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굴러가는 캐리어의 바퀴 소리가 요란했다. 윤아는 자신의 허리까지 오는 캐리어를 힘겹게 끌며 호텔 앞에 섰다. 고개를 들어 호텔의 높이를 짐작해 보았다. 옥상까지 올려다보려 해도 유리에 반사된 햇빛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다, 손차양을 만들었다. 건물의 벽은 하얀색 바탕에 금빛 넝쿨과 붉은 장미들이 어우러져 있었고, 간혹 2층 마다 통유리로 되어있었다. 녹슨 곳 하나 없이 깨끗했다. 윤아는 호텔의 간판을 보며 또박또박 읽었다.
로제와인. 한국 최고의 특 1급 호텔로써 해외 잡지에 실릴 정도로 유명하다. 그 이유는 로제와인의 독특한 구조 때문이었다. 1층에서 7층은 백화점, 8층과 9층은 영화관, 10층에서 34층엔 약 1000실의 객실이 있다. 주목할 점은 그로부터 위층이었는데, 35층엔 일반 뷔페가, 36층엔 채식주의자를 위한 뷔페, 37층엔 디저트 뷔페로써 3단 뷔페를 이뤘다. 그 뿐만 아니라 39층에서 40층엔 각종 오락 시설과 스파 시설, 하늘 정원이 갖춰져 있다. 개중에서도 디저트 뷔페는 해외에서 유명한데, 외국인이 한국으로 유학 와서 로제와인에 입사하고 싶을 정도였다.
뷔페에 들어서니 갖가지 달콤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갓 구워낸 빵의 버터 냄새, 볶아서 더욱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견과류와, 조금은 흥분되게 만드는 초콜릿 냄새도 오묘하게 섞여 있었다. 그 냄새를 아우르는 뷔페는 들어오는 사람마다 놀랄 정도로 호화로웠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대형 초콜릿 공예가 있었는데, 에펠탑과 그 주변의 자잘한 건물들이 밀크 초콜릿으로 되어 있었다. 센터엔 윤아의 키만 한 초콜릿 분수가 있었고, 주변으로부터 시작해서 군데군데 백 여 가지의 디저트가 있었다. 테이블은 각마다 구석에 있었지만 대체로 화사한 톤의 식보 때문에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은밀한 얘기를 하기에 좋은 분위기를 연출시켰다.
“손님, 몇 분이세요?”
“저어, 한 명인데 잠시만요.”
윤아는 뒤에 손님이 있단 걸 뒤늦게 알아채고 황급히 숄더백에서 지갑을 꺼냈다. 외삼촌이 우편으로 보내줬던 카드가 보이지 않았다. 윤아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잠시만요’라고 외쳤다. 숄더백을 뒤적거려 봐도 카드는 보이지 않았다. 윤아는 호텔리어를 바라보다 캐리어 가방을 보고 한참을 멍하게 있더니, 다시 호텔리어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뒤에 기다리던 손님들에게 사과 하고 나서, 카운터 옆으로 빠져나와 캐리어를 펼쳤다. 캐리어가 쾅, 하고 뒤로 젖혀졌다. 윤아는 깜짝 놀라 움찔거리며 호텔리어의 눈치를 보았다. 호텔리어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한 파티시에가 디저트를 진열하다가 소란스러운 윤아를 향해 고갤 돌렸다. 윤아의 쩔쩔 매는 모습이 보였다. 윤아는 빨개진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감추며 캐리어를 뒤졌고, 이내 카드를 발견했다. 금색 바탕에 로제와인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호텔리어는 물론이고 윤아를 멀리서 지켜보던 파티시에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70퍼센트 할인해서 삼 만 원입니다.”
호텔리어가 윤아에게 영수증을 주었다. 윤아는 영수증에 적혀진 원가를 보고 뒤에 손님들을 보았다. 손님들 모두 원가에 이 디저트 뷔페에 들어섰다. 이런 고가의 돈을 주면서 과연 오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지만은, 손님의 반 이상이 외국인이었고 그렇다고 내국인도 적지 않았다.
윤아는 한 테이블에 자리 잡은 다음 소매를 걷었다. 해맑은 표정으로 수많은 디저트를 집어 오더니 쉴 새 없이 먹어 치웠다. 딸기 파르페, 에그타르트, 초코 티라미수……, 빈 접시를 치우는 웨이터 역시 쉴 틈이 없었다. 웨이터의 표정은 잔뜩 질려 있었다. 윤아는 그런 남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초콜릿 분수로 향했다.
초콜릿 분수를 가까이서 보니 더욱 커보였다. 윤아는 초콜릿이 쏟아 내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젤라또 퐁뒤 만드는 방법이 적혀져 있었다. 윤아는 방법을 제대로 보지 않고 꼬챙이를 덥석 쥐었다. 동그랗게 뭉친 젤라또를 여러 개 꽂은 뒤 흐르는 초콜릿에 푹 담갔다. 초콜릿이 여기저기에 튀어 손가락에 잔뜩 묻었다. 윤아는 어찌할 줄 몰라 제자리에서 쩔쩔 맸다.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남자 목소리였다. 파티시에(남자 파티쉐)는 윤아 뒤에서 퐁뒤에 쓰일 과일을 갖다 놓던 참이었는데, 윤아의 모습을 보고는 곧장 윤아에게 다가갔다. 주머니에서 일회용 물티슈를 꺼내 윤아에게 건넸다. 윤아가 물티슈를 받자, 파티시에는 윤아가 들고 있던 꼬챙이를 접시에 담았다. 파티시에는 다른 꼬챙이를 꺼내 젤라또를 꽂고는 초콜릿 분수에 살짝 담가 돌렸다. 파티쉐의 손짓이 여성스럽고 조심스러웠는데, 능숙한 탓에 여러 개의 퐁뒤를 재빨리 만들 수 있었다. 윤아는 멍하게 바라보다가, 손에 묻은 초콜릿을 빨리 닦지 않으면 굳을 거란 파티쉐의 말에 허겁지겁 닦았다. 파티쉐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접시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윤아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파티쉐의 명찰을 보았다. 이규동이란 이름에 일본식 삼각 김밥이 떠올랐다. 웃음을 참으며 규동의 얼굴을 보았다.
“아뇨. 저야 말로 고맙죠.”
“제가 뭘 했다고?”
“이건 제가 만든 젤라또이거든요.”
“아아…….”
“여긴 경쟁을 통해 올라온 음식들이지만, 아무리 파티쉐들에게 좋은 음식이라고 평가 받아도 손님들이 자주 찾지 않는 음식이라면, 가차 없이 그 상품을 없애요. 손님들에게 인기가 높으면 높을수록 포인트제로 합산해서 더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어요.”
“역시 외삼촌.”
규동이 윤아에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외삼촌……?”
윤아는 황급히 입을 다물며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웃어 넘겼다.
“처음 보는 손님한테 많은 정보를 가르쳐 주시네요.”
“뭐, 원래 손님한텐 잘 말하지 않죠. 아가씨는 평범한 손님이 아닌 것 같아서요.”
“네?”
“아까 요란하게 계산하시기에……. 아, 나쁜 뜻은 아니고요. 이곳에서 할인 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에요. 파티쉐의 지인이라면 할인할 수 있죠. 보통 30퍼센트 할인이 파티쉐의 지인이라고 하던데, 70퍼센트면……?”
“야! 이규동! 여자랑 노닥거리지 말고 빨리 와! 우리 조 바쁜 거 몰라?”
규동은 자신을 부르는 파티시엘(여자 파티쉐)의 목소리에, 급히 돌아가려다 말고 마카롱을 초콜릿 퐁뒤로 할 수 있는 곳을 가리켰다. 윤아는 마카롱이란 단어에 눈을 크게 뜨며 규동의 손이 가리키는 곳으로 돌아보았다.
“저기가면 젤라또 말고도 다양한 음식을 퐁뒤로 만들 수 있어요. 그럼 즐거운 시간 되세요.”
규동은 윤아의 뒷모습을 향해 싱긋 웃고는 파티시엘의 뒤를 따랐다. 윤아가 아차, 생각하며 규동에게 눈을 돌렸지만 사라진 후였다.
“고맙다고 말도 제대로 못했는데…….”
윤아는 마카롱 코너 앞으로 다가갔다. 마카롱은 쉽게 깨지는 과자인지라, 직접 퐁뒤 해주는 파티쉐가 따로 있었다. 윤아는 마카롱 종류가 설명된 팻말을 보았는데, 아무리 읽으려 애써도 읽을 줄 몰라서 한참 동안 팻말을 쏘아봤다. 그러고 나서는 아무 마카롱이나 집어 파티쉐에게 주었고, 파티쉐는 퐁뒤로 해서 다시 윤아에게 주었다.
윤아는 자리에 돌아와 젤라또를 먹고 나서, 마카롱을 집어 모양을 둘러보았다. 초콜릿에 뒤덮여 원래의 마카롱 색깔이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마카롱을 한 입 베어 물었다. 표면의 식감이 비교적 단단했다. 초콜릿 때문인가, 아니 초콜릿 때문이 아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맛을 음미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위의 사람들이 윤아를 쳐다봤다. 윤아는 다시 자리에 앉아 마카롱을 한 입 더 베어 먹었다. 상큼한 과일의 향, 패션 망고의 맛이라고 치기엔 좀 더 새큼했다. 윤아는 혹시, 라는 마음을 가지며 재빨리 마카롱 퐁뒤를 만들어준 파티쉐에게 갔다.
“죄송한데요, 이거 무슨 맛이에요?”
“패션 망고…….”
“아뇨. 패션 망고 아니에요. 유자 맛. 그래, 여기에 유자 맛 마카롱도 있어요?”
“아, 네. 그거 유자 맛 마카롱이에요.”
“이거 누가 만들었어요? 남자가 만들었죠?”
“네? 네……. 마카롱을 담당하는 사람은 남자 한 명밖에 없거든요.”
윤아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잔뜩 들떴다.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요?”
“네?”
“빨리요. 빨리 말해주세요. 지금 조리실에 있죠?”
“네. 그런데 무슨 일…….”
윤아는 접시를 파티시에 옆에 놔두고 조리실로 뛰다시피 걸었다. 파티쉐들은 모두 디저트를 만드느라 정신없었다. 크림을 만드는 사람, 반죽을 하는 사람, 다 구운 타르트를 꺼내는 사람 등 파티쉐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윤아는 그 많은 사람들 중 마카롱을 만드는 파티쉐를 찾아다녔다.
‘외부인이 들어왔다고 파티쉐들이 화내기 전에 찾아야 할 텐데.’
급한 마음을 부둥켜안고 좀 더 깊숙이 들어가려 할 때였다. 마카롱 퐁뒤를 해주었던 파티시에가 윤아의 팔목을 힘껏 휘어잡았다.
“손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어서 주방에서 나가주세요.”
윤아가 걸음 물러서다가 누군가와 부딪혔다. 윤아는 놀란 마음에 급히 뒤돌아 허리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여긴 외부인 출입 금지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급히 찾아야할 사람이 있어서요.”
윤아는 슬쩍 허리를 펴고 파티시에의 얼굴을 쳐다봤다. 윤아의 눈은 커졌고, 입은 벌어졌다. 곧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파티시에의 손에 든 직사각형의 팬을 보았다. 팬 위에 수 십 개의 마카롱이 있었다. 분명했다. 마카롱을 만든 파티쉐가 이 사람이라는 것을.
“이 유자 맛 마카롱 오빠가 만든 거 맞지?”
“그렇긴 하다만, 오빠라뇨?”
대현은 무턱대고 반말로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윤아가 마냥 불쾌했다.
“오, 오빠가 아니었나? 나 기억 안 나?”
“누구?”
“왜, 나 정말 기억 못해? 어릴 적에 이거 나한테 많이 만들어줬잖아.”
윤아가 대현에게 쉴 틈 없이 질문할 때 쯤, 한 파티시엘이 왔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좀 전에 규동을 불러 데리고 갔던 파티시엘이었다. 대현은 짜증을 내며 자신도 모르겠다고 파티시엘에게 말했다. 파티시엘은 윤아를 노려보고는, 강제로 윤아의 손목을 잡고 조리실에서 끌어냈다. 윤아는 꿋꿋하게 버티려 했지만 파티시엘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질질 끌렸다. 윤아는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대현을 계속 바라보다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 옛 일을 떠올렸다. 마카롱을 만드는 모습과 웃으며 먹어보라는 남자아이의 얼굴이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 얼굴이 변했을 뿐, 이목구비와 그 분위기는 똑같았다.
윤아는 파티시엘의 손을 뿌리쳤고, 동시에 윤아의 등이 파티시에가 쥐고 있던 팬을 세게 밀쳐버렸다. 윤아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뒤로 돌았다. 떨어지는 팬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팬의 속도를 이기지 못했다. 팬이 바닥에 엎어졌다. 소리가 요란했다.
“저어…….”
마카롱은 처참하게 깨져 바닥에 흩어졌다. 일을 하고 있던 파티쉐들은 모두 이곳을 바라봤다. 대현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자신의 발끝에 부수어진 마카롱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