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지금 뭐하는 짓이야.”
명수는 황급히 일어서서 효린에게 해명을 했다. 윤아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명수의 해명을 도왔다. 효린은 그 말들을 모두 무시한 채 윤아가 만든 케이크를 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케이크였다. 효린이 명수를 보고 얘기했다.
“나 오늘은 학원에서 연습 안 할래.”
이어서 윤아를 향해 말했다. 효린의 말투는 딱딱했다.
“임윤아, 다시 봤어. 곰의 탈을 쓴 여우.”
효린은 그 자리에서 박차고 학원 밖으로 나갔다. 윤아는 멍하니 발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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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아, 다시 봤어. 곰의 탈을 쓴 여우.’
윤아는 잔뜩 풀이 죽은 상태로 효린이 오전에 했던 말을 계속 되풀이 하며, 키위를 잘게 잘랐다. 그 때, 대현이 윤아의 칼을 든 손목을 붙잡았다. 윤아는 몸을 움찔하며 대현을 쳐다봤다.
“파티쉐의 건강 말고 또 하나 중요한 것. 정신 집중. 이 멍청아!”
“저기 있잖아.”
“왜?”
“내가……, 여우처럼 보여?”
“뭐래. 젤리나 만들어.”
“응……?”
“누가 널 여우로 보냐. 미련하고 둔하고 멍청해빠진 게 곰이라고 비유해도 곰이 아까울 정도로 바보지.”
“으응, 고마워.”
대현은 매번 바락바락 대들던 평소와 달리, 험담에 고맙다고 말하는 윤아를 보고 당황했다. 윤아는 그저 맥없이 실리콘 주걱으로 반죽을 휘저었다. 대현은 수상하다는 듯 윤아를 노려봤지만, 윤아는 개의치 않고 반죽을 휘저었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야!”
“깜짝이야…….”
“너 내일이면 활동 중지 풀려서 다시 이 조리실에서 일하게 될 텐데 똑바로 안 해? 월말평가는 고작 며칠도 안 남았어. 젤리는 이렇게 만들어서 어느 세월에 다 만들래?”
“으응, 할게. 열심히 할게.”
윤아는 연속으로 눈을 깜빡거리며 정신을 차리고는, 젤리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다. 윤아는 지금만이라도 효린이 했던 말을 잊기로 다짐했다. 다 된 젤리를 냉동고에 놔두고 여태껏 만든 젤리를 노트 위에 올려놓았다. 딸기 젤리, 망고 젤리, 딸기와 망고를 섞은 젤리. 차례대로 시식을 했다. 그 때, 규동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윤아는 집었던 숟가락을 떨어뜨리고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윤아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규동은 윤아를 쳐다보다 다시 입구에 선 남자를 보았다. 대현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대현은 하던 일을 멈추고 윤아와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아, 아빠?”
윤아의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말이었다. 규동은 남자와 윤아를 번갈아 보다가 소리쳤다.
“뭐?”
전혀 믿기지 않다는 말이었다. 윤아는 몸을 떨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윤아의 아빠인 대근은 한심하다는 듯 윤아 앞에 놓인 젤리를 보았다.
“여기가 네 놀러오는 곳이더냐. 한심하게 여기서 젤리를 만들어?”
“아빠……, 저 그런 게 아니라…….”
“당장 너 데리고 형님한테 가야겠다.”
대근은 윤아를 끌고 조리실에서 나갔다. 윤아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저항을 하려 했지만, 대근의 힘을 이길 순 없었다. 윤아는 절규를 하며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대현은 저도 모르게 윤아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 뒤를 뒤따랐다.
‘머지않아 윤아의 아빠가 윤아를 집으로 데리러 이곳에 오게 될 거야.’
대근은 윤아를 자신의 차에 억지로 태워 문을 닫은 다음 외삼촌의 집으로 출발했다. 대현은 차를 악착같이 따라 뛰다가 포기하고 걷다가 멈췄다. 뒤늦게 따라온 규동이 무슨 상황이냐며 대현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임윤아, 저러다가 큰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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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촌은 갑작스레 집에 들어온 대근과 맥이 빠져 초췌해진 윤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어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규동과 대현도 집에 도착했다. 가정부는 가라고 손짓하는 외삼촌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짐을 챙겨 집을 나갔다. 대근은 화가 턱 밑까지 치밀어 올랐다.
“매, 매제 여긴 어쩐 일이야?”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나랑 잠깐 얘기 하자.”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얘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임윤아의 방은 어디죠?”
“아빠, 난 가기 싫어요.”
“넌 조용해. 집에 돌아가자마자 넌 외출 금지인 줄 알아.”
“아빠, 제발요. 저 얼마 안 있으면 월말평가를 쳐야 해요.”
“뭐? 네가 월말평가? 그게 말이 돼? 네가 그 쟁쟁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시간 낭비야. 돈 낭비야. 힘 낭비야. 정신 차려 네 주제를 알아. 임윤아.”
윤아는 대근의 앞에서 점점 작아져만 갔다. 규동은 순간 욱한 마음에 입을 열다가 대현에게 제지당했다.
“자꾸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말아요. 네?”
“지금 한참 유영이가 잘 되어가고 있는 집안 분위기에 네가 찬물을 끼얹어?”
“오빠 얘기는 하지 말아요. 그리고 나 여기에 있고 싶어요.”
“너 언제까지 아빠 말 안 들을래? 제발 우리 가족한테 도움이 되는 일을 해. 도움이…….”
“그만!”
외삼촌이 소리치자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윤아는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급박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매제, 너야말로 내 말은 들리지 않나 보지? 나랑 얘기해.”
쩔쩔 매던 외삼촌의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졌다. 외삼촌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위협하듯 말했다. 대근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외삼촌이 안내하는 대로 서재에 들어갔다. 대현과 규동은 윤아의 눈치를 보며 어찌할 줄 몰랐고, 윤아는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대현과 규동은 테라스로 향했다.
윤아는 한 발자국씩 뗄 때마다 문득 옛일을 떠올렸다.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했던 아빠, 자신의 오빠인 유영에게만 학원을 다니게 해준 아빠, 유영이 서양 요리 대회에서 우승을 했을 때 기뻐했던 엄마와 아빠, 가족 몰래 겨우 제과 제빵 전국구 대회에서 우승해 상을 받기 위해 혼자 서울로 올라갔던 윤아, 상을 받은 아이들과 그 가족끼리 찍던 단체 사진, 혼자 무표정으로 트로피를 든 상태로 수많은 가족에게 둘러싸인 윤아, 불에 타서 사라져버린 빵집과 능력 그리고 기억, 잃어버린 6년의 시간과 친구들, 발을 디뎌보니 모든 게 달라져 있던 정황, 윤아가 모르는 새에 바뀌었던 집 주소…….
윤아는 거실 밖 마당에 앉아 몸을 한껏 웅크렸다. 숨이 점차 거칠어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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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동과 대현은 윤아에 대해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스케치할 뿐이었다. 대현은 머리를 북북 긁으며, 종이가 찢어질 듯이 볼펜에 힘을 주어 한 곳을 연속으로 그었다. 그러다 기지개를 켜듯 두 손을 위로 쭉 펴는가 싶더니, 자리에 일어났다. 한 손은 난간에 걸치고 다른 한 손은 또 다시 머리를 긁었다. 난간에 몸을 최대한 기대어 주위를 둘러봤다. 윤아가 2층으로 올라오면 분명 방문 소리가 들려야 할 텐데 들리지 않았다. 대현은 윤아가 밖에 있을 거란 생각을 하고 주의 깊게 둘러봤다. 역시나, 윤아는 마당에서 쭈그려 앉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규동,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대현은 거실의 통 유리문을 열고 마루에 발을 들어섰다. 윤아는 여전히 테라스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윤아의 거친 숨이 대현의 귀에 들렸다. 윤아는 스스로 목을 조르듯 부여잡았다. 대현은 윤아에게 한 발짝 다가간 다음 윤아를 마주본 채 쭈구려 앉았다. 스스로의 목을 졸랐던 윤아의 손을 잡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윤아는 대현의 힘에 이끌려 일어서서 대현의 품에 안겼다. 대현은 윤아가 스스로 목을 조르지 않게 윤아의 양팔을 내리게 한 뒤, 그 상태로 꽉 안았다. 윤아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대현을 올려다보자, 대현은 한 손으로 윤아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짚었다.
“난 숫자 같은 거 안 불러줘.”
대현은 천천히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쉬다 내쉬는 것을 반복했다. 윤아는 처음에 대현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잠자코 크게 호흡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윤아는 내렸던 손을 대현의 허리에 두르고 눈을 감았다. 한동안 하나, 둘, 셋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며 한동안 대현의 호흡 박자와 맞춰 숨을 쉬었다.
“나 이제 진정이 된 것 같아.”
대현이 윤아에게서 떨어지려 할 참이었다. 윤아는 대현과 떨어지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대현을 끌어안았다. 대현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고맙다고 속삭였다.
“나 만약 다음에 또 이러면 방금처럼 해주면 안 돼?”
“되도 않는 소리하지 마.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저리 떨어져.”
대현은 언제 자신이 먼저 윤아를 안아줬냐는 듯이 윤아에게서 떨어졌다. 윤아는 그저 배시시 웃기만 했다.
“너 앞으로 어쩔 거야?”
“방법이 하나 있긴 있어.”
“그게 뭔데?”
윤아는 고개를 좌우로 젓기만 할 뿐, 대현에게 그 방법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급히 집으로 들어갔다. 대현은 영문도 모른 채 윤아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대근이 현관문에서 신발을 신고 있었다. 윤아는 다급하게 대근을 잡았다.
“나 아직 데려가지 마요. 아빠, 그 전에 할 말이 있어요.”
“윤아야 얘긴 끝났어.”
외삼촌이 말했다.
“네?”
외삼촌은 대근의 뒤에서 윤아에게 윙크를 날렸다. 다행이도 일은 좋게 풀린 것 같지만, 윤아는 기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진지했다.
“아빠, 가시기 전에 제가 만든 케이크를 드시고 가세요.”
“필요 없다.”
“부탁해요. 아빠.”
“착각하지 말거라. 내가 지금 물러서는 건 형님과 건 내기 때문이지, 너한테 기회를 주기 위한 게 아니다.”
“내기……, 라뇨?”
대근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윤아를 스쳐지나갔다. 윤아는 대근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뒷모습만 봐야 했다. 윤아는 외삼촌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물었다. 외삼촌은 윤아가 하기에 달렸다며 의미심장한 말만 했다. 윤아는 어떻게든 일이 해결되어 웃어야 하는데, 기쁘지도 안도하지도 않았다. 어째서인지 마음 한 편에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아, 맞다. 너 집으로 올 때 조리실 정리하고 왔어?”
“대충은.”
“거기에 내 노트가 있는데……, 젤리도 그대로 놔두고 왔단 말이야. 키위 젤리는 어떻게 됐을까.”
“젤리는 규동이 치웠어. 노트가 거기에 있었나?”
대현의 물음에 규동은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들의 반응에 윤아는 불안해졌다.
“누가 훔쳐가지 않을까? 외삼촌, 지금 갔다 와도 돼요?”
“안 돼. 지금 이 시간에 윤아 너 혼자 가는 건 위험해. 내일 출근하는 김에 찾도록 하자.”
“그래, 멍청아. 네 것이 뭐가 좋다고 훔쳐 가냐? 괜히 번거롭게 만들지 마.”
“네가 좀 챙겨주지.”
“네가 안 챙겨놓곤, 그러게 누가 갑자기 나가라던?”
“난들 나가고 싶어서 나간 줄 알아?”
외삼촌은 씩씩거리는 윤아를 진정시켰다.
“내일은 외삼촌이 일찍 데려다 줄 테니까 오늘은 이쯤에서 자도록 하자. 윤아는 내일부터 출근이잖아?”
“알겠어요. 외삼촌, 우리 아빠 설득해줘서 고마워요.”
“당연히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아가. 잘 자.”
윤아는 꾸벅 인사를 한 뒤 대현과 2층으로 올라갔다. 규동은 어느새 자고 있는 듯 테라스에 없었다. 대현이 문을 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 윤아는 괜히 화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대현은 콧방귀를 뀌며 방으로 들어갔다. 바로 옆방인 윤아는 대현의 방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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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 없어. 정말 없어……. 없어졌어!”
윤아는 온 탁자와 서랍을 뒤졌지만 진정 보여야 할 것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너 정말 우리 조리대 위에 놔둔 거 맞아?”
“응. 그런데 왜 없지? 정말 누가 훔쳐간 건가…….”
윤아는 울상을 지으며 대현을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주변을 살펴보았다. 딱히 훔칠 거라고 생각되는 파티쉐는 없었다. 다들 제 각기 할 일을 하느라 바빴다. 그 때, 효린과 리하가 같이 조리실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