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11-
석호는 호태의 그런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호태는 베로니카를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어렵사리 찾은 베로니카를 놓치면 어쩌나 싶어 노심초사인 석호와 달리 호태는 베로니카를 만났다는 이유하나만으로 느긋하게 구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코앞에 두고서, 뭘 기다린다는 건지. 이러다 놓치겠어요. 형님.”
“베로니카도 제가 여기에 온 걸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깊은 인연의 끈으로 연결된 사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누군가 자신을 데리러 온 걸 알고 있을 것이고, 그런 우리의 마음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마음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억지로 끌고 갔다가는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호태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만 늘어놓자, 석호는 어쩔 수 없이 호태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석호는 이 일을 위해 평생을 바친 호태의 말을 듣는 것이 맞는다고 판단했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날 늦은 밤, 호태는 곤히 잠든 석호를 다급히 깨웠다.
“지금 움직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네?”
“지금이 적기입니다. 이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끝난 거 같습니다.”
“아! 네!”
***
석호는 아무 말 없이 운전을 하고 있는 호태를 슬쩍 쳐다봤다. 석연치 않은 부분 때문에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지만, 석호는 이런 일에 상식적인 것들이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기에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금은 믿어보자.’
차 안에 흐르는 무거운 분위기가 불편했던 지훈이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말할 타이밍을 찾아보려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기분보다 다른 사람의 기분이 어떤지가 지훈에게 더 중요했던 지훈은 그렇게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 했는데, 지훈에게 타인의 마음을 읽은 능력이 주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보현스님이 자신의 능력을 높이 사주는 데에 대해서는 별 감흥이 없었다. 지훈은 그런 능력이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진 살아남기 위해 발달 된 능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차 안에 감도는 무거운 침묵과 각자의 생각들. 석호와 호태의 생각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지훈은 자신이 원하지도 않은 정보들이 흘러들어 오는 것을 막고 싶었다.
“저기,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지훈의 질문에 호태가 대답했다.
“40분 정도 걸릴 겁니다.”
“다행이네요. 사실 배도 좀 고프고, 화장실도 가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면서 지훈은 실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지훈씨 말 들으니 저도 갑자기 배가 고파지네요. 다들 식사 안 하셨죠?”
베로니카의 질문에 다들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절 어떻게 찾아내신 거예요? 저 아까 무슨 첩보영화 찍는 줄 알았어요. 헤헤.”
“하하하. 수녀님이 첩보영화도 봅니까?”
지훈은 박수까지 쳐가며 웃어댔고, 베로니카가 눈을 흘겼다.
“그럼, 수녀는 영화도 안 보는 줄 알았어요?”
“화나 신 겁니까? 잘 몰라서 그런 거죠. 그런데 웃기잖아요. 하필이면 보신 영화가 첩보영화라니. 어떤 영화였어요?”
“됐네요. 무슨 영화를 봤는지 지훈 씨한테는 절대! 절대! 말 안 해 줄 거예요.”
토라진 베로니카를 보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는 지훈이 쿡쿡 거렸고, 베로니카는 지훈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석호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고, 베로니카가 눈을 흘기는 모습에서 유민을 발견하고는 석호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기륭은 이호영에게 베로니카의 행방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잘했어. 이제 데리고 오는 일만 남았구나. 그런데, 그 놈들은 어떻게 안 죽고 살아있는 거지.”
“.......”
“그래 그런 일까지 네가 무슨 수로 알겠나. 그래 잘했다. 안성국이 하는 일은 잘 진행되고 있는 거겠지.”
“네.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알았다. 그만 가봐라.”
이호영은 기륭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기륭은 이호영이 나가자마자, 불편한 심기를 들어냈다. 성민의 입에서 듣고 싶었던 소식을 이호영의 입에서 베로니카의 소식을 들은 것이 못마땅했다.
“도대체 이놈은 무얼 한다고!”
신경질적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어 성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딸깍
“할아버지”
“너! 도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이 정신 나간 놈! 일 하나를 제대로 처리를 못해서! 넌 뭘 하는 놈……. 하!”
“이호영이 베로니카의 행방을 찾은 거 압니다. 하지만, 할아버지 앞에 데려 온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할아버지 눈앞에 베로니카를 데려다 놓을 사람은 바로 저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한 건지.”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손자를 안 믿으면 누굴 믿습니까? 하리님이 선택한 사람은 저지. 할아버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뭐!”
“베로니카가 어디 있는지, 누굴 잡으면 베로니카를 잡을 수 있을지 모두 하리님이 알려주신 겁니다. 제게 직접 알려주신 일인데. 하리님의 말씀을 거역하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이…….이.”
“더 이상 하실 말씀 없으면, 전 이만 바빠서요. 걱정 마세요. 베로니카 이틀 뒤면 할아버지 눈 앞에 있게 될 거니까.”
뚜뚜뚜.
성민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은 기륭은 화낼 기력도 없는 지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봤다. 당당하다 못해 교만하기까지 한 성민의 태도를 보자, 울화가 치민 기륭이 얼른 하리님이 있는 붉은색 문의 방으로 향했다.
‘그럴 리 없어. 저런 멍청한 놈한테 나를 거치지도 않고, 직접 하리님이 말씀을 전했을 리가 없어. 이 방이 아니면, 하리님의 말을 들을 수도 없는데.’
마음과 달리 늙은 몸은 생각처럼 빠르게 움직여 주질 않았고, 몇 걸음 채 때지도 않았는데 숨이 목구멍 까지 차올라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바람 빠지는 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방에 도착하자 숨을 가다듬지도 않은 채 하리님에게 따지듯 물었다.
“하리님. 제 손자가.”
기륭의 얼굴도 바라보지 않고, 하리님은 그런 기륭의 마음을 꿰뚫듯 물었다.
“의심하는 게냐?”
“네?”
“성민에게 내가 직접 이야기를 전했다. 느려터진 네 놈이 언제 내 이야기를 전할지 모르니까.”
“그…….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내가 하는 말을 왜! 그대로 전하질 않느냐! 감히! 네가 내 말을 전하지도 않고, 심지어!!!!! 묵살해!!!!!”
화가 난 하리님의 검디검은 머리카락이 나무의 뿌리처럼 뻗어 나가며 점점 길어지더니 온 방을 가득 채웠고, 2미터가 넘는 장신인 기륭의 몸을 가뿐히 휘감아 올렸다. 하리님의 머리카락에 휩싸인 2미터의 기륭의 모습은 마치 커다란 누에고치를 연상케 했고, 기륭은 숨이 막히는지 다급하게 하리님을 불렀다.
“하! 하! 하리님!!”
“그 입 다물어라! 더 이상 그 입으로 떠들어 대지 못하게 만들기 전에! 언제부터 네가 내가 하는 말을 골라서 전하였느냐! 건방진 놈!!! 내가 그 동안 말없이 네가 하는 짓을 봐주니까? 내가 우습더냐?”
“아닙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실 수가! 컥! 컥!
하리의 머리카락은 기륭의 얼굴마저 감싸고 기륭은 숨이 막히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두 번 다시 내게 복종하지 않으면 죽음이다.”
정신없이 잠에 빠져있던 유민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눈을 뜨니 시간은 어느 정도 흘러간 후였다. 유민은 다급한 마음에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해보지만 여의치 않다. 씁쓸한 마음에 유민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가 웬일이야?”
시큰둥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 유민을 말을 잇지 못했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유민의 엄마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너 지금 울어?”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내려 하지만 마음처럼 되질 않았다.
“무슨 일은…….그냥. 전화했어.”
“내가 뭐랬니? 기자니 뭐니! 그 딴 거 때려치우고, 내려오라고 그랬잖아. 그게 할 짓이니? 너 나이가 몇이야? 그냥 내려와서 가게나 도우며 살면 되지. 무슨 대단한 벼슬 한다고, 그 고생을 하는 지. 대학 나오면 뭐해!”
엄마의 잔소리가 이렇게 듣기 좋은 소리였는지, 유민은 가만히 엄마의 잔소리를 말없이 듣는다. 반응이 없자 유민 엄마는 평소답지 않은 딸의 반응에 걱정이 됐다.
“너. 진짜 무슨 일 있지? 내가 이런 말 하면 벌써 난리를 쳐도 몇 번이나 쳤을 애가. 사람만 안 죽였으면 된다. 아니, 죽였어도 상관없어. 어떤 일이든.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말고, 이 애미한테 말해 봐. 혼자서 그렇게 끙끙대고 있지 말고! 이 답답한 것아!”
“엄마…….엄마!!!!”
엄마의 걱정가득한 잔소리에 유민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지금 당장 자신에게 있었던 모든 일을 다 말하고 싶었다. 자신이 당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모조리 고하고 싶었다. 그러면 당장이라도 엄마는 그 치들을 찾아 가서 내 딸한테 한 짓 너도 똑같이 당해보라며 머리끄덩이를 잡고 쥐고 흔들어줄 것이다.
엄마라면 분명히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해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성민이 어떤 놈이던가. 미친 놈 중에 미친 놈. 그런 일을 엄마가 당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해져 왔다.
말할 수 없었다. 아니 해서는 절대 안 되는. 이제는 자신이 엄마를 지켜야 할 나이지, 기댈 나이가 아니지 않던가. 가까스로 울음을 그치고, 유민은 다시 원래의 유민으로 돌아왔다.
“걱정 마. 사람 죽여도,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할 수 있어.”
“힘들면 힘들다 말하면 되지. 뭘 그렇게 끙끙대는지. 때려치우고 싶으면 언제든지 때려 치워. 이제 엄마도 가게 일 힘에 부친다. 다들 이런 가게하고 싶어서 난리인데. 넌 왜 이런 금싸라기 가게를 안 하려고 그 난리라니!”
“엄마 나이가 되면, 그 때 그 가게 하려고. 지금은 해보고 싶은 게 더 많아.”
“에휴! 그래 내가 널 어떻게 이기냐. 네 멋대로 해라! 언제 내 말을 들었니. 그래도 힘든 일 있으면 꼭 말하고, 바보 같이 울긴 뭐 하러 울어. 마음 아프게.”
유민이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나자, 이제는 엄마가 흐느껴 울었다.
“내가, 딸 년 하나 있는 거 덕 좀 보고 살라고 했더니. 남편 복 없는 년은 자식복도 없다고.”
“엄마, 미안해.”
“오늘 너 답지 않게 왜 그래! 어깨 당당히 펴고! 너한테 누가 뭐라 하거든. 말해! 엄마 한 성격 하는 거 알지!”
“알지. 우리 이 여사 한 성격하는 거. 엄마 나 바빠서 이제 전화 끊어야겠다. 밥 잘 챙겨 먹고, 손목 아프다며 병원 좀 가. 만날 아프다고 하지 말고.”
“병원 가봐라. 뻔하지. 물리치료나 하고, 약이나 주고. 잠시야. 잠시. 일시적인 거지. 그게 다 나을 병도 아니고, 넌 네 걱정이나 해. 그래도 우리가 이만큼 사는 건 다 엄마가 열심히 성당을 다녀서.”
유민은 엄마의 말에 무언가 뇌리를 스쳐지나가고.
“엄마! 엄마가 내 방에 묵주 놔두고 갔어?”
“무슨 묵주?”
“아니, 내 침대 있는 방에 묵주가 있더라고.”
“얘가 지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가져다 준 거 네가 술 쳐 먹고 잊어버렸잖아. 이 번에 묵주 가져다준다고 했는데, 엄마 가게 일 바빠서 아직 못 간다고 했는데. 얘! 정신없는 거 봐. 벌써 부터! 늙은 애미보다 더 하다. 그럼 찾은 거야? 잃어버렸다는 거! 넌 젊은 애가 정신을 어디다. 찾았으면 다행이고, 그 거 네 이모가 외국까지 가서 사다 준건데.”
“내가 잃어버린 묵주는 이모가 외국에서 사다 준 거고, 내가 본 묵주는 처음 보는 거였어. 그럼 누가 가져다 논 걸까?”
“너 지금 누구랑 이야기 하니?”
“엄마! 고마워! 알았어. 진짜! 고마워! 나 생각났어! 역시 엄마는 해결사야!”
“얘!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