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연경이 올려다 본 곳에는 택시 한 대가 서있었다.
버스정류장에 서있던 택시에선 ‘빈 차’ 라는 글자가 띄워져 있었다.
연경은 갑자기 등장한 택시를 그저 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운전석 쪽 창문이 내려왔고 운전석에 앉아있던 택시기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택시기사는 연경을 보며 말했다.
“학생, 어느 대학?”
“네..?”
“위치만 제대로 알려준다면 건물 앞에서도 내려드림”
택시기사의 말에 연경은 버스배차시간표와 현재 시각, 그리고 택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가방을 챙겨 택시의 뒷 자석 문을 열고 탑승했다.
연경은 목적지를 말한 뒤 가방에서 리포트용지와 볼펜을 꺼냈다. 그리고는 무릎에 가방을 올려두고 그 위에서 리포트를 쓰기 시작했다. 곧 광란의 질주가 펼쳐질 줄 모르던 연경은 볼펜으로 빠르게 글자를 적어나갔다.
평일 아침, 지각한 학생의 상황을 자신이 처한 상황처럼 받아들인 택시기사는 레이서정신으로 도로를 달렸다. 제한속도는 넘지 않았지만 잦은 급정거와 차선 변경, 그리고 과속 방지턱을 지날 때마다 택시 안은 덜컹거렸다.
그때마다 리포트를 써내려가던 볼펜은 자꾸만 리포트에 획을 그으며 그 존재감을 나타냈고, 수정펜도 없던 연경은 그 자국들을 애써 무시하며 계속 적어나갔다. 뿐만 아니라 택시 안의 크고 작은 진동은 그대로 글자에 반영되었다.
한 페이지를 채워 다음 페이지로 넘기기 전, 연경은 지금까지 적었던 것을 살펴보았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연경은 조심스럽게 기사님께 말했다.
“기사님, 저 같은 상황에 처한 학생을 태우신 게 한 두 번이 아니신가 봐요... 굉..장히 빠르시네요... 그런데 조금만 안전운전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 그래도 지각은 하면 안 되는데... 그치만 지금은 너무...흔들려서 리포트를...”
“원래 이 근처엔 과속방지턱이 많아.”
“네...”
“그리고 일단 빨리 도착해야 남은 시간에 리포트를 쓰든, 아니면 수업에 들어가든.. 그걸 선택 할 수 있는 기회라도 있는 거야. 늦으면 리포트고 뭐고 없어.”
“맞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정말 한 두 번이 아니신가 보네요.. 전 기사님만 믿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연경은 다시 고개를 숙여 리포트를 쓰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택시 안은 한 번 더 덜컹거렸다.
.
연경이 리포트를 쓴다고 몰두해 있을 동안 택시는 대학 후문을 지나 캠퍼스 안으로 들어왔고, 잠시 후 연경이 말했던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택시기사의 도착했다는 말과 동시에 기적적으로 리포트 작성을 끝마친 연경은 시간을 확인하였다.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한 것을 확인한 연경은 이게 다 택시기사의 능숙한 운전 실력과 오랜 경험 덕이라며 감탄했다.
기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하며 요금을 지불했고, 그리고는 택시에서 내려 건물 안까지 부리나케 뛰어갔다.
건물 안은 고요한 적막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적막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던 연경은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시각은 9시 10분.
늦게 일어난 것 치고는 빨리 도착한 편이었지만 지각인 것은 분명했다.
연경은 침을 삼키며 실험실로 걸음을 옮겼다.
연경의 등에선 땀이 맺히고 있었다.
한창 수업중인 실험실로 다가가자 조교의 목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연경은 최대한 조용히 실험실로 들어가기 위해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러나 최대한 조심하더라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 수밖에 없었고, 고요한 가운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실험실 안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문을 열고 있던 연경을 바라보았다.
연경은 머쓱한 듯 웃었고,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를 하며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금세 분위기는 다시 진지해져 다들 조교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실험에 관한 설명은 끝이 났다.
실험실 안의 사람들은 실험 준비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경도 준비를 위해 실험실 앞 스크린에 떠있는 화면을 보고 있었을 때 조교는 연경을 보며 말했다.
“아까 들어온 학생, 리포트는? 설마 안 가져왔다거나 없는 건 아니지?”
“아, 저.. 리포트 여기 있습니다.”
연경은 재빨리 가방에서 리포트를 꺼내어 조교에게 가져갔다. 조교는 연경이 건네주는 리포트를 받아들고는 안의 내용을 살펴보았고,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반응에 연경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지진 났었니? 글자가 날아다니네. 읽을 수는 있게 적어놔야 나중에 채점을 하는데.. 그래도 그런 극한상황에서 리포트를 완성하려 했다니, 수고했다.”
몇몇 사람들은 조교의 말에 웃었고, 연경은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연경은 들어가 보라는 조교의 제스쳐에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고, 서둘러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로 돌아오니 같은 조의 민형은 재밌다는 표정으로 연경을 보고 있었다. 연경은 그런 민형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스크린 화면을 확인했고, 민형은 연경을 보며 말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 했네ㅋㅋㅋ 하긴, 그렇지. 지각에, 리포트를 제대로 쓸 시간도 없는데 화장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
눈치 없이 큰 소리로 떠드는 민형에게 연경은 이를 악물고는 주먹을 쥐어 보였다.
“얼씨구, 치겠다?ㅋㅋㅋ 어제 2차까지 간 사람들보다 늦을 줄은 진짜 몰랐는데ㅋㅋㅋ”
끊임없이 시비를 거는 민형과 거기에 발끈하는 연경을 바라보던 다른 조원은 둘을 번갈아 보다가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둘을 보며 말했다.
“야, 그런데 오늘 뭐하는 실험이야..?”
...
..
.
험난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실험을 마친 연경은 함께 다니는 같은 과 동기들과 점심을 먹었다. 다음 강의가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남았던 연경은 오늘 아침에 세영에게 다시 연락을 준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리고는 폰을 꺼내어 세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전화 가능해? 난 지금 공강인데 가능하면 답장 좀.]
문자를 보내자 세영에게서 금방 답장이 왔다.
[나도 지금 공강이야! 다음 강의가 5관이어서 거기로 갈 것 같은데 그 근처면 한 번 보자!!]
마침 연경은 5관 근처에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야외쉼터에서 보자고 답장을 보냈다.
무리에서 벗어나 쉼터로 간 연경은 세영이 올 때까지 벤치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연경은 멀리서 걸어가는 한 남자를 보게 된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연경은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내려 했다. 그러나 자세히 기억이 안나 연경은 그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연경은 곧 그 남자가 어제 밤 자신이 취해있을 적에 봤던 사진 속의 남자라는 걸 기억해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던 탓에 어젯밤 일을 완전히 잊어버렸던 연경은 꿈처럼 희미해진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려 했다.
거울, 사진, 다른 방, 책, 시계...
퍼즐처럼 조각조각 흩어진 단편적인 기억에 연경은 혼란스러워했다.
어젯밤 일을 기억해내기도 전에 그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지려 하자 연경은 다급함에 몸을 일으켰다.
그 때 뒤에서 깜짝 놀란 듯한 세영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에 연경은 뒤돌아봤다.
한 발짝 멀리 떨어진 곳에 세영이 서 있었다.
세영은 양손에 컵 1잔씩을 들고 있었지만 급하게 움직였는지 컵 속의 음료가 넘쳐 손을 적시고 있었다.
연경이 사과하면서 급하게 가방을 뒤지자 세영은 그런 연경을 진정시키듯 말했다.
"진정해.. 이거 아이스티야. 뜨거운 거 아니니까 괜찮아."
그럼에도 연경은 세영을 자기 옆자리에 앉히고는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냈다. 연경은 양손에 컵을 들고 있는 세영의 손을 닦아주었고, 세영은 그런 연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을 묻은 아이스티를 거의 닦아준 연경은 물티슈를 여러 장 뽑아 세영의 한쪽 손에 걸쳐두고는 말했다.
“옷에 묻은 건 그걸로 닦아.”
세영은 웃으며 반대쪽 손에 들고있는 컵을 연경에게 건넸다.
“자, 여기 네꺼.. 의도치 않게 양은 절반이 되어버렸지만..”
뭔가 허전한 음료의 양을 보면서 둘은 웃었다.
그제야 안도한 연경은 고맙다고 말하며 아이스티를 받아들었다.
세영은 연경에게서 받은 물티슈로 옷을 닦으며 말했다.
“그런데 아까 뭘 보고 그렇게 놀랐던 거야? 이상한 거라도 봤어?”
그 말을 들은 연경은 뒤늦게 아까 봤던 남자를 찾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대답이 없는 연경의 모습에 세영이 물티슈는 잠시 옆에 내려놓고서 연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연경은 말의 주제를 바꾸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냐!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전화는 왜 했던 거야?”
잠시 뜸을 들이던 세영은 손 안의 반만 남은 아이스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음.. 그냥... 그러고 보니 너 오늘 지각했었지? 급하게 왔을 모습이 안 봐도 눈에 훤하다..”
웃음기 있는 목소리로 말하던 세영은 고개를 들어 연경을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부터 고생한 기념으로 내가 저녁 맛있는 거 사줄게. 오늘은 좀 피곤해 보이는데 내일 시간 괜찮아?”
그렇게 말한 세영은 활짝 웃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