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08-
유민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성민이 큰 소리로 웃어댔다.
“하하하. 아하하하.”
덩치와 유민은 갑자기 웃는 성민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고, 성민은 얼마나 웃긴지 눈물까지 흘렸다.
“너 기자하기에 너무 아까운 거 아니야? 차라리 연기를 하지 그랬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당당한 유민의 모습에 성민이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 줄 알고, 저번에도 말도 안 되는 장소에 우리를 보내더니.”
“그걸 믿은 네가 바보지.”
“이게! 어디서 끝까지!”
“세상에 얼마나 많은 베로니카가 있는지 알아? 네가 찾는 베로니카 수녀만 해도 말이야. 엄청 많다고, 그리고 나같이 세례명으로 베로니카를 받은 사람도 허다하고. 네가 찾는 다는 사람, 수녀가 아닐지도 모르지 않아? 그 정보는 확실해? 수녀라는 사실도?”
“뭔 개소리야!”
“내가 믿는 사실이 진짜 사실인지 한번 쯤 의심해 볼 필요도 있어. 그 사실이라는 것이 거짓이면서 참인 척 둔갑을 할 때가 있어. 그 걸 가려내기 위해 정보의 진실성에 대해 잘 파악하는 것이 우리 기자들이 하는 일이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면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 정보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오염은 없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거든. 네가 가진 정보는 확실한 정보야? 오염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백프로 확신할 수 있냐 말이야.”
“말은 잘하네.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 번지르르하게 말만 잘하지. 실속은 하나도 없으니 문제야.”
“내가 그 정보가 진실인지 아닌지 알아볼게. 그리고 그 베로니카라는 여자. 내가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아.”
“하하하. 정말 웃기는 여자네. 또 꼼수를 쓰겠다.”
“내가 지금 꼼수를 쓰는 걸로 보여? 내 목숨을 가지고 그렇게 흥정할 정도로 난 간이 크지도 않아. 내가 여기서 도망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넌 분명히 날 다시 찾아 낼 거고, 난 어디 이름 모를 강에서 시체로 발견되거나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도 모를 테지.”
“잘 아네. 그렇게 잘 알면서 거짓말을 왜 했어?”
“마지막 발악이었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한 발악. 잘 생각해봐. 넌 여러모로 노출을 꺼리는 위치에 있을 거야. 그래서 늘 누군가를 시켜 이런 일을 했을 거고. 그런 사람들의 생각에는 한계가 있어. 나처럼 생각이 유연하지 못하지. 난 기자야. 내가 가진 직업의 특성이 이점이 될 수도 있고, 그들이 가진 것 보다 당신한테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공개적으로 그 여자를 찾을 수도 있다고. 여기서 말하는 공개적이라는 말은 그 여자를 찾는다고 광고를 한다는 말은 아니야.”
“음. 조금 구미가 당기긴 하네.”
“마지막으로 기회를 줘.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 때문에 죽는다는 건 너무 억울한 일이고, 적어도 그 여자 어떤 여자인지 내가 알아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데. 혹시 알아? 네가 가진 정보력으로 찾는 것보다 내가 더 빨리 찾을 수 있을지. 그 여자가 마지막으로 날 찾았고, 내가 당신네들 보다 접근하기 더 용이하다는 사실도 잊지 마.”
성민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띠릭.
덩치는 갑자기 영상통화가 종료되자 자신의 할일이 사라져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유민은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만으로 다행으로 여겼다.
‘이제, 하늘에 맡길 수밖에.’
베로니카는 한 참을 뒤척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오늘 지훈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인지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가진 능력이란 건 뭘까?’
살아오면서 어떤 능력이 있었던 순간이 있었던가?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전혀 없었다. 만약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면 어떤 능력이 있었으면 좋을지 생각해 보던 베로니카는 그런 생각만으로 왠지 기분이 묘해져 코를 찡긋거렸다.
바람이 제법 세게 부는지 창가에 바람이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지훈의 할머니가 혼자 살고 계신 바닷가의 작은 촌집. 베로니카는 이 곳에 오면서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갑작스레 지훈이 찾아온 것부터, 자신이 몸을 숨겨야 할 만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 이유도 모른 체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베로니카를 힘들게 만들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베로니카가 잠시 잠을 든 사이 창가에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베로니카는 몸을 뒤척이다 무엇인가 다리에 닿는 느낌에 감은 눈을 떴다. 자신 앞에 크게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 하나.
무엇인지 확인 해보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려고 안간힘을 써 봐도 소리가 나오지 않자 답답함에 목이 더 막혔고 신음소리조차 세어 나오지 않았다. 벌벌 몸을 떠는 베로니카를 향해, 어둠 속의 그림자는 자세를 낮추고 나지막이 말했다.
“베로니카. 놀라지 마세요. 전 보현스님이 보낸 사람입니다.”
보현스님이란 말에 베로니카는 그 그림자의 얼굴을 확인해 보려 애썼다.
강직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슬프고 깊은 눈을 가진 남자가 베로니카를 바라보고 있었고, 베로니카는 그 눈을 보며 알 수 없는 안도감에 잠시 경계를 늦추었다.
“누구세요?”
“전 박호태라고 합니다. 너무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왜 불도 안 켜고, 이렇게.”
“사실, 우리를 따라붙은 자들이 있습니다. 어서 여길 떠야 합니다.”
“네?”
“빨리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베로니카는 자리에서 일어서자, 호태가 옷걸이에 걸린 베로니카의 겉옷을 베로니카에게 어깨에 걸쳐주었다. 밖으로 나온 호태가 주위를 살피더니 베로니카의 팔을 잡고 이끄는데 베로니카가 갑자기 자리에 우뚝 섰다.
“지훈씨. 지훈씨는요?”
“그게 누굽니까?”
“절 여기로 데려온 사람이요. 그 분도 보현스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그랬는데.”
“어디에 있습니까?”
“저 방에요.”
“알겠습니다. 일단 먼저 피신을 시키고, 그 분을 나중에 따로 모시겠습니다.”
“아니요. 같이 가야 해요.”
호태가 말릴 겨를도 없이 베로니카는 지훈의 방으로 향했고, 호태도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
베로니카는 곤히 자고 있는 지훈의 몸을 흔들어 깨웠다.
“지훈씨. 일어나요. 지훈씨.”
“도연씨?”
베로니카 목소리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지훈은 의문의 남자가 베로니카 옆에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경계태세를 취했다.
“걱정 마세요. 우리 편이에요. 이쪽은 박호태씨. 이쪽은 오지훈씨에요.”
호태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지훈은 엉거주춤 손을 잡았다. 지훈은 궁금함에 물었다.
“그런데 왜 불은 꺼 놓고 이러는 겁니까?”
“지금 우리 뒤를 밟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오기 전에 얼른 이곳을 피해야 합니다.”
다급한 호태의 목소리에 지훈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먼저들 가세요. 전 할머니께 말씀드리고.”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은 매우 위험한 자들이고, 저는 베로니카를 지켜내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할머니 혼자 내버려 두고 갈 수가 없습니다. 먼저들 가세요.”
호태가 베로니카의 팔목을 잡아끌어 나가려고 하자, 베로니카가 호태의 손을 잡고 올려다보았다.
“위험한 사람들이라면서요. 그럼 지훈씨와 할머니가 위험해져요. 저렇게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어요.”
“지금 그 사람들보다 베로니카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저 사람들도 똑같이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저 사람들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 다면 저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단호한 베로니카의 모습에 호태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제가 할머니를 모시고 갈 테니. 지훈씨가 베로니카를 데리고 나가주세요. 여기 집 앞 슈퍼에 차가 한 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 차를 타십시오.”
“제가 할머니를.”
지훈은 말을 하다 말고, 눈빛이 바뀌더니 갑자기 베로니카를 잡아끌어 당겼다.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그 사람, 아니 그것들이 오고 있습니다.”
호태는 지훈의 말에 잠시 흠칫 하더니 빠르게 행동했다. 지훈도 얼른 베로니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퓽! 휘익! 쾅!
무언가 집을 향해 날아 왔고, 굉음과 함께 베로니카가 잠자던 방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처음 보는 광경에 베로니카와 지훈이 얼떨떨해 하고 있자 호태가 소리쳤다.
“빨리 피하세요!”
호태의 소리에 정신을 차린 지훈이 얼른 베로니카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지이잉!!!!
“저 새끼 빨리도 왔네!”
차에서 대기하던 석호가 폭발음에 바로 차에 시동을 걸었다. 호태는 빠르게 총을 꺼내들었고, 이호영 쪽을 향해 총을 쐈다.
탕!
호태가 쏜 총은 빗나갔고, 이호영은 총소리에 반응하며 공격태세를 취했다.
“청월광하!”
지이이이잉!
호태 쪽으로 푸른빛을 쏘자, 호태는 빛을 피해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쿵!!!쾅!!
호태가 있던 자리가 쑥대밭이 되어버렸고, 굉음에 놀란 베로니카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훈은 얼른 베로니카를 일으켜 세웠고, 차를 발견하고 본능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석호가 지훈을 발견하고, 지훈 쪽으로 차를 몰아 두 사람 앞에 차를 세웠다.
“빨리! 빨리!”
다급한 석호의 말에 베로니카와 지훈은 얼른 차에 올라탔고, 차는 빠르게 촌집을 벗어났다. 차 엔진 소리에 이호영이 고개를 돌리자, 숨어 있던 호태가 방심하고 있는 이호영을 향해 총을 쏘았다.
탕! 탕!
이호영은 이번에도 재빠르게 호태가 쏜 총을 피했고, 호태 쪽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석호의 차에 따라 붙었다.
“젠장!”
이호영을 따라 호태도 달리기 시작했다. 이호영은 도로를 달리는 석호의 차량을 발견하고, 다시 푸른빛을 장전하는데 뒤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탕! 탕!
뒤를 돌아보니 호태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고, 이호영은 석호의 차량에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호태는 더 이상 달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그 자리에 섰다. 품에서 장비 하나를 더 꺼내들어 총구 앞에 달았고 이호영의 머리를 겨냥해 조준했다.
이호영은 그 사이 차량 천장에 올라탔고, 석호는 이호영을 때내려 운전대를 이리저리 꺾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차 위를 걷던 이호영이 베로니카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차 뒷자리 문을 때내 버렸다.
카가카강!
떨어져 나가는 문짝은 도로와 마찰 하면서 굉음을 냈다. 점점 멀어지는 이호영의 머리가 점만 해 질 정도 작아지자 호태는 호흡을 멈추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푹! 쉭!
호태가 쏜 총에 맞은 이호영이 차 위에서 떨어져 맥없이 바닥으로 내 팽겨쳐 졌다. 이호영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석호가 차를 세우더니, 이호영을 피해 빠르게 후진해서 호태 앞에 차를 멈춰 세웠다. 호태가 차에 올라탔고, 베로니카와 지훈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들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얼이 빠진 지훈과 베로니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출발합시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까딱거리던 성민은 입을 삐죽였다. 이제 별 다른 방법도 뾰족한 수도 없었다. 사실, 유민이 성민의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유민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속아 주는 척 하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오던 성민이 유민과 맞닥뜨린 것은 모두 계산된 일이었다. 사람을 궁지로 몰면 없던 능력도 생기는 법이라 기륭에게 배웠다.
성민은 유민에게서 아무런 실마리를 얻어 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리님의 생각은 달랐다. 유민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무엇인가 얻게 되리라는 하리님의 말에 절대적인 믿음이 그 답을 얻게 해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왜 베로니카가 유민을 찾아갔는지, 그리고 제일 중요한 베로니카의 행방을 유민을 이용해 알아내야 했다.
뚜루루. 딸깍
“너, 이게 마지막 기회야. 베로니카를 찾아내지 못하면 정말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