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04-
지훈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려고 작정이나 한 듯 설치는 베로니카의 손목을 낚아챘다.
“바다 속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세요?”
“아마도요.”
“그럼, 여기 말고, 제가 아주 좋은 곳을 아는데 그 쪽으로 가실까요?”
지훈의 말에 베로니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릇한 생선냄새가 먼저 맞이하는 어시장에 도착한 지훈은 베로니카의 손을 잡고, 이 곳 저곳을 구경시켜주었다. 베로니카는 수녀복이 아닌 평상복이 어색한지 자꾸만 옷을 매만졌다. 베로니카가 어색해 하는 것을 보고, 지훈이 베로니카의 손에 돈을 쥐어 주며 말했다.
“오늘 점심거리 직접 사볼래요?
“네?”
“자, 안목이 얼마나 좋은지 한 번 볼까요?”
처음에는 쭈뼛 쭈뼛하던 베로니카도 지훈이 옆에서 능청스럽게 가격을 깎으며 애교를 부리는 모습에 긴장을 풀며 평소의 밝은 베로니카로 돌아왔다.
“어때요? 바다 속에 있는 웬만한 생명체는 여기서 다 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맙죠?”
지훈이 베로니카의 어깨를 자신의 어깨로 ‘툭’하고 밀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지훈의 질문에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음. 아니죠. 바다 속에 있는 생명체들은 모두 살아 움직이는 데, 이 곳에 있는 것들은 반 이상은 죽어 있는 거잖아요.”
“네?”
엉뚱한 대답을 하는 베로니카를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짓자 그런 지훈의 보고 베로니카는 미어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지훈은 그제야 자신을 놀리기 위한 농담이었다는 것을 눈치 채며 크게 웃어주었다.
“하하하, 도연씨는 정말 위트가 넘치시는 분이시네요.”
베로니카는 오랜 만에 듣는 자신의 이름이 어색하기만 하다. 지훈은 당부했다. 성당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베로니카라는 이름은 버리라고. 며칠 전, 지훈이 베로니카를 찾아왔었다.
“안녕하세요. 오지훈이라고 합니다. 보현스님이 급하게 전하실 말씀을 전해드리려 왔습니다.”
보현스님, 자신을 이 성당에 있게 한 분. 베로니카의 모든 과거를 아는 사람이자 힘든 시절 옆에서 묵묵히 기다려주었던 은인이었다.
“보현스님이 왜 직접 오시지 않고.”
“잘은 모르지만, 급한 일이 있으셔서 저를 대신 이곳에 보내신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군요. 전하실 말씀이.”
“지금 당장 떠나야 합니다.”
지훈의 한 마디에 베로니카는 바로 성당을 나왔고, 지금 지훈의 고향인 이 곳에 와 있다. 보현은 어느 날 베로니카를 찾아와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수녀님. 이제 진짜 수녀님이 다 되셨습니다. 잘 적응하고 지내시는 것 같아 정말 다행입니다.”
“이 모든 게 보현스님 덕분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베로니카 수녀님 혹시나 제가 갑자기 찾아와 이곳 생활을 접으시고 가자고 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음. 당연히 따라나서야죠! 분명 더 좋은 곳에 취직시켜주시려고 그러시는 것일 테니까요.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베로니카의 농담에 보현스님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우리 베로니카 수녀님 말 재주에는 못 당하겠습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아직 대답할 때가 아니라. 제가 이런 말을 해서 궁금해서 잠도 못 이루시는 거 아닙니까?”
“절 잘 아시면서, 당연히 잠 못 이룰 겁니다. 이제 잠은 다 잤네요.”
베로니카가 삐진 척을 하다 말고 보현스님을 쳐다보다 두 사람은 마주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보현스님은 베로니카를 바라보며 부탁했다.
“약속해주세요. 어느 날 갑자기 제가 베로니카 수녀님을 데리러 온다면 저를 꼭 따라나서 주시기로.”
“보현스님. 전 당연히 스님을 따라나설 겁니다. 약속드립니다.”
어시장을 한 바퀴 돌고나니 베로니카와 지훈의 손에는 한 가득 비닐봉지가 들려져 있었다. 지훈이 두 손 가득 비닐봉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일주일 동안은 바깥에 나가지 않아도 될 정돈데요.”
“하하. 그러게요.”
“그럼, 코에 바람도 충분히 쐰 거 같으니까. 돌아가실까요?”
“네.”
대답은 했지만 베로니카의 표정을 보니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지훈은 베로니카와 며칠 같이 있으면서 참 알기 쉬운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마음이 표정으로 모두 들어나는 사람.
“아쉽죠?”
지훈의 질문에 베로니카는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당황스러워 했다.
“네?”
“내일 또 와요.”
“정말요?”
“그 대신! 오늘처럼 이렇게 많이 사면 안돼요. 아시겠지만 전 아직 학생이라고요.”
“아! 미안해요. 내일은 아무것도 사지 말고, 구경만 할게요.”
지훈의 말 한마디에 베로니카는 아이처럼 팔짝 뛰며 즐거워했고, 그런 베로니카의 모습에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보현스님의 부탁을 받기 전, 지훈은 고향에서 이렇게 베로니카와 함께 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훈아. 그동안 잘 지내고 있었니?”
보현스님은 자주 지훈의 안부를 묻곤 했고, 지훈은 그래서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안부를 묻기 위한 전화라고 생각했다.
“스님! 제가 먼저 연락드리려 했는데, 늘 먼저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누가 먼저 연락하는 것이 뭐가 중요하니. 한가한 사람이 연락을 먼저 해줘야지.”
“스님처럼 바쁘신 분이 어디 있다고. 지금 저 나무라시는 거죠?”
“하하. 아니다. 어떻게 적응은 좀 됐고?”
“전역한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아직 왔다 갔다 해요.”
“너무 조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편안하게 학교생활 하거라.”
“무조건 열심히 해야죠! 스님이 주신 학비인데. 편안히 다니면, 다음 학기에도 스님이 학비 대주셔야 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하하. 네 학비라면 몇 번이고 내줘야지. 언제나 밝게 지내줘서 고맙다.”
“스님. 제가 고마워해야죠. 그런데 이렇게 밤늦게 전화를 다 주시고. 무슨 일 있으세요?”
보현스님이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자 지훈이 먼저 말했다.
“스님. 전 언제든지 최선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어려워 마시고, 시켜주세요. 저희 집 힘들 때마다 스님이 늘 도와주셨는데, 저도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돕고 싶습니다.”
“그래도 되겠니?”
“당연하죠.”
“훈아, 너무 쉽게 대답은 하지 마라. 생각을 해보고 말해야 한다. 행여 내가 하는 말에 네 마음이 조금이라도 아니란 마음이 들거든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나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마음 때문에 네가 빚이라 생각하면서 들어준다면 더더욱 안 될 일이다. 내가 널 도운 것은 내 마음이 편하려 도운 것이지. 너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란다. 네가 그런 마음을 가지게 했다면 네가 널 진정 제대로 도운 것이 아닌 게다.”
“마음의 짐이 아닙니다.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스님이 저에게 부탁하실 일이 생기신 거라면, 저도 이제 스님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잖아요. 전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지는 걸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쉽게 대답해서는 안 될 문제이다. 네 목숨이 달린 문제다.”
“네. 걱정 마시고, 말씀해주세요.”
성민은 드디어 원하는 답을 얻고, 흡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유민은 성민의 표정을 보고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이제, 날 풀어줘.”
“음. 아니, 내가 널 뭘 믿고 풀어줘? 확인되면 그 때 풀어줄게.”
“야이! 개새끼야! 장난해!”
“어휴! 정말 한 성깔 하신다니까. 이거 봐. 기자양반 당신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봐. 그쪽이랑 나랑 오늘 처음 만난 사이야. 그런데 내가 뭘 믿고 그쪽을 믿고 풀어 주냐 말이지. 우리도 정확한 확인절차를 거쳐야 당신이 한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지.”
“하. 너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어?”
“음. 작정은 아니었고, 네가 하는 짓이 하도 재미있어서 말이야. 하하. 뭐 어쨌든. 네 말이 사실이라면 풀려 날거고, 네가 풀려나기 위해 꼼수를 부린 거라면 목숨부지하기 힘들겠지.”
성민은 그렇게 말하고,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머리를 굴려야 했다. 성민의 말처럼. 어떻게 하면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유민은 머리를 굴려 보지만, 오기 전에 보았던 그 수많은 보안시스템을 뚫고 평범한 여자인 유민이 어떻게 나갈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첩보영화의 주인공도 아니고. 절대 무리였다.
‘젠장. 내가 미친년이지. 미친년이야.’
성민은 유민이 말해준 정보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이호영과 안성국을 불렀다. 볼 때 마다 적응이 되지 않는 행색을 한 저들을 이 일이 끝나서 빨리 그만 봤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성민이었다.
“그래, 그것들은 잘 처리하고 왔어?”
질문을 하고, 이호영을 보는데 공격을 받았는지 몸이 성치 않아 보였다. 이호영이 그런 성민의 시선을 느끼며 대답했다.
“오늘은 대충 넘어갔지만, 그들이 언제 어디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준비는 니들이 하는 거지. 내가 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 너희들이 할 일은 그것들이 우리 일이 끝나기 전까지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하는 거야. 잘 숙지했지? 그럼 이만 가봐.”
성민이 돌아서는데 안성국이 성민을 불러 세웠다.
“알아내셨습니까? 행방을?”
성민은 안성국의 질문에 기분이 나빠진다. 대꾸도 하기 싫은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성민이 대놓고 안성국을 무시하자 그 모습에 격분한 이호영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푸른빛으로 변했다.
“저 새끼가.”
“그만 둬라.”
“하지만.”
“같은 편끼리 싸우는 것이 제일 한심한 짓이다. 힘을 하나라도 더 모아야 할 때, 분란 일으키지 마라. 그리고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던 도련님은 하리님이 선택한 사람이다.”
“네.”
기륭은 성민의 보고를 받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수고했다. 이제 하리님이 오실 날만 남았구나.”
전화를 끊은 기륭은 얼른 하리님의 그림이 걸려 져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그림 속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던 하리님이 기륭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어떻게 되었느냐?”
“이제 곧 나오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역시 내가 선택한 아이야.”
“네.”
“어찌 대답이 그런가?”
“네?”
“네 놈 눈에는 그 아이가 우습지?”
“네?”
갑작스런 하리님의 질문에 기륭은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내가 선택한 아이다. 내가 비록 이 족자에 갇혀 있지만!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다.”
“하리님! 감히 제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어디서! 지금 나를 속이려 드느냐!!!!”
하리님이 불같이 화를 내자, 방안이 암전됐다. 어둠이 드리워진 방안 하리님의 영이 밖으로 나와 기륭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명심해라. 내가 이 곳을 나갈 방법은 그 아이밖에 없다. 어서 구경하고 싶구나. 내가 없는 동안 세상을.”
“모두들 오랜 시간 기다려왔습니다. 이제 곧, 하리님의 시대가 다시 열릴 것입니다. 그날의 영광을 위하여!”
기륭이 맹세를 다짐하는 구호를 외치자 방안은 다시 밝아졌다. 하리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기륭은 그림 속의 하리님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석호는 자신의 핸드폰에 설치된 위치추적 어플을 실행시켰다. 유민이 석호에게서 기삿거리를 얻어내기 위해 몰래 설치한 어플이었다. 이상하게 석호가 있는 곳에 귀신같이 나타나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석호는 자신의 핸드폰에 어플을 몰래 설치한 것을 알고, 몇 번이나 지웠지만. 유민은 또 몇 번이나 다시 깔아놓기를 반복하며 그렇게 둘은 아옹다옹 했었다. 어플을 지우는 지훈을 보며 유민이 속상해 하며 말했다.
“그 어플이 뭐라고. 그렇게 열심히 지우냐? 그거 그냥 내 마음의 위안이야. 무능한 기자라고 욕 들어 먹을 때마다 때려치우고 싶은 내 마음을 다 잡는......얄짤 없는 놈. 꼭 그렇게 까지 해야겠냐!”
그 말을 듣고 나니 괜스레 미안해진 석호가 그 날 이후로 지우지 못한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지 몰랐다. 거짓말이라는 걸 단번에 알았다. 마음이 약한 석호에게 감정으로 호소해서 결국 지우지 못하게 하려는 유민의 잔꾀라는 걸.
유민의 위치를 알게 되자, 석중은 바로 호태와 형무에게 준비 지시를 내렸다. 유민이 있을지도 모를 장소에 셋은 함께 가고 있는 중이다. 해담스님은 자신 때문에 위치가 발각될 것을 우려해 함께 하지 않았고, 그렇게 세 사람은 차를 타고 유민의 휴대폰 신호가 마지막으로 잡힌 곳으로 향했다.
“신호는 끊어지지 않았나요?”
형무가 궁금한지 석호에게 물었다.
“네. 아직 핸드폰이 꺼지지 않았나 봅니다.”
“다행이군요.”
세 사람이 탄 차는 말없이 한 참을 달려 한 건물 앞에 섰고, 호태가 차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동안 먼저 내린 형무와 석호는 호태를 기다리며 대기했다. 형무는 다시 확인 차 석호에게 물었다.
“이 곳이 확실 합니까?”
“네. 신호상은 이곳이 확실합니다.”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위험한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호태가 도착했고, 석호는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준비됐으면 가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