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체리나가 멍하니 웰리스를 바라보았다. 웰리스는 체리나의 손을 좀 더 세게 잡았다. 그는 뭔가 체리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체리나는 웰리스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아파.”
체리나의 작은 목소리에 웰리스가 손에서 힘을 뺐다. 웰리스가 잡았던 부분이 붉게 부어올랐다.
“미안.”
“뭐, 이 정도를 가지고. 괜찮아.”
“정말, 미안.”
내가 괜히 당황스럽게 만들었냐, 하고 웰리스가 물었다.
“솔직한 대답을 원해, 아니면 형식적인 대답을 원해?”
체리나와 웰리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 모두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웰리스가 대답했다.
“솔직한 대답.”
“응, 조금 많이. 나도 아픈 건 좀 싫어서.”
“진짜, 미안해. 그래도 나는 네가 걱정이 돼서…….”
웰리스가 잠시 뜸을 들였다.
“너한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뭐든지 도와줄게. 진심이야.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웰리스의 말 한 마디는 체리나에게 선선한 봄바람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커져서 결국 체리나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거구나. 체리나는 웰리스가 해준 말 한마디로 충분했다. 그 이상은 받지 않아도 좋았다.
“그 말을 해주는 거로도 충분해. 고마워.”
체리나는 끝까지 웰리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웰리스가 하는 말은 그만큼 체리나에게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체리나는 자신의 사소한 문제로 웰리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만약 웰리스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그에게 찾아올 피해는 어떻게 책임을 질 거야? 체리나는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웰리스는 마치 조용한 체리나의 반응을 예상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체리나의 묵묵한 반응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체리나가 웰리스를 올려다봤다.
“이대로 흘러가면 결국 너는 평생 동안 블로섬 가문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벗어나기는커녕 점점 더 얽히고설키게 되겠지.”
“정말로 그렇게 될지도 몰라서 무섭다, 진짜.”
“그곳은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가기 힘든 늪이야.”
웰리스의 말이 옳았다. 아무리 체리나가 웰리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고 해도. 어쩌면 체리나에게 이만큼 좋은 기회를 다시 잡을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웰리스는 그 부분을 특히 강조했다.
“설마 너 블로섬 가문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체리나는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기 힘들었다. 웰리스의 질문에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거도 아니면 뭐야. 단순히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나 못 믿어?”
“내 유일한 친구가 넌데. 너도 못 믿으면 나는 누구를 믿으라고.”
웰리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 옛날부터 쓸데없는 고민을 많이 했으니까. 또 무슨 나한테 피해가 가고, 나한테 도움만 받고 살 순 없다. 뭐 대충 이런 생각하고 있는 거지?”
웰리스는 체리나의 생각을 정확히 짚었다. 그러나 체리나는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넌 왜 그런 쓸모없는 고민만 하냐. 잘 생각해봐.”
웰리스가 체리나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위드 블로섬이랑 약혼을 하면 어떻게 되겠어. 결국 결혼하겠지. 그놈이랑 지내는 생활이 즐거울 거 같아?”
사교계의 평판은 그대로 믿을 것이 못 됐다. 그것만 믿어도 된다고 하면 체리나는 지금까지 자신을 정성껏 돌봐준 새어머니에게 반항하는 배은망덕한 여자가 되니까.
하지만 위드 블로섬에 대한 소문은 진짜였다. 소문으로 들었던 것들 중에 몇 가지는 체리나나 웰리스가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어쩌면 그게 모두 위드 블로섬이 의도한 것 일수도 있었다. 블로섬 가문의 감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럴 확률은 매우 희박하지만, 체리나는 후자에 모든 걸 걸고 있었다.
“위드 블로섬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살고 있는지 남인 우리가 알 수 없어.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신한다.”
웰리스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나는 적어도 널 괴롭게 하진 않을 거야. 위드 블로섬보다 내가 너를 더 잘 챙겨줄 자신 있어.”
체리나에게 웰리스와 지내는 시간이 괴로울 리가 없었다. 오히려 행복할 것이란 예상이 됐다. 어쩌면 웰리스와 함께 다른 걱정 없이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나라고 이상한 여자가 안 걸릴 거 같아? 지금이야 학생이니까 자유롭게 놔주고 있는 거지, 분명 아카데미 졸업을 하자마자 식장으로 끌려갈 걸? 이건 내기해도 좋아.”
웰리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방금 전에 너를 위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처럼 말을 했지만 사실 이건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해. 생판 모르는 여자랑 결혼을 하라고? 절대 싫다.”
“그건 나도 싫지만.”
귀족이라면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 가문 내에서 발언권이 거의 없는 서자라면 더욱 그랬다.
화류계에서 일하던 어머니를 둔 체리나보다는 나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만, 웰리스의 상황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너는 내 성격 잘 알잖아.”
“잘 알지.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
웰리스의 원래 성격이 어찌됐던 간에. 그래도 웰리스의 외부적인 이미지는 좋았다. 싫어하는 일을 하면서도 싫은 내색을 한 번 하는 일이 없었다.
힘들어 보이는 여성이 있으면 신사적으로 다가가 도왔다. 웰리스는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일 없이 항상 일정한 모습을 보였다. 모두에게 공정한 학생회장. 딱 그런 이미지였다.
저러면 나쁜 조건의 여자를 만날 것 같지는 않은데. 체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성격만 잘 숨기면 될 거 같은데?”
“잘 숨겨서. 그러면 평생 연기를 하면서 살라고?”
무슨 집에서 스트레스로 죽을 일 있냐, 하고 웰리스가 말을 덧붙였다.
“그냥 나랑 지금 당장 결혼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너랑 나 모두를 위해 잠시 약혼을 하자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웰리스의 말을 들으면서 체리나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녀는 고민 끝에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나는.”
“됐어, 대답하지 않아도 돼. 지금 네 표정 보니까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겠다.”
웰리스가 체리나의 말을 끊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책을 들어 원래의 자리로 옮겼다.
뒤를 돌아 있어서 체리나는 웰리스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웰리스는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카데미 개설 이래 최고의 영재 소리를 듣고 있는 체리나 블로섬양은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 거냐?”
“글세. 어떻게 하면 좋을지 확신이 서질 않네.”
“힘들겠지만 해결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
아까 내가 말한 방법도 있고, 라고 웰리스가 말을 덧붙였다. 웰리스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네 말대로 이번 기회에 블로섬 가문이랑 남이 되는 건데.”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으시다?”
“뭐, 그렇지.”
아무리 블로섬 가문이 싫다고 해도. 체리나가 블로섬 가문에 속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여자의 몸으로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게 된 것도 그중 하나였다.
언젠가 반드시 블로섬 가문에서 벗어날 것이다. 다만 아직은 그 시기가 아니었다. 체리나는 블로섬 가문에 남아 있을 수 있으면서도 약혼을 피할 방법이 필요했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을 가문에 밝히는 건?”
웰리스가 소파에 앉으며 말을 꺼냈다.
“나는 겨우 그런 망나니와 엮어지는 게 아까울 정도로 능력이 좋다. 그걸 보여주는 건 어떤데?”
“그러면 더욱 블로섬 가문과 엮기 위해 약혼을 강행하겠지. 뭔지 모를 눈 하나가지고 이 난리인데 능력까지 있어봐.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도 싫어.”
체리나는 블로섬 가문의 반응을 상상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되면 위드 블로섬이 아니라 가문에서 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과 결혼을 시킬 거야. 정말 생각만 해도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럼 너도 그 자식처럼 망나니짓을 하는 건?”
“소용없겠지. 더구나 이제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잖아.”
웰리스와 대화를 이어나갈수록 체리나의 한숨만 늘었다. 그가 말하는 건 모두 기각했다. 그러면 정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가. 체리나는 애꿎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쳤다.
“블로섬 가문에서 너를 위드 블로섬과 약혼시키려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아까 말했잖아. 나를 블로섬 가문에 묶어놓으려고.”
“그래, 그 이유. 그거 말인데.”
웰리스가 체리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체리나가 다가가자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굳이 그 망나니랑 해야 되는 거야?”
“그건 아닐 거야.”
블로섬 가문에 속한 남자라면 아무나 괜찮겠지. 체리나가 중얼거리자 웰리스는 자신의 턱 아래를 간질였다.
웰리스는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이내 말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은 없어? 너랑 약혼을 하고 적어도 몇 년 안에 약혼을 깰 거 같은 사람.”
“아예 없진 않은데.”
“차라리 그 사람이랑 약혼하고 싶다고 하는 건 어때?”
말도 안 되는 소리! 체리나가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블루섬 가문에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남자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체리나는 그들과 약혼를 할 바에야 위드 블로섬과 하는 게 조금 더 나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왜 그래? 다른 사람들한테도 뭔가 문제가 있어?”
문제가 없을 리가 없었다.
“그 조건에 가장 맞는 사람이 테드 블로섬이야.”
“테드 블로섬이라면 결혼까지 가도 나쁘지 않을 정도인데? 평판도 좋고…….”
말을 하던 웰리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테드 블로섬, 그는 예뻐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체리나의 배다른 남동생이었다.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지금은 그냥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길 바랄 뿐이지.”
“아, 미안.”
웰리스가 체리나에게 잘못한 건 없었다. 하지만 체리나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고 있다고 느끼는 것인지 웰리스는 계속해서 사과했다.
“가문에서 불렀다며. 결국 갈 거야?”
“가야지. 여기에 앉아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체리나는 약혼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꺼냈을 때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 대책을 생각해낸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마치 커다란 장난을 치기 직전의 어린 아이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너 뭔가 생각해냈구나.”
“글쎄?”
체리나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웰리스는 잠시 자신의 턱 아래를 간질이더니 자신도 모르겠단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난 모르겠다. 천재의 속을 일반 사람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범재니까 알 수도 있지.”
“네가 천재라는 말은 부정하지도 않지? 하여튼 말로는 한 마디도 안 져요.”
체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 뒷부분을 정리했다.
더 있다가 가지 왜 이렇게 급하게 가, 하고 웰리스가 물었다. 체리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웰리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여기에 더 오래 있다가 어떤 소문이 생겨날지 모르기 때문에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학생회장님. 블로섬 가문은 생각보다 그런 부분을 잘 지키니까요.”
“……그런 곳의 가장 높다는 사람이 외부에서 애를 얻어오고?”
“뭐, 그건 어쩔 수 없죠.”
여기서 웰리스와 함께 투덜거려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역시 뭐든지 직접 부딪혀봐야 알 수 있어. 체리나의 옅은 미소를 보며 웰리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