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어둠의 태동. 07-
학중은 해담스님의 말에 눈물이 그렁거렸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호태와 해수도 마찬가지였다. 학중은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오히려 해담스님을 위로해 주었다.
“보현스님이라면 그렇게 하고도 남으실 분이시지요. 백번이고 천 번이고, 해담스님이 아니더라도 저희를 위해서라도 그러셨을 겁니다. 옳은 일을 하고 가신 겁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학중의 말에 해담스님은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었지만, 늘 자신과 연결되어 있었던 보현스님의 기운이 뚝 끊어져 버렸다. 그 어디에서도 보현스님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곳에 오고서도 해담스님은 마지막 희망을 끈을 놓치 않고, 더욱더 정신을 집중해서 보현스님을 찾았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해담스님이라도 살아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저보다 이 모든 일을 알고 있는 보현스님이 살아계셨어야 하는데.”
“보현스님이 그 만큼 해담스님을 믿으신 걸 겁니다. 우리는 보현스님이 하시려 했던 일을 최선을 다해 해내면 됩니다. 그것이 보현스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 그만 자책하십시오.”
“고맙습니다.”
마음을 추스른 해담스님이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학중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찌 제가 그곳에 있는지 아시고, 찾아오셨습니까?”
“보현스님께 아무 말씀도 못 들으셨나 봅니다. 그 곳이 저희의 1차 집결지였습니다. 해담스님과 저희 아이들이 베로니카 수녀님을 안전하게 모셔오는 것이 해담스님과 저희의 첫 번째 임무였습니다. 나머지는 직접 현장에 있었던 호태에게 들으시죠.”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호태가 고개를 끄덕이고, 해담스님 앞에 섰다.
“네. 저희가 집결지에 갔을 때는 이미 적의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해담스님을 구해내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되어, 스님을 먼저 구출해서 나왔습니다. 남아 있는 형무가 뒷일을 알아서 처리할 것입니다.”
해담스님이 감사의 뜻으로 호태에게 합장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분들 아니었으면 전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보현스님이 구해주신 목숨 값도 못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베로니카 수녀님은 그 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베로니카 수녀님의 행방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는데. 그럼 베로니카 수녀님은 어디로 가신 걸까요?”
해담스님의 이야기에 학중과 해수, 호태의 표정이 어두워 졌다. 일이 시작되기도 전에 기운 빠지는 소식과 보현스님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모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실의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아는 학중은 이들을 이끌어 나가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이 시작되었으니 시간이 없었다.
“곧 형무가 오게 될 것이고, 형무가 합류하면 바로 우리도 움직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요. 우리가 먼저 베로니카를 찾아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지금 보현스님도 없으시고, 나머지 옥염주 주인도 찾지 못했습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우린 더더욱 단단히 뭉쳐야 합니다. 힘을 보탭시다.”
석호의 오프 날, 유민과 석호는 이른 새벽부터 산을 올랐다. 석호는 빠른 걸음으로 산을 올랐고, 유민은 그런 석호를 따라가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얼마나 더 남았어? 헉! 헉!”
유민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묻자, 석호는 유민의 배낭을 뺏어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는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저기, 이제 30분 올라왔는데. 그래도 산악동아리 회장까지 하신 분인데 부끄럽지도 않아?”
“야, 너도 내 나이 되 봐라. 아 죽겠다. 물! 물 좀.”
석호가 자신의 가방에서 물을 꺼내 건네주었다. 자신도 물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이렇게 지체하면, 거기까지 가기 힘들어. 우리 지금 두 군데나 들러야 한다고, 한솟대바위랑, 스님들이 거처하는 산골자기 절이랑은 반대 방향이라서 서두르지 않으면 밤이 돼! 그러니까. 좀 힘들더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고!”
물을 마시는 것인지 반쯤 흘리는 건지 정신을 못 차리던 유민이 눈빛을 빤짝이며 말했다.
“그래! 거기까지 헬기는 못 가나? 헬기 갈 수 있는 거 아니야? 어?”
“하! 말을 말자, 말을. 기사라도 한 줄 쓰고 싶으면 빨리 움직이시고, 빨리 안 움직이면 버리고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그렇게 말하고 석호는 성큼 성큼 산을 올라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민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고 구시렁거리며 석호 뒤를 따랐다. 몇 시간 후, 스님들이 묵는 절 근처에 다다른 유민은 놀란 눈으로 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이게! 이게 다 뭐야? 네가 말하던 수준이랑 다르잖아!”
“뭐가?”
“우와! 더 대박! 빨리! 빨리 가방에서 사진기 꺼내 줘! 빨리!”
“알았으니까. 호들갑 좀 떨지 마. 내가 혹시나 하고 하는 말인데, 사진만 찍어서 이상한 추측성 기사 낼 거면 지금이라도 접어. 내가 볼 땐 진짜 심각한 사건이라고!”
찰칵! 찰칵! 찰칵!
석호의 말에 아랑곳 하지 않고, 유민은 연신 사진기의 셔터를 눌러댔다. 석호는 한숨을 푹 쉬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유민이 다급한 목소리로 석호를 불렀다.
“석호야! 빨리! 빨리!”
석호는 유민의 쪽으로 걸어갔고, 유민의 손에는 반쯤 타버린 염주 하나가 들려져 있었다.
“이거 염주잖아.”
석호가 염주를 만져보려고 하자, 유민이 얼른 석호의 손에 사진기를 들려주었다.
“어서 찍어. 뭐해! 멍청하게 서서! 증거물이잖아! 증거물! 맞다! 나 장갑 안 꼈는데! 내 지문 막 묻은 거 아니야?”
“탄 건데 무슨 지문이 나오겠어. 일단 사진 먼저 찍자. 내가 둘러볼 땐 이런 거 없었는데.”
찰칵! 찰칵!
석호는 유민이 든 염주를 사진에 담았고, 유민은 자신의 가방 안에서 지퍼팩을 꺼내들어 염주를 조심스럽게 담았다.
“이야! 준비성 장난 아닌데! 그런 건 또 언제 챙겼데?”
“야! 내가 기자 밥 먹은 게 얼만데! 사고 쳐서 계약직으로 전락만 안했으면 나! 기자생활만 십년이 넘어간다고!”
“네. 네. 대단하십니다. 다 그 성질 머리 덕분이지. 누굴 탓하겠습니까?”
유민이 석호에게 때리려는 시늉을 하고, 석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유민과 석호는 다시 주위를 샅샅이 뒤졌고, 이번엔 석호도 무엇인가 발견했다.
“선배! 사진기랑 지퍼팩 준비 해줘!”
“어! 어! 여기, 여기! 뭐! 좀 찾았어? 단추? 단추 맞지?”
석호의 손에 든 단추는 그냥 아주 평범한 흰색 와이셔츠 단추였고, 유민은 눈을 반짝이며 사진을 찍어댔다.
찰칵! 찰칵!
“선배. 여기 정말 이상하지 않아? 이 단추는 또 멀쩡해. 스님만 없어졌는데 이 와이셔츠 단추는 뭐냔 말이야? 나무는 무엇인가 날카로운 것에 완벽히 절단 되어 있고, 여기 피는 누구 피 일까? 그리고 타버린 재와 염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건지 도저히 감이 안 와. 선배는 머 좀 감이 안 와? 기자들은 특유의 그런 감이 있다며?”
“음. 전혀! 전혀! 안 와! 아!!! 머리야! 넌 왜 하필 이렇게! 어려운 일을 물어다 와. 나 요즘 스트레스 받아서 원형탈모 생기고 있는데!”
“아니! 언제는 일 물어다 와 돌라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이제는 물어다 줬다고! 난리야!”
“야! 사람 수준 봐 가면서! 어! 수준에 맞는! 그래! 맞춤형 일거리를 가져와야 할 거 아니야!”
“지금 선배가 찬밥 더운밥 가리게 생겼어! 그냥 주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최선을 다해야지. 그런 정신으로 무슨 기자를 한다고!”
“어쭈! 이제 이게 내 기자 정신까지 들 먹이냐! 일 하나 물어다 주고! 이게! 어디서 유세야! 유세!”
“유세는. 그만합시다. 이럴 시간 없어. 이제 한솟대바위 쪽으로 가봐야지. 여긴 한 번 더 와봐야 할 거 같아.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분명 있어. 그러니까! 한 번 더 오는 거다. 알았지?”
“야! 내 기자정신이 어쩌고저쩌고 할 땐 언제고?”
“그래도 머리 하나 보다는 둘이 낫지. 안 그래? 서둘러! 이러다 늦겠다.”
석호는 앞질러 산을 내려갔고, 유민은 투덜거리면서 계속 석호를 째려봤다.
“저 새끼. 아오! 아니지 그래도 내 일거리를 물어다 주는데, 내가 이런 말 하면 안 돼지. 암! 같이 가! 후배님!”
몇 시간 뒤 석호와 유민은 한솟대바위에 다다랐다. 기진맥진한 유민은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을 힘도 없는지 그 자리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헉! 헉! 아! 이런 미친! 여기를 왜 올라와! 쿨럭! 내가 미쳤지!”
유민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버렸고, 석호도 조금 힘든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석호는 바위에 처참하게 박혀져 있는 정이 마치 바위에 흐르는 숨통을 막아놓은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이런 짓을!”
“물! 헉! 헉! 물 좀! 물 좀 주소!!!”
유민이 땅바닥을 기어오며, 땀에 젖어 엉망이 된 얼굴로 석호를 애타게 불렀다. 석호는 자신의 가방에서 물을 찾는데 다 먹은 빈병만 남은 걸 보고, 유민의 가방을 뒤져서 물병을 꺼내는데 무언가 같이 딸려 나오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석호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줍고, 종이에 그려진 이상한 표기를 보았다. 참다못한 유민이 벌떡 일어나 석호의 손에 들려진 물을 가로채서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고, 이제야 살만 한지 석호의 손에 들려진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어. 봤냐! 이 누님이 또 이걸 어디서 구했냐! 하면”
“이거!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석호는 다급한 목소리로 유민에게 물었고, 유민이 의아한 눈빛으로 석호를 보고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이거 어디서 구했는지 말하려고 하고 있잖아.”
“아니! 어디서 구한지 중요한 게 아니야!”
석호는 자신의 손에 들려진 종이를 갈기 발기 찢었고, 유민이 말릴 틈도 없이 석호는 찢어진 종이를 바람에 날려 보냈다.
“야! 미쳤어! 뭐하는 짓이야!”
“오늘! 여기 온 거! 잊어! 우리 여기에 온 적 없는 거야. 알았지!”
유민이 잘 못 본 것인지, 석호는 약간 불안에 떠는지 눈빛이 불안해보였고, 힘주어 말하는 석호의 말에 무어라 반박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 어. 그..그래.”
석호는 그렇게 말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고, 그런 석호의 행동에 당황한 유민이 다급하게 석호를 불렀다.
“야! 지석호! 잠시만 거기 서봐! 야! 야! 악!”
철퍼덕!
유민이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그제야 석호가 뒤돌아봤다. 석호는 넘어진 유민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유민을 일으켜 세웠다. 유민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석호의 목덜미를 손으로 잡아챘다.
“야! 지석호! 너 내가 하는 말 못들은 척하고 막 그러지! 어! 뭔데? 뭐 때문에 아연실색을 하면서까지 그냥 내려오는 건데? 어떻게 올라간 곳인데!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내려 오냐 말이야!”
“하. 선배. 일단 내려가자. 날이 어두워지면 내가 아무리 이 산의 지리를 잘 안다고 해도 우리 둘 다 위험해져. 선배의 궁금증보다 목숨이 더 중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선배.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야. 선배 이 사건에서 손 때. 목숨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 명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