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18-
지훈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잠시 기절했었는지 누운 상태였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해담스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담스님이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눈을 들어 바라 본 곳에서 형무와 해수, 석호가 힘겹게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그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어째서 인지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질 않았다. 해담스님의 목소리가 멀어지더니 지훈은 또 다시 쓰러졌다.
얼마 시간이 흘렀을까? 지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 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몸을 움직이는데 해수가 다가왔다. 지훈이 해수의 얼굴을 올려다보는데 얼굴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나있었고, 부상을 당했는지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어떻게.”
지훈이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 하는 모습에 해수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해수를 안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해수는 밝은 사람이었다. 그런 해수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잘은 몰라도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 보였다. 해수는 말 하려 하지 않았지만, 지훈이 가진 유일한 능력으로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지훈은 숨이 ‘턱’ 막힌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처음으로 알았다. 지훈의 눈빛이 흔들렸다. 해수는 말을 꺼내기 전에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베로니카를 데려갔어요. 그들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들이 힘이…….”
“맞아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우리는 그들을 이길 수 없어요. 많이 다치신 거예요?”
해수가 씩 웃으며 팔을 들어보였다.
“뭐. 이정도야. 금방 낫겠죠. 저 보다 지훈씨가 걱정이네요.”
“네?”
해수의 생각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해수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그대로 따라갔다. 몸통에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었다. 정신이 온전히 들지 않았을 때는 몰랐던 고통이 전해져 왔다. 지훈은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고, 그 모습을 보는 해수도 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많이 아프죠? 갈비뼈가 3개나 나갔는데 다행히 장기는 안 건드렸데요. 한 동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래요.”
“그런데? 다른 분은? 다 괜찮으신 거죠?”
지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병실 문이 열렸다. 해담스님과 형무, 해수가 들어섰다. 지훈이 일어서려는 것을 그러지 말라는 손짓을 하며 해담스님이 지훈 곁으로 다가왔다.
“좀 어떠십니까? 많이 힘드시지요?”
“아. 네. 안 아프다면 거짓말이고, 좀 많이 아프네요. 다른 분들은 괜찮으신 겁니까?”
“보시다시피 모두 괜찮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갔으면 이렇게까지 다치시지 않으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스님이 죄송할 일이 아닌데요. 뭘. 그런데? 석호 형은요?”
“아. 석호씨는 지금 학중회장님과 함께 잠시 다녀 올 곳이 있다고 하셔서 그곳에 가셨을 겁니다.”
“네. 저기…….베로니카는 어떻게 그들의 손에 넘어간 건가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지훈은 되도록 누군가의 생각을 엿보기 보다는 직접 물어보는 쪽을 택했다. 그 것이 양심상으로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차원에서도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해담스님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 이미 그들은 떠나가는 중이었고, 우리는 그들을 뒤 쫒아 베로니카를 구해 오려 했었습니다. 그런데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럼. 베로니카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어서 우리가 구하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야 하지만, 베로니카를 찾아 줄 호태씨가 지금 행방불명 된 상태입니다.”
“네?”
기륭은 기쁨에 성민의 어깨를 토닥였다. 성민은 기륭의 손길에 하얀이를 마음 껏 드러내며 웃었다.
“네가 해낼 줄 알았다. 역시! 내 손주야! 하하하.”
“뭐. 좀 어렵긴 했지만, 이게 다 하리님 덕분이죠. 하하.”
“자. 그럼. 지체할 시간 없이 바로 의식을 거행할까?”
“네.”
기륭과 성민은 베로니카를 데리고, 한솟대바위로 향했다. 안성국과 이호영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한솟대바위에 도착했다. 의식을 거행하기로 한 정확한 날짜에 베로니카를 찾았고, 이제 그 시간에 맞춰의식을 거행하는 일만 남았다.
기륭은 오랜 시간 이 일에만 매달렸던 지난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공들인 시간과 노력에 대한 성과를 이제 이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만감이 교차했다. 보름달이 모습을 드러냈고, 예사롭지 않은 바람이 한솟대바위 위로 불었다.
성민은 준비해온 것들을 하나 둘 꺼내들었고, 이호영과 안성국도 성민을 도왔다. 기륭이 한솟대바위 위에 서더니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기륭이 성민을 돌아보자 성민이 시간을 확인했다.
9시. 8분.
“1분 남았습니다.”
성민의 대답에 기륭이 손을 내밀었고, 성민은 하리님이 그려져 있는 그림을 기륭에게 건넸다. 기륭이 그림을 펼쳐들자 이호영이 베로니카를 번쩍 안아 한솟대바위 위에 바르게 눕혔다.
베로니카는 이곳에 오는 내내 미동도 없이 죽은 사람처럼 쓰러져 있었다. 어떠한 힘이 베로니카를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지 알 수 없었지만 베로니카는 유민의 집에서부터 단 한 번도 깨어나질 않았다.
거기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사는 마취주사였기 때문에 일정시간이 지나면 의식이 돌아와야 했지만, 베로니카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베로니카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죽은 몸뚱어리 따위는 필요 없었다.
베로니카만이 하리님을 몸주로 받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었고, 드디어 하리님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이 세상을 다시금 지배하게 될 것이었다.
9시 9분
기륭이 그림을 들어 달 쪽을 향해 펼쳐들었고, 달빛을 강하게 받은 그림이 요동쳤다.
기륭은 그림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고, 성민이 기륭을 도우러 가기 위해 움직였지만 기륭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성민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가서 기륭이 하는 의식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기륭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왔고, 그림 속에서 하리님이 춤추듯 빠져나왔다. 보라색의 기운이 도는 하리님의 기운이 달빛을 받아 점점 더 진한 색으로 변하면서 몸도 커져갔다. 처음엔 사람의 몸 크기 정도였지만, 산을 품에 안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되자 하리님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마지막 발까지 완벽하게 그림에서 빠져나온 하리님은 오랜 만에 나온 바깥세상을 잠시 둘러보더니 베로니카가 누워 있는 한솟대바위를 내려다보았다. 베로니카의 몸에 맞게 점점 크기를 줄여가더니 베로니카의 몸 안으로 쓱! 하고 들어가 버렸다.
하리님의 영이 베로니카의 몸 안으로 들어가자 베로니카의 몸이 들썩였다. 베로니카의 몸이 눈을 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다들 보니까 좋네.”
겉모습은 베로니카였지만, 목소리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목소리만은 하리님의 목소리였다. 하리님이 베로니카의 몸에 들어간 것을 알게 된 기륭과 성민, 그리고 안성국과 이호영은 몸을 납작 엎드렸다.
“하리님!!!”
남자 네 명의 우렁찬 목소리가 늦은 밤 산 속에 울려 펴져 나갔다. 하리님은 환대에 기쁜 미소를 지으며 한솟대바위에서 내려왔다.
“공기가 예전만큼 못하구나. 하긴 세월이 얼만데.”
“몸은 좀 어떠십니까?”
기륭의 염려에 하리님은 몸의 상태를 확인했다. 베로니카가 완전히 하리님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 상태이기에 하리님의 의지대로 완전히 움직여 주진 않았다. 적응 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릴지는 몰라도 베로니카의 기운이 강해 곧 하리님은 기운을 되찾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인간 세상이 얼마나 바꾸었는지 어디 한 번 구경해볼까?”
그렇게 말하고 하리님은 한솟대바위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호영이 그 뒤를 따랐고, 기륭과 성민도 안성국의 힘에 입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모두 사라지고 난 후에야 석호와 학중이 모습을 드러냈다. 석호는 왜 학중이 저들이 하는 대로 가만히 지켜만 보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날의 그들의 힘을 생각했을 때 섣불리 움직이는 것도 위험한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비겁하게 숨는 건 석호에게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저들을 염탐하러 온 것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이곳에 올라온 것이니 아쉽지만 다음기회를 노려야했다.
유민이 죽던 날, 석호는 이성을 잃고 힘을 함부로 썼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유민을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또 다시 그런 힘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민은 죽었다.
망연자실하고 있는 석호에게 학중이 이상한 말을 들려주었다. 어쩌면 유민을 살릴 수 있다고 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유민의 머리에 선명히 남아있는 총알자국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말해주고 있는데도, 석호는 아직 유민을 놓아줄 자신이 없어서 말이 안 되는 소리인 줄 알면서도 학중의 말을 믿고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다.
학중은 바닷가에서 해수와 형무가 건져 올린 옥염주를 가진 주인을 찾아주는 기계를 석호가 열었을 때에 어쩌면 석호가 옥염주의 주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아니. 확신했었다. 기계를 작동시킬 수는 있었지만, 석호는 옥염주의 주인이 아니었다. 석호는 자신이 옥염주의 주인에 대한 별 생각이 없었지만 학중은 기대했었다.
“네가 네 아버지처럼 옥염주 주인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전,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아니잖아요. 아저씨 말씀대로라면 우리 아버지 대단한 일을 하셨던 분인데. 전 그럴 주제가 못 되는 사람이거든요. 전 제가 옥염주 주인이 아니란 게 더 마음이 놓여요. 저 같은 사람이 옥염주 주인이 된다면, 정말 이 세상이 걱정 될 것 같거든요. 하하.”
석호는 빈말을 할 줄 모른 사람이었고, 그 말은 진심인 듯 보였다. 학중만 안타까워 할 뿐이지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마음을 접어가던 학중이 유민이 죽던 날 석호가 보여주었다는 힘에 대해서 듣고 나서 다시금 옥염주의 주인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걸었다. 말이 없는 형무와 해담스님도 해수가 석호를 칭찬하는 말에 장단을 맞춰 줄 정도였다.
“우와! 진짜 장난 아니었다니까요! 우리 도와주러 온 게 맞구나. 완전 멋있었어요. 막! 몸에서 어마 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데, 석호오빠가 아니었다면 우린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석호형이 아니었다면. 힘들 뻔 했어요."
직접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까웠을 정도로 석호가 어떤 힘을 발휘했는지 학중은 궁금했다. 정작 석호는 유민이라는 여자가 죽은 것에 상심이 너무나 커서 자신이 어떠한 함을 발휘했는지에 대해 도통 관심이 없어보였다.
전투의욕을 잃은 군인 같아 보였다. 석호에게 싸움을 해야 할 이유와 목표를 설정해주는 것이 학중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방법은 단 한가지뿐이었다. 여자를 살려내야 했다.
“석호야. 너에게 이 분이 아주 중요한 사람이니?”
“네? 아마도요.”
“이 힘은 딱 한 번 쓸 수 있는 힘인데. 아주 위험해서 어쩌면 안 쓰느니만 못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이 힘으로 그 여자 분을 살려볼 생각이 있니?”
“네? 죽은 사람을 살린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