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대현아!”
윤아는 물을 마시던 대현의 뒤로 몰래 다가가, 팔로 대현의 등을 장난으로 밀었다. 대현의 몸이 앞으로 치우치면서 컵에 담겼던 물이 쏟아졌고, 대현은 사래에 걸렸는지 힘겹게 기침을 했다. 손등으로 입 주변을 닦으며 윤아를 노려보았다. 윤아의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아마 울어서이겠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 따져보면 윤아의 부운 눈은 매일 아침마다 볼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윤아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 테라스에서 아무 일도 없었단 것처럼 천진난만하게 대현을 응시했다. 대현은 윤아가 애써 웃는 건지, 정말 바보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첫 출근 때문에 들뜬 것일 지도 몰랐다.
“기억 안 나?”
대현은 윤아가 어젯밤 테라스의 일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현은 윤아가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하면 기억이 날 줄 알았는데……. 어릴 적에 말이야.”
대현의 생각과는 다른 전개였다.
“아, 난 네가 아는 오빠가 아니라니깐.”
“근데 어릴 적에 먹어본 마카롱은 네 마카롱과 똑같았어.”
“어릴 적에 먹었던 걸 어떻게 지금까지 기억하냐?”
“보통 마카롱의 필링(꼬끄 사이의 크림)엔 맛을 내는 잼으로 잘게 다져 넣어. 하지만 어릴 적 먹었던 마카롱엔 유자 잼 대신에 설탕에 절인 유자로 만들어서, 생과일을 씹는 식감이 있어. 잼보다 향과 맛도 더 강했어. 그 맛이 네 거랑 똑같았어. 식감도 틀림없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아 글쎄, 우리 옛날에 아는 사이였다니까?”
“난 너랑 동갑이야. 오빠라면 연상일 거 아냐.”
“음, 어쩌면 내가 나이를 착각했을 지도.”
“그 사람의 이름이 뭔데?”
“몰라.”
“생긴 건?”
“너처럼 코가 오똑하고……, 오똑하고……, 오똑하고.”
윤아는 기억을 되짚으려는 듯 천장을 흘깃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눈도 너처럼 올라가고.”
윤아가 자신의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대현은 잠시 할 말을 잃다가 이상한 눈초리로 낭창하게 웃는 윤아를 쳐다보았다. 윤아의 말에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다.
“뭐야 그게, 너도 기억 못하네. 그렇게 생긴 사람이 한 두명이냐.”
“응.”
“이상해.”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 해. 뭔가 섞였다고 할까.”
“이틀 전엔 확신한 것처럼 말하더니, 오늘은 왜 기억이 안 난다고 발뺌 하냐?”
“그렇지만 네가 진짜…….”
그 때, 규동이 서두르지 않으면 출근 시간이 늦겠다며 현관문을 열고 고개만 드러냈다. 대현은 물 컵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고, 윤아도 그 뒤를 따랐다. 윤아는 대현의 뒤를 따르며 계속 물어봤지만, 대현은 윤아에 대해 전혀 기억나는 게 없다고 단정 지었다. 로제와인에 도착하자마자 들뜬 윤아는 차에서 뛰쳐나갔고 덩달아 규동도 내렸다. 대현도 내리려고 문을 열고 발 한 짝을 땅에 디뎠을 쯤, 외삼촌이 대현을 불렀다.
“적응 기간만이라도 잘 부탁해.”
“그런 건 스스로 해야죠.”
“아직 스스로 하기엔…….”
대현은 한숨을 내뱉으며 외삼촌의 말을 잘랐다.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대현은 차 문을 닫고 회전문을 넘어 로제와인으로 들어갔다. 뒤를 향해 흘깃 시선을 두었다. 막상 차에서 내리고 나니 방금 전에 자신이 끊었던 외삼촌의 대화 뒷부분이 신경 쓰였다. 외삼촌은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선팅 된 유리 때문에 외삼촌이 무엇을 하는지 자세히 알 수 없었다.
뷔페 오픈하기 두 시간 전. 파티쉐들은 각 팀을 나눠 파트 별로 디저트를 만들었다. 윤아는 아직 제대로 만들 수 있는 게 없었기에, 재료를 준비하거나 반죽을 하기만 했다. 핸드 믹서를 돌리며 반죽을 했는데, 영 어설프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은 물론이고, 특히 대현의 얼굴엔 한 없이 불안한 기색을 띄었다. 대현은 마카롱을 구울 동안 윤아의 핸드믹서를 강제로 빼앗아 대신 반죽하기 시작했다.
“넌 전자저울이나 제대로 재서 김효린 도와줘.”
“그거 내가 해도 되는데.”
“멍청아, 빨리.”
“또, 또, 멍청이래.”
윤아는 뭔가를 중얼거리며, 효린의 옆에 달라붙어 재료의 양을 측정했다. 들릴 듯 말 듯 효린에게 대현의 뒷담을 했다. 대현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윤아와 종종 눈싸움을 했다. 효린은 그저 웃기만 하며 윤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쟤 뭐야. 할 줄 아는 것도 없잖아.”
리하는 누군가의 일을 대신해서 도와주는 대현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리하와 같은 팀인 규동이 리하에게 한 눈 팔지 말라고 말했다. 리하는 뭔 상관이냐면서 화를 내고는 반죽을 거칠게 했다.
윤아는 뷔페가 오픈하고 나서 대현이 시키는 대로 일을 했지만, 모두 엉망이었다. 설거지를 시키면 접시를 놓쳐서 떨어뜨렸고, 저울질을 하라면 시간이 너무나 지체되었고, 효린을 도와 짤주머니 안에 반죽을 넣을 때면, 반죽을 쏟곤 했다. 거기다가 그나마 잘했던 서빙도 손님과 부딪히는 바람에, 손님이 초콜릿 분수와 맞부딪혀 한 쪽 팔 전체가 초콜릿 범벅이 되어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윤아가 부족한 디저트를 채우기 위해 가져왔던 명수의 과일 파르페들을 모두 엎질러 버리는 사단까지 이르게 되었다. 결국 윤아 팀의 멤버 전체가 각각 포인트 3점 씩 깎였고, 자신의 디저트로 손님을 접대하지 못한 명수는 개인 포인트만 해도 7점이 깎여버렸다. 매번 극찬만 받았던 로제와인이 삽시간에 평판으로 그득했다.
“제정신이야?”
“미안해.”
영업이 끝난 저녁, 윤아는 대현의 앞에 숨죽여 있었다. 다른 팀의 파티쉐들도 윤아 때문에 오늘 하루 동안 피해가 적지 않아,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마음가짐이 덜 잡혔다는 둥,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둥 수없이 많은 지적이 나왔다.
“오늘 여기 조리실 청소는 네가 다 해. 우리는 런치와 디너 타임 모두 디저트를 만드느라 힘을 썼지만, 넌 오늘 한 게 없잖아?”
시발점은 리하가 한 말이었다. 대부분의 파티쉐는 기운 빠진 표정으로 그렇게 하라고 부추겼다. 윤아는 겸연쩍게 웃으며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조리실에 남은 건 윤아 팀 멤버들뿐이었다. 효린은 대현의 눈치를 은근슬쩍 보며, 윤아에게 귓속말로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윤아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효린은 설거지를 도왔다.
“김효린, 너 뭐해 지금.”
“윤아가 다 하기엔 너무 많은 것 같아서…….”
“그 장갑 벗어.”
효린이 머무적거리며 장갑을 벗지 않자, 대현이 강제로 장갑을 벗겨 그것을 윤아에게 던졌다. 윤아는 그 장갑을 받으며 대현의 얼굴을 보다 눈을 내리 깔았다.
“여기가 네 놀이터냐? 밀가루로 흙장난하고, 도구들로 성 쌓고, 다른 파티쉐들의 심기는 시소처럼 들었다 놨다 저울질 하게? 너 때문에 포인트 얼마나 깎였어?”
“각 3점……, 명수는 총 10점…….”
“사람마다 다르지만 보통은 한 달에 1점도 받기 힘들어. 근데 10점이 깎이면 몇 달 치인 줄 알긴 해? 네 형편없는 실력에 오늘 조리실 분위기가 엉망이었고, 덕분에 우리 팀은 19점이나 잃었고, 손님들의 평판도 장난 아니었어. 팀과 개인의 벌점을 합산해 15점을 넘기면 마스터에게 보고해야 하는데, 누가 마스터에게 뭐라고 보고를 해야지?”
“내가 오늘 잘 말해 볼게.”
“또 그 인맥, 인맥. 넌 참 살기 좋아. 무조건 남한테 의지하려 하고 또 남들은 그걸 다 들어주고. 네가 잘못한 게 있으면 미안하단 사과 하나면 끝이고, 멍청하게 웃어넘기면 되고. 넌 고작 그런 것밖에 못하는 사람이야. 파티쉐란 직업을 업신여기지 마.”
“난 파티쉐를 업신여긴 적 없어.”
“스물네 살이나 먹어놓고 응석부리지 마.”
윤아는 자신이 응석을 부리지 않았다는 듯이 대현의 얼굴을 똑바로 주시했다. 대현은 윤아의 그런 행동이 가소롭게 느껴졌는지, 식탁에 두었던 자신의 가방을 들고 조리실에서 나가려다, 다시 뒤돌아 윤아를 쏘아봤다.
“명수가 10점이나 깎인 건 네 알아서 처리 해.”
‘적응 기간만이라도 잘 부탁해.’
“넌 내가 마스터한테 잘 말해두지.”
윤아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자격 없는 사람은 우리 팀에 필요 없다고.”
비단 윤아는 고개를 숙인 채 설거지를 할 뿐이었다. 그 뒤로 대현은 그들보다 먼저 조리실에서 빠져나갔는데, 규동이 복도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멈췄다. 그러고는 규동의 옆을 지나치다가 규동의 말에 발목이 잡혔다.
“엿들었어. 마스터께서 너한테 부탁한 게 뭔지.”
“네 알 바 아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신경 꺼.”
“네가 정 못하겠다면 내가 도와줘도 되는 거지?”
대현은 자신의 갈 길을 향해 갔고, 규동 역시 윤아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리실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윤아는 짐을 다 싼 뒤에 마지막까지 자신의 편을 들어준 효린을 끌어안았다. 효린은 괜찮다며 윤아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윤아는 그 손길에 몸을 움찔거리다 한동안 효린을 놓아주지 않았다. 윤아를 껴안은 효린도, 명수와 규동도 한 동안 말을 잃었다.
“명수야, 네 포인트는 어떻게 해서든 내가 돌려줄게.”
“어떻게?”
“내 포인트를 줄게. 자신의 포인트를 줘도 된다고 들었어. 우리 팀이 각마다 받은 벌점도 돌려줄게.”
“그건 무리야. 한 사람이 벌점 15점 받으면 임시 활동 정지고, 20점을 받으면 일 잘려. 너 지금만 해도 우리한테 포인트를 다 주면 벌점 19점인데, 후에 나머지 1점을 안 받을 거란 보장도 없잖아.”
“아냐. 나한테 방법이 있어. 내가한 건 책임질게. 꼭 책임질게. 그러니 기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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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마스터, 저예요.”
“들어와.”
서재에서 프랑스 잡지를 보던 외삼촌은 잡지를 덮고 대현을 맞이했다. 대현의 표정은 비장했다. 외삼촌이 어서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임윤아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