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체리나는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을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모습을 친하지 않으며, 친하게 지낼 생각이 없는 타인인 테드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체리나는 잠들면 최근에 꾸는 이상한 꿈을 다시 보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마차에 몸을 맡기고 있었지만 그녀는 잠들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긴 여정 동안 테드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눌 건 아니었다. 웰리스가 빌려준 루시드 학파에 관한 서적을 무릎 위에 얹은 채, 체리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자 들리지 않던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체리나의 귀를 간질였다.
그게 무엇인지 체리나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너무나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렇게 꽤나 긴 시간 동안 잠에 들었다.
체리나가 일어났을 때 마차는 멈춰 있었다. 도착을 하자마자 발로 차서 깨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테드가 자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둔 게 의외였다.
창 밖에는 블로섬 가문이 그렇게 자랑하는 본가의 저택이 보였다.
빌어먹을 블로섬 가문의 저택은 여전했다. 역사가 오래된 걸 강조하는 블로섬답게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오브제가 입구를 지켰다.
정말 들어가기 싫은데. 체리나는 마차가 블로섬 가문의 맡기 싫은 거북한 냄새를 느낀 것처럼 기분이 가라앉았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블로섬가의 화원은 보고만 있어도 구역질이 났다. 한없이 깨끗하고 향기로워보이도록 꾸며놓은 모습이 마치 블로섬 가문 그 자체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거기서 뭐하고 있습니까. 설마 블로섬 가문의 영애가 고작 마차 안에서 머물 생각을 하는 건 아닐 거라 믿습니다.”
“잠시 쉬는 거야.”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테드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체리나를 보며 혀를 찼다.
체리나는 최대한 오랫동안 마차 안에 있고 싶었다. 밖으로 나가면 블로섬가의 땅을 밟아야 되니까. 똑같이 안에 있더라도 차라리 땅을 직접 밟지 않는 지금이 나았다. 방 안에 있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는 것보다 푸석한 마차 안에 앉아있는 게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두진 않겠지.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테드의 모습을 발견한 건지 저택의 웅장한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볼이 약간 상기된 상태로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카나리아 블로섬이 달려 나왔다.
오랜만에 본 카나리아는 여전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자란 게 얼굴에서부터 느껴졌다.
밖에서 고생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보이는 맑은 피부. 허리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금발은 많은 돈을 들여 관리를 받은 값을 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착용하고 있는 모든 건 고급 메이커의 물건이었다. 입고 있는 드레스의 천을 한 뼘 정도만 잘라내서 시장에 가져가면 서민의 한 달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아마 사람들이 상상하는 블로섬 가문의 영애란 모두 저런 모습이겠지.
“테드 오라버니!”
하지만 블로섬 가문의 영애가 지켜야 되는 예절은 어디다 두고 저러는 걸까. 겨우 마차에 잠시 머무는 것 가지고 뭐라고 하던 테드 블로섬은 어디로 간 거고.
“아, 카나리아.”
테드는 급하게 달려 나오다가 넘어질 뻔한 카나리아를 품에 안았다. 카나리아가 저택으로 돌아온 테드를 반겼다.
“오라버니, 제가 말했던 건 사오셨나요?”
“카나리아. 너는 내가 반가운 거야, 아니면 내가 사가지고 온 물건이 반가운 거야.”
“당연히 물건을 사가지고 돌아온 오라버니가 반가운 거예요.”
말이라도 못하면, 하고 테드가 애정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라, 오라버니. 누구랑 같이 오셨나요?”
“카나리아 네가 알 필요 없는 사람이야.”
카나리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마차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본다고 해서 귀족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마법이 걸려 있는 마차의 안쪽을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카나리아는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않는 테드에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라버니?”
“자, 네가 그렇게 노래하던 헤어핀이다. 악세사리 종류는 내가 잘 알지 못해서 제대로 사온 건지 모르겠어. 안으로 들어가 확인해봐.”
테드가 주머니에서 깔끔하게 포장된 상자를 하나 꺼내 카나리아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어서 저택 안으로 들어가라고 카나리아를 재촉했다.
카나리아가 그렇게 마차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한 흥미를 잃었으면 한 건지. 만약 테드가 그렇게 생각한 거라면 체리나는 그를 비웃고 싶었다.
겨우 그런 작은 악세사리 하나로 흥미를 잃을 카나리아가 아니었다. 저런 행동은 오히려 역효과였다.
“……없던 흥미도 생기겠네.”
어릴 때는 카나리아에 대해 잘 알았던 것 같은데. 체리나에게 카나리아의 본성에 대해 가르쳐준 것도 테드였다. 그런데 언제부터 저렇게 카나리아에 대해 모르게 된 건지. 아, 사실은 아는데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인가.
어찌됐던, 체리나는 커가면서 점점 강해져가는 본성을 잘 숨기고 있는 카나리아에게 속으로 박수를 쳤다.
“아, 그렇게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거 보니까 수상해! 혹시 오라버니의 숨겨진 애인이에요?”
체리나의 생각대로 카나리아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온몸으로 마차의 입구를 가리는 테드를 피해 필사적으로 마차 안을 보려고 했다.
“에이, 카나리아 혼자만 알고 있을 테니까 알려주면 안 돼요?”
두 사람의 고집이 부딪히면 지는 건 상대방을 좀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일 게 뻔했다. 테드는 카나리아를 이길 수 없었다.
테드의 깊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는 카나리아가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몸을 옆으로 비켰다.
“저거의 볼 게 뭐가 있다고.”
테드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는 체리나를 부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마차에서 어서 나왔으면 좋겠다고 순순히 말하면 얼마나 좋아.
저런 말을 들으며 마차를 내리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마차 안에 얌전히 앉아 있는 상태로 카나리아를 기다리는 건 더 성격에 맞지 않았다. 체리나는 무릎 위에 얹어놨던 책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오랜만이네, 카나리아.”
별로 반갑지 않는 상대에게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는 연습은 아카데미에서 충분히 했다. 체리나는 책을 들고 있지 않는 왼손을 들어 카나리아를 향해 흔들었다.
드디어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상대와 시선이 맞았다. 카나리아의 적기 어린 시선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아직 아카데미의 방학이 오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오셨어요?”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야. 체리나는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잠시 집에 와야 되는 일이 생겨서 들린 거란다.”
“아, 그래서 중간에 오신 거군요! 체리나 언니가 아카데미에서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돌아온 줄 알고 놀랐잖아요.”
카나리아는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본심을 애매하게 가리는 건 숨기지 않는 것보다 못했다.
체리나는 자신이 본가로 돌아오지 않은 기간 동안에 카나리아가 얼마나 어리광을 부리며 지내왔을지 상상이 됐다.
“카나리아, 밖에 너무 오래 있으면 건강에 좋지 않아. 어서 들어가는 게 좋아.”
카나리아를 대하는 테드의 태도만 보아도 그랬다.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 체리나 언니가 본가에 돌아올 정도의 일이면 엄청 중요한 일이겠죠? 무슨 일이에요?”
“카나리아 네가 알아야 될 정도로 중요한 일은 아닐 거다.”
“언니 정말이에요?”
“테드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테드는 체리나에게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조차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는 앞서 걸어가고 있는 카나리아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아주 잠시 동안 인상을 찌푸렸다.
“에이, 치사해. 왜 카나리아만 빼고 오라버니랑 언니만 알고 있는 거예요!”
카나리아가 자신이 토라진 걸 보이고 싶었는지 볼 한가득 바람을 집어넣었다. 고개는 테드가 없는 쪽을 향했다. 테드는 그런 카나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카나리아는 아직은 몰라도 되는 일이야.”
“카나리아도 이제 어리지 않아요. 이제 알 건 다 안다고요.”
“그렇지만 정말로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라 말해주지 않는 거야.”
“그게 카나리아를 어린애로 생각하고 있는 거잖아요.”
저택의 앞을 지키고 있던 시녀가 문을 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던 카나리아는 뒤를 휙 돌았다. 그리고는 테드가 입고 있는 코트의 소매 끝자락을 붙잡았다.
“진짜 어린애 아닌데. 이제 레이디라고 불러도 될 나이에요. 오라버니가 이러니까 자꾸 엄마도 카나리아를 어린애처럼 대하는 거잖아요.”
“저렇게 궁금해 하는데 알려주지 그래?”
“너……, 아니, 누님은 조용하시죠.”
테드는 카나리아가 지켜보고 있단 걸 깨달았는지 호칭을 바꿔 말했다.
“필사적으로 숨길 게 못 되는데, 뭘. 네 말대로 아무 것도 아닌 일이잖아?”
알려준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위드 블로섬이 이곳에 올 텐데. 그러면 알리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카나리아도 알게 될 거다.
처음부터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보다 미리 말을 들어서 마음의 준비를 해놓는 게 나았다. 한 번도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한 적이 없는 귀한 집 아가씨라면 특히나.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는 위드 블로섬이 다른 여자랑 약혼을 하는 걸 카나리아가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 줄 알고 숨기려는 걸까.
얌전히 방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루 종일 울고 있을 줄 알고? 그럴 리가 없었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한 것에 대한 화를 참지 못하고 반항기에 접어들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속으로만 참고 있던 카나리아의 쌓인 화를 누가 다 받아내야 되는데. 지금 후폭풍을 불청객에게 모두 맡기시려고? 그렇게는 못 두지.
“언니, 그러면 언니가 카나리아에게 알려주시겠어요?”
“알려주지 못할 것도 없지. 그런데 언제까지 문 앞에서만 서 있을 생각이니.”
다리만 아프게, 하고 체리나가 덧붙였다.
“체리나님, 카나리아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방 안에 외투를 벗어두기가 무섭게 카나리아를 담당하는 시녀 중 한 명이 체리나를 찾았다. 체리나는 책을 침대의 한 편에 내려놓은 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역시 블로섬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이 가문에도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가문 사람들의 생각을 어떻게 알고 말하기도 전에 모든 걸 준비해 놓는 사용인들이었다.
테라스에는 카나리아가 즐겨 마시는 홍차와 함께 보이게도 달달한 케이크가 준비되었다. 카나리아가 앉아 있는 곳 반대편에는 체리나를 위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밖에서 카나리아와 체리나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 듣고 있던 문지기가 저택 안에 있는 시녀에게 전달한 게 분명했다. 카나리아가 곧 체리나와 이야기를 나눌 거라고.
다른 건 다 숨겨도 참을성이 없는 것 하나만은 숨기지 않고 전부 드러내고 있는 카나리아를 잘 모시기 위해선 빠르게 행동하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리고 그걸 조금의 부족함 없이 해낼 수 있을 정도로 블로섬가의 사용인들은 뛰어났다.
거기에 비천하다고 생각하는 상대에게도 존칭을 사용해주는 섬세함. 누가 어디서 데리고 오는 건지는 몰라도, 나중에 블로섬 가문에서 나갈 때 한 명쯤은 데려가고 싶을 정도였다.
“언니, 이제야 오셨네요!”
카나리아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체리나를 불렀다.
“미리 먹고 있지 그랬니. 차가 식으면 맛이 덜 한데.”
“언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이미 한 잔 마셨죠.”
아, 저건 두 잔째였나.
카나리아와 함께 티타임을 갖게 되면 테드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테드는 보이지 않았다.
체리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살피자 카나리아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오라버니는 오지 못하게 막아달라고 했어요. 오라버니가 오면 언니가 말하려는 걸 막을걸요.”
“그건 그렇지.”
“언니가 좋아하는 것들로 준비해달라고 했어요.”
체리나는 카나리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탁자를 가득 채우고 있는 다과는 확실히 저택에서 지낼 때 체리나가 즐겨 먹던 것들이었다.
블로섬과 함께 얼굴을 마주하고 음식을 먹으면 좋아하던 음식도 싫어하게 될 것 같은데. 몇 없는 즐겨먹는 간식을 이렇게 없애야 되는 건가.
확실히 체리나는 블로섬 가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없앨 수만 있다면 지도에서 블로섬가가 가지고 있는 영지를 통째고 없애고 싶을 정도로.
꿈에서 블로섬가의 저택에 수백 번은 불을 질렀다. 어쩔 때는 체리나의 몸 안에 흐르고 있는 블로섬의 피가 싫어서 일부러 피를 뽑은 적도 있었다.
체리나는 블로섬을 저주했다.
블로섬이 싫은 건 당연한데. 카나리아의 본성을 잘 알고 있으며, 카나리아가 자신에 대해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는데.
하지만 체리나도 역시 카나리아에게 약한 블로섬 가문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체리나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나리아의 기대를 저버릴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