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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은 비명을 내지르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반신이 온통 땀으로 번들거렸다.
어둠 속에서 무겁게 퇴적된 공기가 지훈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지전대의 붉은 얼굴이 어둠 속에 섬처럼 떠 있었다. 꿈속인지 현실인지 인식할 수 없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이명이 귓가를 맴돌았다.
손바닥으로 한쪽 관자놀이를 세게 쳤다. 얼굴에서 차가운 땀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눈앞이 핑 돌면서 붉은 이미지 위로 더욱 짙은 어둠이 뒤덮였다.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조차 구분할 수 없는 끔찍한 어둠이었다.
잠시 후 시야가 조금씩 밝아지면서 이명은 사라졌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두 손을 모아 앞으로 쭉 뻗은 채 등을 활처럼 굽히며 기지개를 켰다. 곳곳에서 뚜둑거리며 소리가 났다. 몸이 내는 소리들. 현실의 소리들이 분명했다. 손과 발끝에서 따뜻하게 피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현실의 감각이 천천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찰칵.
야광 빛을 내는 오토 플립 시계가 테이블 위에서 밤 9시를 알렸다.
지훈은 플립 시계 옆으로 손을 더듬어 지포라이터와 담뱃갑을 찾았다.
다급히 불을 붙이고 담배 연기를 폐 속으로 한껏 집어넣었다. 길게 내뿜은 담배 연기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악몽이었다.
눈만 감으면 끈질기게 따라붙는 지독한 악몽.
두개골이 갈라지고, 뻥 뚫린 눈구멍에서 검은 핏물을 쏟는 지전대의 얼굴은 볼 때마다 경악스러웠다. 그래도 꿈속의 이미지가 견디기 쉬웠다.
실제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이 훨씬 무서웠다. 지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의식은 종종 일 년 전으로 돌아가곤 했다.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간 지전대의 기억은 지훈의 뇌리를 좀체 떠나지 않았다. 악몽에서 깨어나도 악몽은 계속되는 것이었다.
잭 다니엘 두 잔을 연거푸 마셨다. 원래는 온더록으로 시원하게 즐기는 걸 좋아했으나 지난 4개월간은 줄곧 스트레이트였다. 그것도 언제나 두 잔 연속이었다.
위스키의 불길이 가슴 밑바닥을 뜨겁게 데울 무렵 지훈은 다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베란다 창 앞에 서서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창 너머로 밤의 도시가 보였다. 발아래 펼쳐진 밤의 도시는 결코 어둡지 않았다. 낮보다도 훨씬 휘황찬란하고, 요란스러웠다. 두꺼운 창을 열고 베란다로 한 발 나서면 소음까지도 생생히 들릴 것이다.
불빛과 소음의 도시.
소름끼치도록 지긋지긋한 환락의 도시.
지난 5년간 이 도시는 지훈에게 칼부림과 사치, 속임수와 배신의 시간을 떠안겨줬다.
그 5년의 시간이 거품처럼 사라진 후에 지훈에게 남은 것은 위스키보다도 독한 환멸과 방황뿐이었다. 신념에 대한 환멸, 인간에 대한 환멸,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
환멸은 현실을 기저부터 파먹어갔고, 사람을 내면부터 파괴해갔다. 그리고 필연적인 변병처럼 방황이라는 딱지를 붙여줬다. 낮에는 방안에 틀어박혀 악몽에 떨고, 밤이 되면 환멸뿐인 밤의 도시 속을 끝없이 방황했다. 이것이 최근 일 년 간 지훈의 모습이었다.
자기 안에 남아 있는 기력을 소진하고만 싶었다. 내면을 모조리 쏟아내고 텅 빈 껍데기로만 남고 싶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고,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바라고자 5년을 송두리째 희생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모습을 바라고자 경찰이 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지훈에게는 애당초 명확한 신념이 있었다. 어떤 유혹과 장애물에도 흔들리지 않고, 좌절하지 않을 푸르고 단단했던 신념. 그 신념이 이끄는 대로 한 치의 의심 없이 경찰을 지원했던 것이다.
신념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임무를 수행하면서부터였다. 더 정확히는 지전대라는 인간의 내면을 가늠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지금은 본청 수사국장으로 있는 서한범 경무관의 제안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당시에는 계급도 경정이었고, 본청에서 수사 기획과 과장을 맡고 있어 서 과장으로 불렸다. 그와의 첫 만남은 지금까지도 지훈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반쯤 벗겨진 머리를 짧은 스포츠로 쳐올린 서 과장은 키가 크고 체격이 다부졌으며, 혼혈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목구비가 입체적인 중년 남자였다. 당시 나이는 40대 중반 쯤으로 보였는데 짐작일 뿐 지훈은 아직도 그의 나이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여름인데도 검은 양복차림에 외투까지 걸치고 한 손에 노란 서류봉투를 쥐고 있던 서 과장은 택시에서 내리는 지훈을 단번에 알아봤다.
“짐은 정문에 맡겨 두고 따라와.”
서 과장은 청사로 들어가지 않고 인근의 커피숍으로 지훈을 데려갔다. 촌스러운 다방 분위기의 커피숍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유지훈 경위. 나이 서른. 키 182센티미터. 몸무게 90킬로그램. 올 초에 경찰 간부 교육을 수료. 유도 공인 6단. 전국체전 금메달. 세계선수권 대회 국가대표 발탁. 간부 교육 기간 중에는 유도 조교로도 활동…….”
구석 자리에 앉아 지훈의 기록을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읊어가던 서 과장은 갑자기 기록지를 테이블 위에 탁 올려놓고는 커피 잔을 들었다.
“어때? 실력은 아직 쓸 만하나?”
“예?”
서 과장은 지훈을 빤히 쳐다보며 커피 잔을 홀짝였다.
“기량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도 틈나는 대로 수련하고 있습니다.”
“유도도 복싱만큼이나 실전에서 도움이 된다는데 사실이야?
“그렇습니다.”
“혼자서 몇 명까지 때려눕혀봤어?”
“예?”
“몇 대 몇까지 가능하냐고.”
“유도 대련은 언제나 일 대 일이었습니다.”
“대련 같은 거 말고 싸움 말이야. 실전.”
서 과장은 머리를 낮추고 팔을 치켜 올린 채 두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복싱 자세를 취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십칠 대 일로 싸워봤다느니 무기를 든 몇 명과 맨손으로 맞섰다느니 하는 실전 무용담. 자네 그런 거 없어? 최대 몇 명하고까지 싸워서 이겨봤어?”
서 과장은 주먹을 풀고는 다시 커피 잔을 들어 홀짝홀짝 마셨다. 재미난 이야기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눈빛을 반짝이며 지훈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지훈은 조금 당황했지만 자신이 경험했던 일 하나를 조금의 거짓이나 과장 없이 솔직하게 들려줬다.
“유도로 메달을 따던 대학 시절에 술집에서 난동을 피우는 남자 네 명과 싸웠던 적은 있습니다. 한참 혈기왕성하던 시절이라 시시비비를 채 가리기도 전에 주먹이 먼저…….”
“이겼어?”
“……한 명은 실신해서 바닥에 드러누웠고, 나머지 세 명과는 치고받는 도중에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애매한데. 겨우 네 명을 상대로…… 더 큰 싸움은 없었어?”
서 과장은 마치 지훈의 인생이 온갖 싸움으로 얼룩져 있기를 바라는 투였다.
“없었습니다. 대련이든 싸움이든 대부분 일 대 일이었습니다.”
“일 대 일은 다 이겼나?”
“승률은 높았습니다.”
“음…….”
서 과장은 빈 커피 잔을 아쉬운 듯 내려놓고 지훈의 기록지를 다시 들여다봤다.
“친구들하고는 자주 만나나?”
“친구 말입니까?”
“그래 친구. 초등학교 친구, 중학교 친구, 고등학교 친구. 경찰 동기 친구들 등등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허물없고 지긋지긋한 친구들 말이야. 자주 만나고 어울리는 편인가?”
“자주 만나는 친구는 많지 않습니다.”
“아예 없는 건 아니고……?”
지훈이 얼른 대답하지 못하자 서 과장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자네 성격이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편이라고 되어 있어서 말이야. 이러면 친구가 붙기 힘들겠다 싶어서 물어본 거야. 그렇다고 친구가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
서 과장은 시선을 내리 깔고 지훈의 기록들을 휙휙 넘기더니 더 볼일 없다는 듯 통째로 서류 봉투에 넣었다.
“좋아. 유지훈 경위. 지금부터 함께 일하는 거야.”
서 과장이 손을 내밀었다. 지훈은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손을 맞잡았다. 서 과장은 일부러 손에 힘을 주고 있었는데 그의 악력은 생각보다 셌다.
“자네 지금부터 과거와는 완전히 줄을 끊어야 해. 친구나 친척과도 가급적 이유를 대서 만나지 마. 그렇다고 그들이 수상하게 여기도록 행동해서도 안 돼. 오전까지 몸담고 있던 서쪽 사람들과도 인연을 끊어. 뭐 그 사람들이야 안지가 얼마 안 됐으니 그러기가 쉽겠지.”
서 과장의 입에서 줄줄이 쏟아지는 주의 사항이란 대부분 지훈이 짐작하고 있던 것이었다.
본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머리를 굴리며 예상했던 일들이 지훈에게 현실로 도래했다. 서 과장과 함께 할 일이란 것은 지훈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해왔던 ‘비밀 임무’라는 것이었다. 그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에 지훈은 운명적이라 할 만큼 최적화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 부재. 형제 무. 미혼. 초임. 수료 성적 우수. 유도 유단자. 내성적 성격.
서 과장이 특별히 자신을 지목해서 차출 공문을 하달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전대는 전과 9범의 조직 폭력배 수장으로 현재도 폭력과 살인, 살인미수, 살인교사, 협박 등 수많은 혐의로 수사가 진행 중이야. 하지만 증거나 증인을 교묘하게 제거하고 있어 좀처럼 검거가 안 되고 있어.”
아직 순환 근무도 끝나지 않았던 시절의 지훈에게 지전대는 경찰로서 마땅히 격멸시켜야만 할 악의 표상이었다. 가슴에 뿌리박힌 단단한 신념에 의거해 지훈은 서 과장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지훈은 서 과장과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전대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경찰의 스파이가 되는 것이었다. 시작은 오히려 쉬웠다. 서 과장이 사전에 손을 써 놨기에 지훈은 시나리오대로만 움직이면 됐다.
“이권 다툼이 시작됐어. 신생 조직들이 연합해서 지전대의 영업장들을 노리는 중이야. 전대파에서 대대적으로 애들을 모으고 있으니 지금이 기회야.”
서 과장은 전대파와 연결이 닿는 정보원을 통해 지훈을 대졸 엘리트 건달로 데뷔시켰다.
지훈의 활약은 눈부셨다. 깡패들끼리의 싸움이었기에 지훈은 거리낌 없이 전투에 임했고, 신생 조직들을 초토화시켰다. 지훈의 활약상은 단번에 지전대의 귀에까지 흘러들었다.
뿐만 아니라 비상한 머리를 가동시켜 조직의 앞날을 예측하기까지 했다. 특히 거래 현장을 급습하려던 경찰들보다 한 발 앞서 지전대를 구해낸 전과는 지훈에 대한 지전대의 신뢰를 확고히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지훈의 모든 활약상은 서 과장과 사전에 약속한 대로 움직인 결과였다. 서 과장이 짜 놓은 각본대로 움직이다보니 조직에 공을 세우고, 지전대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훈은 파죽지세로 중간보스로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당장 지전대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잔챙이 건들에 불과해. 우리 목표는 전대파라는 뿌리 깊은 범죄 조직의 궤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간 보스들을 먼저 격파하고, 마지막에 꼼짝달싹 할 수 없는 혐의를 씌워 놈의 목줄을 끊는 거야.”
서 과장은 빠른 시일 안에 전대파의 중간 보스들을 몰아내고 지훈이 그 자리를 차지하길 바랐다.
“네가 지전대의 오른손이 되어야만 다음 작전의 실행이 가능해.”
몇 번의 시행착오와 예측불허의 변수들도 있었지만 서 과장이 짜 놓은 시나리오의 큰 줄기를 바꾸지는 못했다. 지훈은 착실하게 지전대의 신임을 쌓으며 조직의 중책을 맡아갔다.
“급할 건 없어. 놈이 완전히 널 믿고 방심할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준비가 완벽히 끝났을 때 핵폭탄을 터뜨리듯 한 방에 초토화 시키는 거야. 마지막 순간에 설사 네 신분이 들통 나더라도 놈들이 어찌할 수 없도록 한 번에 몰아쳐서 놈들을 괴멸시켜야 해.”
시간이 갈수록 지훈은 자신감을 잃어갔다. 말단 조직원으로 일하며 깡패들과 치고받고 싸울 때는 겁도 고민도 없었다. 가슴 한 구석에 불안이 차오르고 신념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위치가 오르고 지전대와의 관계가 돈독해 진 이후였다.
서 과장이 말한 ‘준비’가 완벽해지면 완벽해질수록 지훈의 마음은 흔들렸다. 최후의 작전이 다가올수록 지훈의 내적 갈등은 깊어졌다.
“아직은 시기상조입니다.”
지훈은 최후의 작전을 자꾸만 보류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