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저기요, 이거 대체 어쩔 거예요!”
“죄, 죄송합니다. 실수로…….”
파티시엘의 말에 윤아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하나둘씩 몰려든 파티쉐들은 윤아를 향해 좋지 못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윤아는 당황해하며 계속해서 사과했다. 파티시엘은 앙칼진 목소리로 윤아의 당황한 마음을 더욱 보챘다. 윤아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섬주섬 깨진 마카롱을 줍기 시작했다. 가루로 된 마카롱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팬에 담았는데, 그 손이 심하게 떨렸다.
“아, 저기요.”
이윽고 대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아는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실수든 고의든 이거 어떡하실 겁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하다 말한다고 이게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마카롱 만들 줄 아세요?”
“아니요…….”
“그럼 당장 나가세요. 조리실은 물론이고 이 뷔페에 얼씬거리지 마세요.”
“저 그게…….”
“아, 죄송하지만 전 그쪽 분이 말씀하시는 오빠가 아닙니다. 사람 잘못 봤습니다. 그러니 정말로 화내기 전에 나가주세요.”
윤아는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조리실 밖으로 나갔다. 테이블에 있던 캐리어와 겉옷을 들고 뷔페에서 나갔다. 어깨는 축 쳐져서, 캐리어를 끄는 팔엔 힘이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전화하라던 외삼촌이 생각나, 숄더백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외삼촌의 집으로 가기 전에 빨리 뷔페 음식을 먹고 싶어서 전화를 하지 않았던 건데, 아무래도 그게 잘못된 것 같았다.
“윤아? 윤아 맞지?”
“외삼촌?”
외삼촌은 깔끔한 슈트 차림으로 윤아 앞에 서 있었다. 윤아는 울먹거리며 외삼촌에게 안겼다. 외삼촌이 당황하며 윤아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 일이 있었어? 눈도장 제대로 했네.”
“놀리지 마요, 외삼촌. 난 진지하단 말이에요.”
“어차피 지금 마칠 시간도 됐으니까 걔들이 알아서 잘 해결 했을 거야. 근데 왜 하필 그 많은 파티쉐들 중에 대현이냐.”
“대현이요……?”
“그 마카롱 만든 남자 애 말이야. 일은 잘 해결할 수 있어도 그 후가 문제지.”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줘요.”
“먼저 집에 가 있어. 나중에 얘기 다 해줄게.”
외삼촌이 윤아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냈다. 윤아는 외삼촌이 준 종이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주소가 적힌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뷔페에서 있었던 일은 전부 까먹고, 외삼촌의 집에 간다는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아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문은 쉽게 열렸다. 잔디가 곱게 깔리고 모서리에 여러 꽃들이 펴 있는 마당과, 넓은 2층 주택이 보였다. 1층은 집의 한 면이 통 유리로 되어 있어서 거실이 훤히 보였다. 2층은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테라스가 있는 것 같았다. 윤아는 감탄을 하며 집에 들어섰다. 가정부는 살갑게 맞이하다가, 밥은 준비해 두었으니 자신은 잠시 집에 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 안을 구경했다.
탁 트인 거실과 바로 이어진 부엌은 대체로 무채색의 모던 스타일이었으며, 화장실도 굉장히 넓었다. 1층의 방은 서재와 외삼촌의 방이 전부였다. 2층으로 올라가니 세 개의 방이 양옆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그 방 중에 하나가 윤아의 방이었다. 어쩌면 모든 소리가 다 들릴 지도 모를 거리였다.
그 방을 넘어 테라스가 있었는데, 겨울에도 애용할 수 있게 작은 방처럼 벽이 쳐진 테라스도 있었다. 그곳엔 긴 탁자와 디귿자 모양인 책꽂이 겸용 소파가 있었다. 외부의 방해 없이 개인의 시간을 가지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윤아는 기지개를 켜면서 테라스 소파에 앉아, 밑을 내려다보았다. 고운 빛깔의 동백꽃과 마당이 한 눈에 들어왔다. 윤아는 이 집이, 특히 테라스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집 구경을 다한 윤아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 정리를 한 뒤,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것은 신발 두 켤레였다. 가정부 때문에 한 켤레 더 늘린 건가, 추측을 하며 거울을 들여다봤다. 거울에 나란히 붙은 칫솔 받침대가 네 개 있었고, 그 중 세 개에 칫솔이 끼워져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신의 칫솔을 남은 빈 곳에 끼웠다. 분명 외삼촌은 독신인데 이 만큼의 신발과 칫솔이 필요할까. 윤아는 씻는 내내 소품들이 눈에 밟혔다.
다 씻은 다음 샤워 타월로 몸을 두르고 밖으로 나오자,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외삼촌은 친척 중에서도 제일 친했으므로 이런 모습을 보여줘도 상관없단 생각에, 그 차림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응, 내 조카야. 좀 덤벙대지만 그래도 성격 하나 만큼은 좋아.”
윤아는 두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이내 윤아를 포함한 모두의 눈이 커졌다. 외삼촌은 그것도 모른 채 설명하기에 바빴다. 뒤늦게 들어오며 문을 닫은 뒤 정면을 바라봤다. 외삼촌도 윤아와 눈이 마주쳤다. 외삼촌의 설명이 끝났다. 한순간 현관은 적막했다.
“그 애가 쟤야.”
외삼촌은 나름 침묵을 깨기 위해 윤아를 소개했지만, 다시 찾아오는 침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윤아의 몸과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두 남자를 번갈아가며 손가락질 했다. 대현과 규동도 얼굴이 붉어져 서로 벽만 보았다. 윤아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방으로 급히 뛰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머지않아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를 들어보니 한 명은 아닌 것 같았다. 각자의 방에 들어갔는지 문소리가 들렸고 그 후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간혹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윤아는 방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머리를 긁어댔다.
“윤아야, 방에 있지?”
외삼촌이 문을 열었다. 괜찮다며 아이를 달래 듯 말했다. 윤아는 머리를 더 긁어대며 울상을 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일어나 외삼촌을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엔 가정부가 준비해놓은 음식이 있었고, 의자엔 대현과 규동이 앉아 있었다. 윤아는 고개를 푹 숙이며 오만 인상을 찌푸리다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자리에 앉았다. 외삼촌은 윤아의 옆에 앉았다.
“안녕, 윤아야.”
“어, 응. 안녕. 네가 규동이지?”
“응. 앞으로 잘 지내보자.”
어색한 대화가 끝나자 외삼촌이 말했다.
“식구가 다 모인 기념에 특별히 반찬 더 신경 썼으니까 많이들 먹어.”
“잠시만, 외삼촌! 식구가 다 모였다니요? 얘들이 왜 여기에 있어요?”
규동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고, 대현은 사납게 윤아를 노려봤다.
“얘는 아까 마카롱을 만들었던 대현이야. 외삼촌한테 파티쉐 스승님이 있다고 했지? 그 스승님의 손자야. 대현이는 옛날에…….”
외삼촌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멈췄다. 지금이 윤아에게 과거를 얘기해봤자 윤아는 기억을 못하는 게 뻔할 것이고 괜히 과거를 꺼내려다가 윤아의 이상 반응이 일어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외삼촌은 규동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얘는 젤라또 퐁뒤를 만들었던 규동이야. 대현은 스승님의 손자인데다가 타 지역에서 왔으니 우리 집에서 같이 사는 거고, 규동은 대현의 고등학교 동창이니까 규동이도 같이 우리 집에 사는 거야. 아, 그리고 너희들 다 동갑이야. 뭐, 벌써 말은 튼 것 같지만.”
말도 안 돼, 윤아는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외삼촌의 스승의 손자라니. 윤아가 신기하게 대현을 바라보자, 대현은 험한 표정을 지으며 마카롱 얘기를 꺼냈다. 윤아는 멋쩍게 웃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 어떻게 됐어?”
“누구 때문에 권리하가 다 치우고 나는 다시 만들었지. 손님들이 한참 동안 그 디저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지.”
“대현아, 그 일은 지난 일이니까 이제 잊어. 그럴 수도 있지.”
“네 디저트 파트가 아니니까 그런 말이 나오겠지. 그게 무슨 말이 되는 상황이냐고. 하마터면 손님들이 못 먹을 뻔 했잖아.”
“그만 좀 해라. 그 손님들이 못 먹어서 한 두 번 핀잔하는 평가에, 네 포인트가 깎인다고 해도 네 정도의 실력이면 금방 채울 수 있잖아. 윤아가 난처한 것도 생각해 줘라.”
“넌 그 상황에 얘 편 드냐.”
외삼촌은 대현과 규동의 말싸움을 듣다 말고 말렸다.
“대현이 네가 정 분이 풀리지 않으면 네가 윤아의 테스트 주제를 정해라.”
“좋아요. 마카롱으로 해요.”
외삼촌은 지그시 대현을 바라보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고, 정리할 즈음에 외삼촌은 대현을 불렀다. 대현은 싱크대에 빈 그릇을 놔두다 말고 외삼촌을 쳐다봤다. 외삼촌이 손을 까딱거렸다. 윤아는 외삼촌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같이 따라가려다, 방에 가라는 외삼촌의 말에 멈춰 섰다. 곧 이어 가정부가 다시 왔다. 알 수 없는 분위기에, 가정부는 규동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규동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외삼촌과 대현은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규동은 그들의 눈치를 보고는 윤아를 이끌고 2층 테라스로 향했다.
“미안해. 대현이 대신 내가 사과할게.”
규동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냐, 나야 말로 사과해야지. 나 때문에 둘이 싸웠잖아.”
“그건 싸운 것도 아니야.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금방 괜찮아져. 대현이가 투덜대는 성격이긴 하지만 알고 보면 좋은 애야.”
“글쎄. 그건 좀.”
‘윤아야, 이거 한 번 먹어봐!’
‘마카롱?’
‘그냥 먹어봐, 어서, 어서!’
‘우와 진짜 맛있어!’
‘정말?’
‘분명 그 마카롱은 대현이가 만든 마카롱과 일치한데, 왜 내가 기억하는 사람과 대현은 전혀 다른 성격일까.’
윤아는 살짝 거두어진 커튼 틈 사이로 주위 풍경을 구경했다. 한 겨울의 저녁 여덟 시, 주변은 컴컴했다. 팔을 어루만지며 쿠션을 품에 꼭 껴안고 한동안 빈둥거렸다. 그런 윤아의 모습에 규동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윤아는 규동의 시선을 느꼈는지 규동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몇 초도 마주치지 않았을 무렵, 어두워서 규동의 피부 색깔은 알 수 없었지만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얼굴이었다. 규동은 고개를 돌려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윤아는 규동에 비해 담담했고, 그래서 규동을 더욱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런데 아까 그 테스트라는 건 뭐야?”
“테스트라는 건, 로제와인 디저트 뷔페의 파티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자격을 알아볼 수 있는 테스트야. 테스트는 바로 다음 날 뷔페 영업시간이 끝난 저녁에 치게 돼. 네가 만든 디저트를 모든 파티쉐와 너희 외삼촌이신 마스터가 먹고 과반수가 인정을 하게 된다면 너는 테스트에 통과할 수 있어.”
“잠시만, 내일 저녁이라니? 난 마카롱 만드는 방법을 모르는데.”
“그래서 대현이가 네 테스트 주제를 마카롱으로 했을 거야. 아마.”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그렇게 안 봤는데…….’
윤아가 속으로 외쳤다.
“못됐어.”
울상을 지으며 양 손으로 자신의 품에 있던 쿠션을 찍었다. 그 때, 대현이 테라스에 들어와 윤아의 앞에 삐딱하게 섰다.
“내가 못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