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식이 주의를 준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둠 속에서 탐색자 무리가 몰려나왔다. 서른 남짓한 탐색자들은 동작감지기에 걸린 신호를 보고 요격이라도 나온 것인지 완전 무장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막상 괴물의 습격이 아니라 같은 탐색자의 방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소 맥 빠진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무기를 내리지 않았다.
“제길.”
이준영이 낮게 이를 갈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바로 곁에 있던 김진우는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 그녀의 시선이 건너편의 일행 중 한 사내에게 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190센티는 넘을 법한 거구에 무식할 정도로 날이 두꺼운 칼을 쥔 던전 베이비였다. 사내는 능글맞은 얼굴로 히죽 웃어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아니, 이게 누구야?”
“송종철 이 새끼…….”
송종철이라 불린 사내를 바라보는 시선에 적개심이 가득한 것은 정찬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다른 던전 베이비들 역시 사나운 눈초리로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렇게 험하게 말하면 쓰나. 난 반가운데 말이지.”
말에는 가시가 돋아 있고 눈에는 노골적인 적의가 서려 있다.
“저번에 거미 잡으러 갔다가 떼로 몰살당했다고 하더니 벌써 복귀한 거야? 휘유, 부지런도 하셔라. 나 같으면 무서워서 들어오지도 못할 거 같은데.”
사내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던 김진우는 까드득 하고 이 가는 소리에 아연실색한 얼굴이 되었다.
일반 탐색자들은 몰라도 같은 던전 베이비들끼리 저렇게 날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지상과 지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만의 유대감은 상당한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유대감은커녕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갈길 가라.”
“그렇지 않아도 마침 가려던 참이었지. 우리가 따뜻하게 바닥 데워놓고 주변 정리해 놨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쉬어. 가뜩이나 사람도 부족해졌는데 또 떼몰살을 당하면 안 되잖아?”
기묘한 신경전이 마침내 끝이 났는지 송종철이란 사내가 슬그머니 물러서다 눈을 빛냈다.
“어이, 거기, 못 보던 친군데?”
정확하게 자신을 지목한 송종철의 말에 김진우는 대답 대신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 볼 때부터 다른 이들의 죽음을 조롱하는 태도가 영 못마땅하던 차다.
그런 와중에 건들거리며 던져오는 말에 조롱기까지 담겨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레벨이 어떻게 되는지는 몰라도 나라면 절대 그 팀에 오래 안 있어. 협회에 이름도 올리지 못한 팀이거든. 괜히 거기 있다가 같이 엮이지 말고 알아서 잘 처신해.”
송종철의 말이 도를 넘어 협박처럼 들려 참지 못한 김진우가 앞으로 나서려는데 이준영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만히 고개를 젓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더욱 혼란이 커졌다.
그가 본 이준영은 절대로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었다. 위험천만한 땅 밑에서도 다른 이들을 이끌 정도의 담력과 능력이 있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자신들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사내를 가만히 두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건 몸조심하라고. 정 후달리면 우리 꽁무니라도 따라오든지. 혹시 알아, 다운 잼 하나라도 얻어갈지?”
끝까지 조롱을 멈추지 않은 송종철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던 일행은 뒤늦게 이동을 시작했다.
“뭡니까, 저 사람은?”
김진우가 못마땅한 얼굴로 물으니 이준영이 설명해 주었다.
“탐색자협회라고 있어요. 요즘 나라에서 좀 힘을 실어주는 모양인데, 제 멋대로 미궁의 출입을 통제하고 횡포를 부리는 양아치 새끼들이죠.”
“그걸 두고 봅니까?”
수많은 던전 베이비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렇게 불량스러운 무리를 그대로 둔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질문에 그녀가 씁쓸한 얼굴을 해 보였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미 상당수의 사람들이 저 협회란 곳에 가입했어요. 지금에 와서는 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팀보다 가입한 팀이 더 많을 지경이죠.”
“대체 뭐 하는 곳이기에…….”
저리도 무례하고 안하무인일까.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같은 던전 베이비들의 죽음을 저리 조롱해서는 안 된다. 노기가 가득한 그의 음성에 정찬식이 끼어들어 그를 진정시켰다.
“지저에서 움직이는 돈이 워낙 크다 보니 저런 무리가 생기는 거죠. 지들 딴에는 대의명분이 있는 모양인데 결국 따지고 보면 밥그릇 싸움입니다.”
뒤늦게 이해가 갔다. 던전 베이비들이 지상에 올라온 지도 벌써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슬슬 다른 생각을 하는 던전 베이비들이 나올 만도 했다. 송종철이 딱 그런 부류이리라.
“신경 쓰지 마요, 진우 씨. 어차피 다시 얼굴 볼 일도 없는 놈들이니까.”
이준영의 말과는 달리 김진우 일행은 6층에 들어선 지 3일이 채 지나지 않아 송종철의 무리와 다시 만나야 했다.
“뭐 좀 건진 거 있나?”
어쩐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질문, 정찬식은 대답 대신 사납게 쏘아붙였다.
“뭐 하는 짓이지?”
“워, 워, 진정해. 그냥 단순히 경로가 겹쳤을 뿐이라고. 뭘 그렇게 같은 던전 베이비들끼리 험악하게 굴어?”
“헛소리하지 마. 니들이 어제부터 우리 따라다닌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정찬식이 이를 갈며 말하자 송종철이 느물느물하게 웃어 보였다.
“너무 그러지 말자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서로 정보도 공유하고 좋은 게 있으면 나누기도 하고.”
설마설마했는데 너무나도 노골적이다. 이래서야 시장통의 깡패가 차라리 질이 좋아 보일 지경이다.
“괜히 뻗대다가 골로 가는 수가 있어. 알잖아? 누가 이 땅 밑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 쓴다고 그래?”
“개 같은 새끼.”
정찬식이 욕설을 내뱉으며 보이지 않게 신호를 주었다. 눈치 좋게 알아들은 김진우 일행이 순식간에 전투 대형을 갖췄다.
“워, 워! 말로 하자니까. 그러다 다치면 그쪽만 손해라고.”
“개 같은 새끼, 수작만 부려봐.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너 하나는 내가 죽이고 간다.”
아무래도 수에서 배 이상의 차이가 나다 보니 정찬식은 다소 수비적인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눈빛에 가득한 살기와 독기만큼은 진짜인지라 송종철도 표정을 굳혔다.
“찬식이, 진짜 이럴 거야? 언제까지 협회하고 대립할래? 우리가 단합해야 다른 사람들도 함부로 굴지 않는다고.”
“그러는 새끼가 미궁 몇 개 잡고 통제하며 세금을 걷어? 미친 새끼. 같은 던전 베이비들이 목숨 걸어 번 돈 뜯어먹으니까 좋냐?”
정곡을 찔린 것일까. 송종철이 가면을 벗고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같은 미궁 출신이라고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그래도 내 위치가 있는데 그따위로 말하면 내가 쪽팔리잖아?”
그의 말에 일행을 둘러싼 던전 베이비들과 탐색자들이 무기를 드러내며 압박을 가해왔다.
“관리소에서 가만있을 것 같아?”
“힘도 없는 미궁관리사무소를 믿는 거야? 거긴 진즉 나가리 났다고.”
송종철이 기세를 드러내니 다른 던전 베이비들 역시 사납게 기세를 북돋았다. 김진우를 비롯한 일행도 그에 맞서 날카로운 기세를 보였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김진우는 빠르게 상대방의 전력을 탐색했다. 던전 베이비 아홉에 일반 탐색자 스물. 이쪽에 비하면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전력이다.
아마도 전투가 벌어진다면 자신을 제외한 이들은 전부 몰살당하고 말 것이다.
김진우의 시선이 이준영과 다른 던전 베이비들을 훑어가다 정찬식에서 멈춰 섰다. 불리함을 알면서도 그들은 투지를 드러냈다.
하지만 일반 탐색자들은 달랐다. 명령대로 전투 준비를 하기는 했지만 눈동자를 굴려대는 것이 막상 전투가 시작되면 언제 돌아서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고민이 되었다. 그에게는 이 상황을 타개할 힘이 있다.
포탈을 열 것도 없었다. 당장 레벨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은 상당한 부담을 갖게 될 것이다.
심층에서 태어난 던전 베이비들은 저층에서 태어난 일반 던전 베이비들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
“핫! 뭘 그렇게 살벌한 얼굴을 하고 그래? 장난이야, 장난.”
김진우가 송종철과의 거리를 재며 슬며시 발을 움직이는데 갑자기 상황이 변했다. 송종철이 다시 느물느물한 웃을 지어 보이며 자신의 무리를 뒤로 뺀 것이다.
“설마 내가 같은 탐색자끼리 칼부림이라도 할 줄 알았어? 그냥 장난친 거야. 그깟 다운 잼, 얼마나 한다고.”
뻔뻔스럽게 지껄여 대는 송종철의 얼굴이 지독스럽게 얄미워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알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저승의 문턱을 밟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마도 평생 모를 것이다. 그만큼 김진우가 드러낸 살기는 은밀했다.
다만 바로 곁에 있던 이준영만큼은 그 은밀하고도 농밀한 살기를 느끼고 말았다.
상황도 잊고 닭살이 오돌토돌하게 돋은 피부를 쓸어내는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김진우에게 느낀 살기는 어지간한 크리쳐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녀가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뭐, 열심히 하라고. 우리는 이만 가볼 테니까.”
“빨리 꺼져.”
“성질머리 하고는. 넌 언제 한번 그놈의 성질머리 때문에 큰코다칠 거야. 이건 같은 미궁 출신이라 해주는 애정 어린 조언이라고.”
혀를 찬 송종철이 무리를 이끌고 사라졌다.
“돌아가자. 아직 더 돌 수는 있지만 전투 중에 뒤통수 맞는 건 질색이야.”
송종철 무리가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나 정찬식이 겨우 입을 열었다.
“반대하는 사람? 없어? 그럼 가자.”
그나마 6층에서 올린 성과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라 일행 중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설령 있다고 해도 정찬식은 결국 그들을 설득하여 지저를 빠져나갔을 것이다.
몇 번의 전투를 더 겪고 일주일이란 시간이 걸려서야 일행은 땅 밑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나름대로 강행군이라면 강행군이었다.
송종철의 무리가 또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몰라 걸음을 서두른 것이다.
“일단 수익금은 배당대로 나누고 진우 씨는 말한 대로 다운 잼으로 해주면 되죠? 계산 끝나는 대로 보낼 테니까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죠. 난 미궁관리사무소에 들러서 소장 좀 만나고 가야겠어.”
“말해봐야 소용없을 텐데. 소장이라고 해봐야 뭐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말은 해봐야지. 탐색자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협회에서 감투씩이나 쓴 새끼가 저렇게 양아치 짓을 하고 다니는 걸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어.”
“가봐. 소장 아저씨, 가뜩이나 없는 머리 더 빠지겠네.”
대충 인사를 나눈 일행은 다소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헤어졌다.
***
김진우는 오랜만에 백 선생을 찾았다.
“미궁 다닌다고 하더니 얼굴이 그새 하얗게 떴구먼.”
거의 한 달 만에 만난 백 선생은 여전했다.
“물어볼 게 있습니다.”
인사도 생략한 김진우는 거두절미하고 용건부터 꺼냈다. 백 선생은 혀를 차면서도 그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해주었다.
“안 그래도 요즘 그것 때문에 한참 시끄럽더만. 송종철이가 어지간히 쑤시고 다니는 모양이야. 그래도 협회 자체는 나라에도 탐색자들에게도 이익이 되니 다들 두고 보고 있지만.”
지저에서 보았을 때와는 다르게 송종철의 평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중구난방이던 탐색자들의 시스템을 다소 체계적으로 바꿔 일반 탐색자들의 희생을 대폭 줄이는 데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보다 요즘엔 뭐 팔 거 없나?”
“이번에는 저도 배당만 받기로 해서 딱히 가져온 게 없네요.”
이야기를 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 선생은 저 궁금한 것만 채워 간다며 투덜거렸지만 다시 오라는 말은 잊지 않았다.
감정소를 나온 김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지저를 떠나 있는 동안 바뀐 것은 미궁의 상황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복잡하게 얽힌 정치적 상황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형제처럼 지내던 던전 베이비들도 결국 돈 앞에서 이리 아귀다툼을 하게 되었으니 마음이 씁쓸했다.
“망할. 우라지게도 맑네.”
한동안 보지 못하던 푸른 하늘을 바라보던 그는 괜스레 바닥을 걷어찼다.
***
‘주인님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찾은 나가의 미궁은 여전했다. 변함없는 얼굴로 자신을 반겨주는 도미니크에게 다소 맥 빠진 미소를 보여주니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일이 잘 안 풀리신 겁니까?’
“그건 아니고… 그냥 일이 좀 있었어. 미궁에는 별일 없었고?”
설명하기에는 말이 길어질 것 같아 적당히 얼버무리니 도미니크가 마침 생각났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 전에 명령하신 사육장과 주점의 건설이 완료됐습니다.’
그간 정신이 없어 잊고 있던 김진우는 뒤늦게 시설물에 대한 것을 떠올리고는 손뼉을 쳤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네. 그리고 손님이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도미니크의 말에 김진우는 가장 먼저 암상인을 떠올렸다. 그리고 뒤이어 암상인에게 입수한 기생수가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기생수의 능력에 대해 물을 것이 있는 그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게 먼저였다.
“암상인이 또 왔어? 원래 그렇게 자주 오는 편인가?”
덕분에 유익한 물건을 몇 개 구매하기는 했지만 암상인이란 존재는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으니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온 손님은 암상인이 아니에요.’
“그럼?”
암상인 말고도 이 위험천만한 지저를 헤매고 다니는 이가 있다는 말에 김진우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