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얼라? 대현아 왜 아직도 안 가고 있었어? 누구 기다려?”
“너.”
“나?”
“아, 그래 멍청아. 빨리 와.”
윤아가 혼자만의 연습을 끝낸 뒤에 조리실 문을 잠그려 할 때였다. 복도에서 등을 기대고 서있던 대현이 보였다. 대현은 윤아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은 채, 복도를 건넜다. 윤아는 문을 잠그고 서둘러 대현의 뒤를 따랐다. 복도 끝에 이어진 파티쉐 전용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대현은 휴대폰을 통해 시계를 본 뒤 윤아를 노려봤다. 윤아는 그런 대현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대현이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넌 이 시간까지 조리실에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연습하려면 어쩔 수 없는 걸.”
“만날 이렇게 걸어서 집까지 간 거야?”
“응. 밤12시엔 버스랑 지하철이 운영 안 하니까.”
“예전부터 생각해왔지만 넌 정말 네 몸 걱정을 하나도 안 하는구나.”
“내가 뭘?”
대현은 대책이 없다며 골머리를 앓았다. 이 캄캄한 새벽에 혼자 집에 가다니, 외삼촌이 이 사실을 안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 있잖아. 나 왜 기다렸어?”
천진난만하게 묻는 윤아의 말에, 대현은 자신이 여태껏 윤아를 기다린 이유를 생각했다. 윤아의 어리바리한 표정에 까먹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이 났다. 대현은 뭔가를 말하기 위해 입술을 뗐지만 다시 닫았다. 윤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대현의 팔을 흔들었다. 대현은 재촉하는 윤아의 손을 뿌리치고 시선을 먼 곳에 두었다.
“너 매번 새벽에 들어가는 거 마스터랑 규동이 걱정한다.”
“어? 나 새벽에 집 가는 거 알고 있었어?”
“그럼 모르냐?”
“응. 모를 줄 알았지.”
“대책 없네.”
“있잖아, 외삼촌이 정말 나 걱정하셨어? 많이?”
“몰라. 내 알바냐.”
대현이 윤아에게 말하려고 했던 건 이 말이 아니었다. 자신이 윤아에게 심한 말을 했던 것, 상황을 몰라주고 대했던 행동들을 사과하려고 했는데, 그 말은 목에서 막혀 나오지 않았다. 대현은 괜히 윤아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윤아는 한편으로 걱정을 끼치게 해서 미안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이 좋았다. 환하게 웃으며 대현에게 팔짱을 꼈다. 대현이 놓으라고 짜증을 냈지만, 윤아는 끝까지 놓지 않았다. 윤아는 생각했다.
‘대현은 아직도 어릴 적 기억을 못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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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뭐한다고 이제 왔어?”
“연습 마치고 나서 대현이가 데라다 줬어.”
“그래? 연습은 잘 했고?”
“응!”
대현과 윤아는 씻고 나와 테라스에서 월말평가 준비하던 규동과 얘기를 나눴다. 윤아는 대현과 규동의 사이에 앉아 월말평가를 같이 준비했다. 비록 활동 정지를 받았지만, 정지가 풀리면 다시 파티쉐의 일을 할 수 있고, 그로부터 며칠 후에 바로 월말평가를 치기 때문이었다. 월말평가, 윤아에게 있어선 반드시 합격해야할 숙제였다.
규동은 윤아가 무언가를 노트에 계속해서 적자, 궁금했는지 봐도 되냐고 물었다. 윤아는 뭔가를 망설이다가 노트를 건넸다. 뭔가 조합해보면 좋은 아이디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두서없이 나열된 문장과, 참고로 그려지지 않은 그림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규동은 윤아에게 그림을 그려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윤아가 그림 실력이 없다고 하자, 그림은 아이디어를 내는데 도움이 많이 될 거라며 규동이 조언을 해주었다. 윤아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밑에 남은 여백에다가 그림을 그려, 각 부분마다 화살표를 그리고 맛과 재료를 썼다. 윤아가 규동에게 노트를 다시 보여주자, 규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생각 진짜 많이 했네. 전혀 내가 시도해보지 못한 것들이야. 신선하고 잘만 만든다면 분명 맛있을 거야. 대현이랑 나랑 리하보다도 훨씬 좋은 아이디어야.”
“너무 그렇게 칭찬해주지 마. 부끄러워.”
“아냐, 정말 칭찬 받을 만해. 근데 정말 이런 게 있긴 해?”
“응. 아빠가 할머니 댁에 갔다 오시면서 선물로 그걸 받아오셨거든. 맛이 신선했어.”
“그거 나도 한 번 먹어 보면 안 돼?”
“음……, 아직 실험해보지 못한 게 있어서 다음에 성공하게 된다면, 누구보다 먼저 규동이한테 줄게.”
대현은 아이디어를 스케치 하는 내내 궁금했다. 규동과 윤아는 윤아의 어느 노트 내용을 보고 대화를 하는지 몰랐다. 거기다가 할머니 댁에서 받았단 ‘그것’이 무척 궁금했다. 차마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라, 대현은 혼자 관심 없는 척 스케치를 했다. 규동은 그런 대현을 눈치 챘는지, 일부러 대현을 떠보기라도 하는 듯 윤아와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맛이 신선하다니 무슨 맛이었는데?”
“소녀 소녀스러운 맛?”
“대체 그게 무슨 맛이야……?”
“음, 흐흐 몰라. 설명하기 애매해. 먹어보면 알아.”
대현은 그들의 대화에 혀를 차며 초밥 쿠션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머리를 받쳤다. 바로 앞에 윤아가 스케치 하는 손이 보였다. 손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우개로 지우고 그리고, 다시 지우는 걸 반복하다 멈칫했다. 대현은 윤아의 손끝으로 시작해 팔목, 팔을 넘어 가까스로 얼굴을 쳐다봤다. 윤아가 대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대현은 놀라서 눈을 굴렸다. 마땅히 어디다 시선을 둬야할 지 몰랐다. 윤아는 대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뭔가를 떠올린 듯 고개를 돌렸다.
“아, 맞다. 규동아, 정말 미안해. 나 때문에 걱정 많이 했지?”
“응? 무슨 일 있었어?”
“어라, 나 매번 새벽에 들어오는 거 알면서도 일부러 아무 말 안 한 거 아니었어? 너랑 외삼촌이 날 걱정했다고 대현이가 그랬는데.”
“정말? 만날 새벽에 들어왔어? 난 전혀 몰랐어.”
윤아는 대현의 말과 규동의 말이 다르자, 대현을 쳐다봤다. 대현은 어느새 자고 있었다. 윤아는 지그시 대현을 쳐다보다 옅게 웃었지만, 곧바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규동은 남몰래 주먹을 쥐며 윤아를 불렀다. 윤아가 고갤 돌려 규동을 쳐다보자, 규동은 다시금 주먹을 펼쳤다. 윤아를 위해 만든 게 있으니 가져오겠다며 부엌으로 갔다.
사라진 규동의 뒷모습을 보던 윤아는 팔을 베개로 삼아 대현의 옆에 나란히 엎드렸다. 대현의 머리카락이 대현의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
‘많이 피곤했던 걸까.’
윤아는 대현이 자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가지런한 눈썹과 오똑한 코, 매끈한 입술이 윤아를 설레게 했다. 윤아가 찾는 어릴 적 남자 아이의 얼굴과 대현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정말 날 모르는 걸까. 날 기억 못하는 걸까. 날 기억 못해? 날…….’
윤아는 대현의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 대현의 머리카락이 부드러웠다. 가슴 언저리가 간지러운 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대현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을 참이었다. 규동은 부엌에서 돌아와 그 모습을 목격했고, 대현은 눈을 떴다. 대현은 민망한 마음에 자는 척을 했는데, 눈을 뜨니 바로 앞에 윤아가 있었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대현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윤아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왜,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변태냐?”
“내, 내가 뭘! 그냥 많이 컸네, 라고 생각이 든 것뿐이거든.”
“대체 몇 번을 말해? 난 너에 대한 기억이 없다니까.”
“자꾸 그렇게만 부정하지 마. 네가 너무 똑같아서 내가 부정하기 싫단 말이야.”
윤아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슬며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윤아의 코와 대현의 코가 닿을 듯 했다.
“여태껏 6년 동안 기다려왔어. 아니,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내가 아무리 돌아다녀 봐도 찾지 못했던 아이가 드디어 내 앞에 있어.”
윤아는 더 이상 대현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탁자만 바라봤다. 그리고는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자꾸 네가 아니라고 하니까. 만약에, 정말 만약에 네가 아니라면…….”
윤아의 귓바퀴에 아이들의 말소리가 맴도는 것 같았다. 수많은 아이들의 목소리에 맞서 홀로 대면하고 있던 윤아의 모습, 그런 윤아가 눈을 감았을 때 떠올리는 기억 속의 남자 아이. 그리고 그 아이가 반죽을 하다말고 윤아에게 건네는 모습. 윤아는 반죽을 받으며 환하게 웃었지만 얼마 가지 못해 블랙 스크린이 내려졌다.
대현은 한숨을 쉬었다. 대현도 윤아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우는 여자를 보면 어떻게 달래야 할 지 몰랐다. 눈을 감은 윤아에게 천천히 손을 뻗었다가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자신의 후드 집업을 벗어 윤아에게 덮어 주고, 후드 집업의 모자로 윤아를 덮으려 할 때 멈칫했다. 윤아가 소리 없이 서럽게 울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현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단 표정을 지으며 모자를 덮었다. 이로써 윤아가 우는지 자는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대현은 테라스 입구에서 오도카니 서 있는 규동을 발견했다. 규동은 소파에 앉아 윤아를 쳐다봤다.
“윤아, 자?”
“내 알 바냐.”
대현은 애써 무심한 척 노트를 보았다.
“흠…….”
“며칠 제대로 못 잤다네.”
이번엔 턱을 괴었다.
“그래? 그럼 이거 어쩌지. 윤아를 위해서 만든 건데.”
대현은 규동이 우려낸 녹차를 턱 괸 채 쏘아보고는, 심술 난 표정을 지으며 혼자서 주전자 통째로 녹차를 벌컥 마셔댔다.
“야야야, 그거 윤아한테 줄 건데!”
“이 자식아, 임윤아는 무슨. 내 거나 안 만들어주고.”
한 동안 대현과 티격나던 규동은 이쯤에서 자자고 일어섰다. 대현이 윤아를 힐끔 쳐다보곤 규동에게 먼저 들어가서 자라고 말했다. 규동은 왜냐고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들 앞에서 다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규동은 빨리 자리를 비켜주고 싶었지만 쉽게 테라스를 빠져 나가지 못했다. 대현은 윤아를 흔들어 깨웠다. 윤아가 머뭇거리면서 일어났다.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대현이 그 이유를 물었다.
“부끄러워…….”
“뭐가?”
“네 앞에서 추한 모습 보여줘서…….”
“원래 추했어.”
“너무해.”
“찔보야 오늘은 휴일이니까 실컷 자.”
“찔보가 뭐야?”
“토 달지 마.”
윤아가 대현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그게 뭐냐구.”
“찌질이, 울보. 또 다시 내 앞에서 그런 모습 보여주면 계속 찔보라고 부를 줄 알아.”
“응!”
윤아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고 모자를 벗으며 환하게 웃었다. 알고 있었다. 대현이 데려다주면서 거짓말을 한 이유와 자신에게 후드 집업을 준 이유를.
그날, 윤아는 꿈을 꾸었다. 어린 윤아가 남자 아이 앞에서 울고 있었다. 남자 아이는 윤아에게 웃으면서 다독여 주었다.
‘찔보 울지 마. 내가 이거 줄게. 오늘은 더 달콤한 유자 맛!’
윤아는 훌쩍이며 마카롱을 받았다. 그 후로 전개는 없었다. 주변이 온통 새 하얗게 변해서 윤아도 남자 아이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