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09-
이토록 맑은 하늘을 본 적이 있었던가? 다시 찾은 반쪽짜리 자유는 유민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었다. 차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은 언제든 늘 볼 수 있는 흔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흔한 것들의 소중함을 이런 식으로 느끼게 될 줄 몰랐다.
“날씨 한 번 좋네.”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고,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살았기 때문일까? 유민은 자신이 인생을 너무 기고만장하게 살아온 벌을 받은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위기모면을 하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 성민에게 먹혀서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유민은 앞이 막막했다. 무슨 수로 그 여자를 찾을 것인지. 덩치들은 유민을 집 앞에 버리다 시피 떠났고, 만신창이가 된 유민은 일어설 힘조차 없는 데. 무정하게 떠는 차를 보며 안심도 됐지만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더 컸다.
“그냥 풀어주는 거 아니야. 기한은 3일. 3일 안에 찾아내. 못 찾아내면 알지? 그리고 혹시나 경찰이나 주위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 꿈에도 하지 말고, 이게 너한테 주는 마지막 기회야.”
성민은 유민을 풀어주며, 기한을 정했다. 자신들도 오랜 시간 못 찾은 사람을 유민에게 단 3일 만에 찾으라는 말은 그냥 죽이겠다는 말이랑 다름없는 거 아닌가?
“개*끼들.”
유민의 입에서 욕이 절로 흘러 나왔다. 어떻게 성민의 손아귀를 빠져 나갈 수 있을까? 차라리 해외로 도망을 가? 유민은 도망칠 생각부터 먼저 했다. 3일. 가망이 없는 시간이었다.
유민은 감금 되어 있는 동안, 성민을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민은 사람들의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이었는데.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좀처럼 기억이 떠오르질 않았다.
분명 성민을 만난 적이 있었다. 어디에서 본 얼굴인지 기억해내려 하면 할수록 뇌는 덜그럭 대며 기억을 끄집어 올려 오는 데 실패했다. 영상통화를 하던 그 날, 비열한 웃음을 웃는 성민을 보고 유민의 뇌는 기억 한 조각을 끄집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G.R의 손자. 미친개!’
유민이 잠시 잘나가던 기자시절, 로열패밀리들만 참석하는 기부행사에서 편집장 대행으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런 자리에 갔던 유민은 정재계에 유명 인사들을 보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우와. 저 사람은. 이야! 대박! 장난 아닌데.”
옆에서 지켜보던, 경쟁사 여자 편집장이 그런 유민에게 알은 체를 하고 싶어 입을 달싹 거리고 있었고, 그런 분위기를 눈치 챈 유민이 기분을 살살 맞추어 주었다.
“편집장님은 이런 행사에 자주 오시죠? 부러워요. 저 분들이랑 친분도 있으시겠죠.”
“흠. 뭐. 그냥 인사하는 정도.”
“우와! 인사도 해요! 멋있다. 진짜!”
유민의 말에 한껏 기분이 들뜬 편집장이 자신이 로열패밀리를 알고 있다는 것을 더 자랑하고 싶어 유민에게 으스대며 떠들어 댔다.
“쟤도 왔네? 으. 또라이”
“누구? 누구요? 어디요?”
“저기 보이지 짧고, 얼굴은 좀 귀엽게 생긴 지금 저기 들어오는.”
“네. 되게 귀엽게 생겼네요.”
“그러면 뭐해. 미친개인데.”
“네? 미친개요?”
“서기자 G.R이라고 알아?”
“당연히 알죠! 우리나라 정재계를 꽉 잡고 있다는 G.R이요.”
“그래. 아는 사람만 안다는 그 G.R, G.R은 신비주의고,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극히 꺼려해서 이런 행사장에는 거의 안 와. 쟤는 G.R회장 손자인데. 잰 좀 관종이라서 이런 데 와서 으스대는 걸 좀 좋아하더라고. G.R쪽에서는 그런 부분에서 좀 꺼려하는데, 잰 좀 별종이야.”
“와! 저 오늘 계 탔네요. G.R의 손자를 다 보고. 그런데 왜 미친개에요?”
“미친 짓말 골라 하니까. 아는 거지. 자신이 가진 힘을. 자기가 신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고 산데. 다 자기 아래 사람이고, 위의 사람은 없지.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사람취급 안 해주고, 다 발 아래로 보니까. 얼마나 이 세상이 우습겠어? 그냥 망나니야. 망나니. 안하는 게 없어. 불법적인 거는 다 해. 마약에 도박에 사람 때리는 건 부지기수고. 상상을 초월하는 짓을 하고 다니는데. 입에 담을 수도 없어. 사람도 죽이고…….이건 못들은 걸로 해줘. 어쨌든 자기 세상이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집안 믿고 제대로 미친개처럼 하고 다닌다고 미친개라고 불러.”
“진짜. 미친개가 맞네요. 세상 두려울 게 없는 사람이네요.”
“서기자. 혹시라도 나한테 이런 이야기 들었다고 기사를 쓸 생각이나, 저쪽 사람들에 대해 알아 볼 생각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기자가 한 둘이 아니거든.”
“진짜요?”
“그래. G.R이 왜 아는 사람만 아는 기업이겠어? 내가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절대 관심 갖지 마.”
“네.”
G.R의 문제아. 미친 개. 배성민. 성민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나서 유민은 좌절했다.
“바위에 계란치기, 아니 메추리알, 아니다. 이건 처음부터 게임이 안 되는 거잖아. 그렇게 대단한 기업에서도 못 찾는 사람을 내가 무슨 수로 찾는 다는 거야!!!”
유민은 괴로움에 소리치며, 죄 없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G.R이랑 관계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G.R의 손자와 만나게 될 줄 꿈에도 상상 못할 일이었다. 미친 개가 날뛸 만큼 중요한 일에 유민은 빠져든 것이었다. 발을 들여 놓은 곳이 하필 이런 시궁창이란 말인가.
“석호! 석호면 내 이야기를 믿어줄지도 몰라. 아니야. 석호까지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없어. 어쩌지.”
엄청난 일을 겪고 난 베로니카와 지훈은 할 말을 잃고, 멍한 눈을 하고 앉아 있었다. 이호영 덕분에 너덜너덜 해진 차는 한 허름한 여인숙 앞에 섰다.
“일단, 여기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어요. 이 차는 노출이 되어서 제가 따로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석호씨가 이분들 좀 모시고 들어가 주세요.”
호태는 베로니카와 지훈이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에, 석호에게 부탁했다.
“네. 알겠습니다.”
운전석에서 내린 석호가 베로니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잠시 기다려 주다 말을 꺼냈다.
“많이 놀라셨죠. 일단 자리를 옮기겠습니다.”
“아! 네.”
석호의 말에 지훈이 얼른 베로니카를 부축해 차에서 내렸다.
석호를 따라 여인숙의 한 허름한 방 안으로 들어온 베로니카는 아직도 좀 전에 본 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베로니카가 방바닥에 앉자 석호는 미니냉장고에서 생수 두 병을 꺼내 베로니카와 지훈에게 건넸다.
“많이 놀라셨죠? 압니다. 얼마나 놀라신지. 그리고 이게 무슨 일인지 궁금하기도 하실 거고요. 일단 제 소개 먼저 드릴게요. 전 지석호라고 합니다.”
“오지훈입니다. 그런데 진짜 어떻게 된 일인지. 아까 본 그 건 뭔가요? 그리고 그 사람. 아니 사람도 아닌 정체불명의 괴력의 사나이는 또 누구고?”
“저희도 아직 잘 모릅니다. 그저, 이 세상의 것이 아니고, 죽은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엄청난 힘을 가졌다는 정도만 압니다. 죄송합니다. 너무 아는 게 없어서.”
“아닙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저희 목숨을 구해주셔서.”
지훈은 예를 갖춰 깍듯이 석호에게 인사를 했고, 석호도 얼떨결에 같이 인사를 꾸벅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베로니카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다급하게 지훈을 찾았다.
“지훈씨! 지훈씨! 할머니! 할머니는요!”
“조금 다치신 것 같은데. 생명에 지장은 없으신 거 같아요. 많이 놀라셨지만 괜찮다고 하시네요.”
“네?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세요? 어떻게?”
“할머니도 저와 같은 능력이 있으세요. 할머니께 물려받은 능력이에요.”
“그렇구나.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아!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베로니카가 손을 모으며 감사의 인사를 석호에게 하자 석호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 제가 한 일은 운전밖에 없는 걸요. 호태 형이 다 하신 일인데. 호태 형 아니었으면 우린 모두 죽은 목숨이나 마찬 가지였는걸요. 감사의 인사는 제게 하지 마시고, 호태 형님께 해주세요.”
“아. 그 분 이름이 호태씨구나. 그런데. 저희를 어떻게 찾으신 거예요? 보현스님이 보내신 건가요?”
베로니카의 물음에 석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정말 다들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거죠?”
“네. 전 없어요. 지훈씨는요?”
“저도 괜찮습니........사실대로 말씀해주세요. 보현스님…….어떻게 되신 건가요?”
지훈의 갑작스런 질문에 석호는 놀란 눈을 하고 지훈의 눈은 다 알고 있으니 어서 말을 해달라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기…….그게…….보현스님은 아마도 돌아가신 거 같습니다. 저는 보현스님을 만나 뵌 적도 아는 분도 아니지만,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석호의 말에 베로니카는 믿기지 않는지, 자신도 모르게 날을 세웠다.
“잘못 아시는 거겠죠. 보현스님이 돌아가시다니. 아니에요. 잘 모르신다면서요. 아닐 거예요.”
지훈은 말없이 베로니카의 등을 토닥여 주었고, 베로니카는 흐느껴 울면서 지훈에게 안겼다.
“지훈씨. 아니죠? 아닌 거죠? 보현스님이 돌아가시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요.”
석호는 베로니카의 질문에 해줄 말이 없었고, 지훈도 말없이 베로니카의 등을 토닥이며 눈물을 흘렸다.
방문이 열리면서 호태가 들어서는데 이상해진 방안의 분위기를 보고, 무슨 일인지 몰라 석호를 쳐다봤다.
“보현스님의 안부를 물으시기에.”
석호의 말에 그제야 이해를 했다는 듯 호태는 낮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모두가 보현스님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보현스님이 그렇게 되신 것은 아까 만났던 그자의 짓이 분명합니다.”
“아까! 그 괴물 말입니까?”
지훈의 질문에 호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지금 슬퍼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들이 언제 들이닥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우리에겐 저들을 막을 방법도 없습니다. 저희도 목숨을 잃을 뻔 했었고,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베로니카 수녀님을 데려가기 위해 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베로니카가 자신의 이야기에 눈물을 훔쳤다.
“왜? 무엇 때문에 저를 노리는 건가요?”
“베로니카가 그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니까요. 보현스님은 오랜 시간 그들에게 맞서 싸울 준비를 해오셨습니다. 보현스님은 그 전 스님께, 또 그전의 스님은 또 그 전전 스님께. 이 일은 대물림 되고 있는 일입니다. 언제 나타날지 모를 그들을 막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해온 일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은신처로 가서 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이곳도 안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들을 강력한 힘을 가졌습니다. 거기에 대응할 준비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끼리 이러고 있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이 일을 함께 준비 해 오신 분들을 만나서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호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언가를 느낀 지훈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빨리 움직이셔야겠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찾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아까도 그랬고.”
호태의 질문에 베로니카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지훈씨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어요.”
“그렇군요. 그런데 그들은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느껴집니다. 보현스님이 저를 찾아낸 이유가 여기에 있었나 봅니다. 그들이 더 가까워 졌습니다. 빨리 가야 합니다.”
지훈은 베로니카를 부축했고, 석호와 호태도 뒤따라 방을 나섰다.
따르릉. 따르릉.
여인숙을 나서는데 석호의 핸드폰이 울리고, 석호는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고는 너무 놀라 자리에 우뚝 섰다.
[유민거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