본능이 있다. 육체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정신의 자살 실행 지령을 막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두려움이다. 나는 고래의 눈동자가 생각났다. 인간을 집어삼킬 만큼 거대해진 검은 눈동자가.
이틀 뒤 점심시간, 과학관 뒤편 벤치에 이미 자인이 앉아있었다. 무릎위에 노트와 펜이 준비된 모습이었다. 자인은 다가오는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은주야, 오늘은 네가 그림을 보여줄 차례야. 완성은 다 했겠지?”
나는 대답 없이 옆에 앉았다. 마음이 무거워서 쉬이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자인은 의중을 알아채고는 걱정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빛이 보통 때랑 다른데 무슨 일 있었어?”
“나 그만 하고 싶어. 더 이상 그리고 싶지 않아.”
자인의 표정이 충격으로 얼룩졌다. 내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무슨 소리야. 그만 둔다니.”
자인이 힘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일이 쓸모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수백 장을 그려도 결코 자살을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그것도 모르고 그동안 헛수고를 했어.”
“우리학교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그래? 내가 항상 말하잖아. 너의 탐구는 전혀 무의미하지…….”
“4명이나 죽었는데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했어. 이제 그만 둘래. 나는 공부에 집중할 거니까 너는 평상시 글 쓰던 대로 계속 해.”
“너는 핑계만 대고 있어. 사실은 자살이 두려워서 도망치는 거지.”
“네 맘대로 생각해. 나보다 똑똑하니까 잘 알겠지.”
“포기하지 마. 나랑 함께 저항하는 인간으로 남아줘.”
자인이 다가와서 내 손을 잡았다. 글을 쓰는 손과 그림을 그리는 손. 미약한 전기가 자인의 손가락을 타고 내 손가락으로 전해졌다. 나는 손을 뺐다. 너무 미안하지만 결심을 미루고 싶지 않았다.
“배신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 너에게 악감정이 없어. 앞으로도 네가 글을 잘 쓰기를 응원할게.”
“은주야.”
“생각해보니 자살을 이해하는 방법은 없진 않았어. 유일하게 자살을 이해하는 방법은 직접 자살하는 것뿐이야.”
나는 자인을 내버려두고 본관을 향해 걸었다. 자인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무시했다. 학교종이 치기 전에 교실로 돌아간 적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 후로 고래나 다른 죽은 것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예전의 나로 완벽하게 돌아왔다. 교실에서 몇 번 자인과 마주쳤다. 점심시간마다 만나서 창작하는 규칙은 사라졌지만 교실에서 남남처럼 행동하는 규칙은 유지되었다. 자인을 보면 진심을 담아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미안해”는 모든 말 중에 가장 쉬우면서 가장 어려운 말이었다. 자인과 가까이 있었을 때 시도해보았는데 실패했다. 나는 3학년 스터디그룹 모임에 참가하면서 자인을 생각하지 못할 만큼 바빠졌다. 내 안에 넓은 영역을 차지한 자인이 사과만 해졌다가, 밤톨만 해지고, 겨자씨만 해졌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우리의 관계는 쉽게 쌓였던 것처럼 쉽게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