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06-
유민은 문 앞에서 서 있는 성민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유민이 당황한 모습을 본 성민의 한 쪽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내려왔다.
“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설마 도망?”
유민을 쫒던 덩치들이 성민과 유민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어찌 할 바를 몰라 우두커니 서서 안절부절 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말이야. 밥 값 못하는 놈들을 제일 한심하게 생각하시거든. 여기 밥 값 못하는 놈들이 하나, 둘 셀 필요도 없겠다. 니들 오늘부로 다 해고야. 고작 여자 하나를 못 지켜!”
덩치들이 아무 말 못하고, 눈치만 보고 서 있자 그 모습에 더 화가 난 성민이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고 서 있는 거야! 이 멍청이들!!!!”
“아! 네!”
당황해서 우왕좌왕 하던 덩치들이 유민을 들어 끌고 갔고, 성민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유민을 가둬 두었던 방으로 다시 돌아오자 유민은 이제 더 이상 살아서는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망연자실한 유민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유민을 보고, 성민이 재미있어 주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유민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댔다.
“네가 한 짓을 알긴 아는구나? 눈물이 절로 나지? 아! 내가 곧 죽겠구나? 뭐 이런 생각도 들고? 그러게 사람을 봐가면서 개수작을 부렸어야지! 감히! 날 속여!!! 어!!”
독이 바짝 오른 성민이 주먹을 치켜들어 유민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고, 모진 고문에 벌어진 살 사이로 피고름이 흐르던 유민의 얼굴이 고통에 꿈틀거렸다. 유민은 입에서 비굴한 절규가 흘러나왔다.
“살…….살려 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 차라리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그랬어! 똑딱. 똑딱. 똑딱 땡! 손님 이제 손님 차례는 끝이 났는데 어쩌죠? 이 년 똑바로 잡아!”
성민이 덩치들을 향해 소리치자 덩치들이 유민을 일으켜 세웠다. 성민은 손과 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해 어느 부위를 맞으면 더 아픈지 잘 아는 고문관처럼, 유민의 아픈 부위만 건드려댔다. 유민의 몸과 얼굴에서 피와 고름이 터져 나왔고, 얼마나 맞았는지 온 몸이 얼얼해져 아픈지도 못 느낄 정도가 되고서야 유민은 정신을 놓아버렸다.
유민이 기절한지도 모르고, 때리던 성민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반응이 없어진 것을 그제야 알아차리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이 미친년 말을 믿은 내가 바보지. 연기 그만하고, 일어나! 아직 멀었다고!”
정신을 잃은 유민의 뺨을 갈기자 힘없이 몸이 '홱'하고 돌아갔다. 덩치들이 그런 성민을 말렸다.
“기절한 거 같습니다. 그러다 손목 나가십니다.”
“이거 놔!!! 시팔!”
말리는 덩치들을 밀어내고, 성민은 분에 겨워 씩씩거렸다.
“이 년, 어디 팔아 버려. 쓸모없는 년! 주둥아리만 살아서 나불대더니 꼴좋다. 이 년 주둥아리 놀리지 못하게 혀 잘라! 그리고 두 번 다시 한국 땅 못 밟게 팔아버려!!”
옷매무새를 고친 성민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매만지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얼굴의 형체도 알아 볼 수 없게 두들겨 맞은 유민을 덩치들이 들어 옮겼다.
형무는 눈앞에 현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산산조각이 난 잔해를 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고. 눈은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서는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아직도 불타고 있는 잔해를 맨 손으로 헤집었다.
“형…….형!!!!! 아니야. 형이 이렇게 쉽게 죽을 리 없잖아. 형! 형!!!!!!!!!!!!!!!!!!”
형무의 절규가 조용한 도로가를 가득 메웠다. 해담스님의 연락을 급하게 받은 해수가 무서운 속도로 차를 몰았다.
“갑자기 뭐야. 난 왜 안 데려 간 거야. 에이 씨!”
해담스님이 말한 장소에 다다르자 멀리서부터 보이는 불길을 보자 해수의 심장이 대책 없이 날뛰기 시작했다. 해수의 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도로를 비추는 곳에 넋을 잃고 앉아 있는 형무가 보였다. 그 모습에 다리에 힘이 풀린 해수는 그대로 달려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다. 해수는 형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차에서 곧바로 내려 형무에게 달려갔다.
“왜…….왜…….이러고 있어?”
형무의 멍한 눈에서는 눈물만 흐르고 있었다. 해수는 처음 보는 형무의 모습에 목이 따끔거려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형무의 멱살을 잡고 억지로 끌어 올려 보려 하지만, 손아귀에 힘이 자꾸만 풀려 해수는 형무를 붙잡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왜? 왜 이러고 있는 건데. 말을 해보라고! 어! 말을 해보라니까!! 야!!!!! 남형무!!! 어떻게 된 일인지…….제발...제발 말 좀 해보라고!! 그렇게 있지 말고!!!”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형무의 뺨을 해수가 세차게 한 대 때리자, 멍한 눈을 한 형무가 해수를 바라봤다.
“해수야. 해수야. 없어. 저기 있었는데 없어졌어.”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형무의 모습을 보고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할 수 밖에 없었다.
“거짓말이지? 대장은? 어디 있어? 다른 데 갔어? 다른 작전에 간 거야? 그런 거지! 남형무 장난치지 마.”
“형이 저기 안에서 잠들어 있었는데 일어나지 않는 거야. 흑…….흑.....내가 구하려 했는데......갑자기......갑자기......사라져 버렸어....흑....”
해수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형무를 보고 해수는 오열했다.
“아니야!!! 아니야!!!아!!!!”
해담스님과 학중은 형무의 통화를 마지막으로 누구와도 연락이 되지 않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가야 합니다. 아무래도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합니다. 우리만 살자고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해담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학중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침착하십시오. 그 아이들, 그렇게 약한 아이들이 아닙니다.”
“그래도,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라면 지금 가봐야 합니다.”
해담스님을 뒤로 하고, 학중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태연하게 차를 끓였다. 그 모습에 해담스님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일어서는데 학중이 입을 열었다.
“스님. 그 아이들은 그럴 각오가 되어 있었던 아이들입니다.”
학중의 말에 해담스님은 발길을 돌려 학중을 바라보았다.
“무슨 각오요? 죽을 각오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들은 늘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학중의 말에 기가 찬 듯 해담스님이 한 숨을 내쉬었다.
“준비요? 죽는다는 게 준비가 되는 일입니까? 그 아이들이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들에게 그리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
“그래서 고아인 아이들, 불쌍한 아이들만 골라서 도와주신 겁니까? 이럴 때 써먹으시려고요? 그런 아이들 죽음 따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얼마든지 더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모두 소중합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돈이 있든 없든 말이지요. 아무리 하찮은 미물들이라 해도 생명은 소중합니다. 저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 아이들, 제게 소중한 아이들입니다. 그 아이들의 목숨을 하찮게 생각한다고 말씀드린 적 없습니다. 모두 자발적으로 이 일에 동참한 아이들입니다. 그들이 원했고, 그리고 죽게 된다면 그건 명예로운 죽음이라고 생각할 각오가 되어 있는 아이들입니다.”
“이 세상에 명예로운 죽음은 없습니다. 그 아이들은 당신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을 하고 싶었을 것이고, 당신은 그러한 아이들의 마음을 이용한 겁니다. 당신이 그 불쌍한 아이들이 스스로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스님이 그렇게까지 생각하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셔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돈은 제가 후원한 것이지만, 그 아이들을 선택한 것은 보현스님이시지요. 그럼 보현스님이 그 아이들을 사지로 내 몰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아이들만 골라서? 저를 욕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해담스님이 보현스님과 함께한 세월이 얼마이신데 그렇게 보현스님을 모르십니까?”
“보현스님은 그 아이들이 인간답게 살기를 원하신 것이지, 우리들이 하는 일에 이용되기를 원하신 건 아니실 겁니다.”
“보현스님이 결정하신 일입니다. 그 아이들. 아무나 데려온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아이들이 가진 능력, 그것이 우연인 것 같으시지요? 아. 해담스님은 아이들이 어떠한 능력을 가졌는지 모르시니. 보현스님은 아이들이 가진 능력을 그 쪽에서 먼저 악용할까봐. 손을 쓰신 겁니다. 이용이라 하셨습니까? 이번 생에 저들이 움직일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보현스님은 저 아이들이 죽을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지금처럼 살아가길 그 누구보다 바랐습니다. 아이들이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저는 몰랐습니다. 그저 평범한 아이들이라 생각했습니다.”
학중이 차를 끓여 해담스님 앞에 놓아주며 앉으라는 손짓을 하자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우리 모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갑자기 저 쪽에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들이 움직임으로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가진 운명에 순응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런 일이. 누가 시킨다고 해 지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아이들 선조 때부터 몸속에 흐르는 피가 그리 해야 한다고 그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하고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정해진 운명대로 움직이는 것뿐입니다.”
“아무리 정해진 운명이라 해도, 그 아이들은 아직 어리기만 합니다.”
“압니다. 저희도 다 알지 못합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 그들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우리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 조차 모릅니다. 현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참혹 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이 가진 능력조차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그들의 손에서 아이들을 완벽히 보호할 수 있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아이들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지만, 아이들이 당하고 있는 것을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좀 전 부터 아이들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스님, 제가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 드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아이들을 구하러 가다 우리가 노출 되면 그들에게 맞서 싸울 기회마저 잃는 겁니다. 지금 당장은 괴롭지만,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아직 스님과 저 단 둘 밖에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 점 잊으시면 안 됩니다.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알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구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맡은 사람들입니다. 늘 큰일에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아프다면 그 아이들을 이제껏 기른 제가 더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도 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과 아직 만나보지도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 아이들을 구하러 달려간다고 그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습니까? 그러다 스님이나 저나 허무하게 죽는 다면 무슨 낯으로 그 아이들을 만나겠습니까.”
“제가 경솔했습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됩니다. 스님…….그래도 계속 확인해 주십시오.”
“네.”
베로니카는 무료하게 앉아 멍한 표정을 지으며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외향적인 베로니카가 집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신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지겨워 죽겠다는 듯 다시 바닥에 '철푸덕' 앉았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베로니카는 귀를 쫑긋하며 눈을 반짝였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드르륵.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미닫이 문 레일이 뻑뻑한지 문을 여는데 요란한 마찰음을 냈다.
“뭐하고 계셨어요?”
심심해서 주리를 틀고 있던 베로니카는 지훈의 방문에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진짜! 너무 심심해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네? 하하. 하긴 여기가 많이 조용하긴 하죠. 밖에 나가는 건 좀 그렇고, 심심한데 수다나 떨까요?”
“진짜요? 저 때문에 괜히 이렇게 신경 안 써주셔도 되는 데.”
말을 그렇게 하면서 어서 놀아달라는 눈빛을 하는 베로니카를 보며 지훈은 피식 웃었다.
‘저런 얼굴을 하고서는 귀엽네.’
“우리 무슨 이야기 할까요?”
베로니카 옆에 털썩 앉으며 지훈은 베로니카의 표정을 바라봤고, 생각에 잠긴 베로니카가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눈을 반짝거렸다.
“음. 진실게임?”
“네? 웬 진실게임.”
“진짜 그런 거 하고 싶었거든요. 뭐 수녀원에 있을 때에도 그런 비슷한 걸 하긴 했지만, 여기에서 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고. 내가 하루 동안 무얼 잘못했는지에 관한.”
“알만하네요.”
지훈이 맞장구를 쳐주자, 신이 난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들떴다.
“맞아요. 어떤 날에는 뭐 그렇게 잘못 한 일도 없는데, 거짓으로 나쁜 짓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니까요.”
“정말요? 수녀님이 거짓말을 하시는 건 좀.”
“알아요. 수녀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하지만 수녀도 사람인걸요. 때에 따라 거짓말도 할 수 있죠. 물론 다른 수녀님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괴짜 수녀님이셨네요.”
“음. 수녀라 하기 엔 좀 많이 타락했죠. 제가 수녀라는 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긴 해요.”
“어! 벌써 진실게임 시작 하신 거예요?”
“네? 아. 하하 그런 셈이네요.”
“그럼 시작이라고 말씀하시고 시작하셔야죠.”
“그렇게 하는 건가요? 그럼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