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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나? 체리나!”
체리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안경을 쓴 한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체리나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식은땀이 고였다. 마치 악몽을 꾼 것 같았다.
남자가 체리나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체리나는 받은 손수건으로 얼굴에 고인 식은땀을 닦아냈다.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응?”
여기가 어디지. 지금 뭐를 하고 있었지. 체리나가 주변을 살폈다.
“너 요즘 되게 멍하더라. 정신 좀 차려라.”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있는 책상과 의자. 방의 가장 앞에는 교수가 자주 사용하는 강의용 물품들이 보였다.
이곳은 체리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곳이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랐다. 왠지 모를 괴리함이 느껴졌다. 체리나는 양손으로 자신의 볼을 세게 쳤다.
“어제 잠은 제대로 잤어? 또 연구를 하느라 밤을 샌 건 아니지?”
“괜찮은 거 같아.”
아마도, 라고 체리나는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항상 괜찮다고 말은 하지.”
웰리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체리나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지금 뭐하는 거야?”
말과 행동이 체리나의 생각보다 앞섰다. 체리나는 웰리스의 손을 옆으로 치운 뒤 후회했다. 웰리스가 잘못한 건 아무 것도 없는데. 괜히 날카롭게 반응했다.
“뭐하긴. 너 걱정해주는 거다.”
다행히 웰리스는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 웰리스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웰리스의 손길에 체리나는 안심했다.
웰리스 그레이프. 그는 체리나의 소꿉친구이자 아카데미의 학생 대표를 맡고 있었다. 안경과 더불어 고동색의 눈동자가 그를 차분하고 지적인 남자처럼 보이게 했다.
웰리스는 항상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정리를 했다. 아카데미의 제복도 허투루 입는 적이 없었다. 하루쯤은 귀찮을 법도 한데. 그는 항상 남들이 잘 챙기지 않는 넥타이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었다.
체리나는 웰리스의 지적인 이미지 덕분에 그가 학생 대표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던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웰리스의 장점이 그것뿐만이 아니란 것을 체리나는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웰리스는 체리나처럼 밖에서 만들어서 가문에 들어온 아이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혈통의 직렬을 중요시 하는 그레이프가의 서자. 웰리스가 가문에서 받는 취급은 체리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웰리스와 체리나가 친해지는 건 시간의 문제였다. 화려한 파티장의 어두운 구석에서 만났던 그 순간부터 그들은 단짝이 되었다.
체리나와 웰리스는 서로에게 숨기고 있는 건 없었다.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사소한 비밀이라도 서로에게는 전부 이야기했다. 적어도 체리나는 그랬다.
“오늘은 또 왜 그렇게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건가요, 체리나 블로섬양? 요즘은 시험도 끝나서 스트레스가 많이 쌓일 일도 없잖아.”
“내가 언제 가라앉아 있었다고 그래.”
“이번에 본 시험 성적이 나왔다고 하던데. 아직 안 봤지?”
“내가 벌써 확인했을 거 같아?”
“당연히 아니지. 그래서 너 일어나는 거 기다리고 있었어. 같이 보러 갈래?”
체리나는 웰리스가 건네는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웰리스는 체리나의 옆에서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저런 이야깃거리를 꺼내며 계속해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체리나가 웰리스의 말을 끊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그의 말을 끝까지 듣고 싶었다.
체리나는 웰리스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그가 안내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랬는데 알고 보니 그 서류는 고전 문학 담당 교수가 처리해야 되는 거였어. 처음부터 알았다면 그대로 뒀을 텐데. 그걸 내가 왜 대신 처리한 건지.”
“혹시 지금 나한테 너 똑똑하다고 자랑하는 건 아니지?”
“자랑? 내가 너한테?”
“교수가 해야 되는 서류를 일개 학생이 해결한 것부터가 대단한 거 아니야? 학생 대표가 됐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건 알았다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나라면 그냥 버려뒀을 거야.”
웰리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잠시 동안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내 소꿉친구가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었다니. 거기에 성격도 엄청 상냥하잖아? 남의 일을 대신해줄 정도니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웰리스는 체리나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거란 걸 알았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똑똑한 사람이라니. 블로섬가의 체리나 아가씨가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어떻게 받아드려야 되냐?”
“내가 너한테 거짓말 하는 거 한 번이라도 봤어? 내 말은 그냥 순순히 받아드리면 돼.”
“말이라도 못하면.”
웰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공부 안 했다더니. 너 이번에도 시험 잘 본 거 같더라?”
“그냥 그렇게 본 거 같은데. 이번에는 공부에 집중할 여력이 없었어.”
“아, 저런 아카데미 1등의 뻔한 거짓말.”
웰리스가 체리나를 데리고 온 곳에는 모든 학생의 성적이 벽보로 붙어 있었다. 이제 슬슬 저녁을 먹을 시간대가 됐기 때문일까. 성적을 보려고 모여 있는 학생들이 적었다.
“네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동안 거의 대부분이 확인했을 거야.”
체리나 블로섬. 웰리스 그레이프. 그들의 이름을 찾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제국 아카데미는 성적이 높은 순으로 배열을 하니까. 체리나는 자신의 성적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뭐, 나쁘지 않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체리나는 가장 높은 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체리나 블로섬, 학점 A+. 예외가 되는 과목은 하나도 없었다.
답변을 제대로 쓰지 못한 과목도 있던 거 같은데. 생각보다 성적을 잘 받았다. 다른 학생들도 이번에는 시험 준비를 덜 한 걸까. 만족스러운 성적에 체리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우와, 저 재수 없는 표정. 왜 너는 그 표정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보이냐.”
웰리스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체리나는 그런 그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웰리스는 생각보다 성적이 나오지 않았는지 성적을 확인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심각하면. 체리나가 웰리스의 이름을 찾았다. 열 손가락 안에는 꼽히지만 평소의 웰리스가 받던 성적보다는 낮았다.
위로, 해줘야 되나? 체리나는 아주 잠시 고민했다.
“너 이번에 공부 하나도 안 했어?”
“학생 대표가 해결해야 되는 게 생각보다 많아서. 아무래도 저번보다는 준비를 덜 하긴 했지.”
“너한테 성적이 중요한 거 아니었어?”
“아, 이러다가 장학금 지원까지 끊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집으로 돌아가야 되겠지? 그 지옥에 돌아가야겠지? 거기에 형님까지 만나면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웰리스는 그레이프가의 고풍스러운 저택을 상상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그거는 나도 싫어.”
“역시 나를 걱정해주는 건 너밖에 없구나.”
“네가 아카데미에서 나가면 나는 누구랑 밥을 먹어야 되는 건데. 입을 열면 아부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애들이랑 밥을 먹으라고? 밥 먹다가 체하겠다.”
“나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식사를 걱정한 거였어? 내 걱정은!”
“덤으로 해줄게.”
체리나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웰리스를 바라봤다.
웰리스는 체리나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다.
“장난인 거 알지?”
“알아.”
웰리스는 버릇처럼 체리나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체리나는 사람들이 많은 장소가 불편했다. 누가 뭐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녀는 자꾸 사람들의 시선을 살피는 버릇이 있었다.
체리나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줄 아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속마음이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안녕하셨나요? 체리나 블로섬양.”
지금처럼.
체리나에게 말을 걸어온 건 허리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긴 곱슬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어딘가 익숙했지만, 결국 체리나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웰리스는 여자들끼리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피하려 했다. 체리나가 뒤로 몸을 살짝 빼는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웰리스와 체리나의 시선이 만났다. 체리나는 가지 말란 의미를 담아 고개를 저었다.
“요즘 아카데미 생활은 어떠신가요?”
“……언제나 비슷합니다.”
체리나가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이름을 알지 못하기에 그녀에게 안부를 물어볼 순 없었다.
“역시 블로섬의 영애는 대단하시네요. 언제나 최고 점수라니. 어떻게 공부를 하면 그렇게 좋은 성적을 받으실 수 있는 건가요? 혹시 어디서 실력 좋은 사람에게 따로 교육을 받고 있는 건 아니죠?”
그렇게 말한 곱슬머리의 여자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곱슬머리를 한 여자는 한동안 체리나의 성적을 칭찬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계속 체리나의 눈을 향했다.
‘너는 그 눈이 있어서 잘 본 거야.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사실은 더러운 혈통을 타고난 주제에.’
실제로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와 겹쳐서 무언가 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건 들리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럴 때면 눈앞이 어지러웠다. 말하는 사람의 모습이 두 명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 중 흐릿하게 보이는 인형은 체리나의 귓가에만 들리는 말과 입모양이 일치했다.
이런 체리나의 좋지 않은 상태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웰리스였다.
“죄송합니다, 영애. 사실 제가 체리나양, 그러니까 체리나 블로섬양과 먼저 약속을 잡았습니다. 체리나양과 대화를 나누고 싶으면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웰리스가 체리나를 자신의 등 뒤쪽으로 보내며 말했다. 체리나의 시야에는 웰리스의 등만 들어왔다.
아무 것도 없는 평범한 등일 뿐인데. 정말 이상했다. 체리나는 웰리스의 등 뒤에 서 있을 때만큼은 눈 때문에 어지러운 일이 생기지 않았다.
“오랜만에 체리나 블로섬양을 만나서 인사를 하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그러셨군요. 역시 블로섬 가문의 영애는 다른 것 같습니다. 이렇게까지 예의가 바르시다니.”
아아, 웰리스의 웃으면서 비꼬기가 시작되었구나. 저 여자의 어느 부분이 웰리스의 신경을 거슬렸던 것일까.
대체적으로 온순한 웰리스가 남을 비꼬는 건 그만큼 화가 많이 난 거였다. 이때 괜히 건들면 괜한 불똥이 체리나에게 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체리나는 굳이 앞으로 나가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웰리스님. 제, 제가 블로섬 가문에 속한 걸 알고 계셨나요?”
곱슬머리의 여자가 말을 더듬어가며 대답했다.
“블로섬가의 방계 쪽에 아름다운 영애가 한 분 계신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애는 영리해서 최근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을 했단 소문도 들었죠. 직계인 체리나에게 따로 인사를 올리러 올 정도로 예의가 바르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만.”
왜 저렇게 뻔히 보이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까.
“웰리스님의 칭찬을 받다니.”
양볼을 손으로 감싸고 부끄러워하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곱슬머리의 여자는 웰리스가 하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모두 기뻐했다.
아카데미 선배에 대한 동경심? 아무리 생각해도 동경심에서 멀었다. 저건 웰리스에게 따로 흑심을 품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좋겠네, 웰리스. 인기 많아서?”
체리나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를 들은 건 그녀의 바로 앞에 있던 웰리스 정도였다. 웰리스는 난감하단 표정을 지었다.
“영애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아까 말했던 것처럼 체리나양과 선약이 있어서 이쯤해야 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말을 끝낸 웰리스는 가차 없이 뒤를 돌아 체리나를 바라봤다. 그는 허리를 숙여 체리나에게 오른손을 건넸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체리나양. 이제 당신의 시간을 제게 나눠주실 수 있겠습니까?”
성적을 확인하려는 목적을 달성한 이상, 불편한 곳에 계속 있을 필요는 없었다. 아까처럼 말을 거는 사람이 생기면 곤란하기만 하고.
“잠깐이라면 괜찮겠죠.”
체리나는 웰리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녀는 웰리스와 함께, 둘만 있을 수 있는 조용한 장소로 자리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