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어둠의 태동. 09-
성민도 이번엔 지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말에 주먹을 힘껏 쥐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한 번만 더 그 더러운 주둥아리에서 내 아버지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그 때는 아무리 너라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지금 어디서 건방지게 이래라 저래라 하고 있어. 니들은 니들 일 잘하면 되고, 난 내 일 잘하면 되니까. 각자 알아서 잘 하자고.”
성민은 안성국을 한참을 노려보더니 자리를 떠났다. 성민이 떠나는 모습을 확인한 이호영이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나 안성국에게 다가갔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으신데, 어차피 죽은 몸이라 아프지도 않습니다. 저 놈 신경 건드려 봤자 좋을 것도 없는데.”
“우리가 자기네들 개인 줄 착각을 하기에. 확실하게 말해 둘 필요가 있어서 한 것뿐이다. 곧 하리님이 이 세상에 오실 건데. 사람들의 눈 따위 신경 쓰면서 일 할 필요 없다. 우리는 우리식대로 하자.”
“네. 알겠습니다.”
호태는 베로니카 수녀님을 찾기 위해 며칠 째 성당을 돌아다녔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대체 어디에 계신 겁니까. 베로니카 수녀님.“
학중은 호태만이 베로니카 수녀님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호태야. 아무도 베로니카 수녀님을 뵌 분은 없다. 보현스님은 너만이 베로니카 수녀님을 알아볼 수 있다고 말해주셨을 뿐. 우리도 아는 것이 없다. 미안하구나. 네가 힘들겠지만. 노력을 해주어야겠다.”
호태는 학중의 말을 생각하던 중, 잠시 자신의 어린 날이 떠올랐다. 어린 날, 호태는 앵벌이와 소매치기로 매일 매일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호태를 학중은 오랜 시간 찾아다녔다고 했었다.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뭔지 학중과 호태는 늘 어긋났었고, 호태가 15살 되던 해에 드디어 오랜 학중의 노력 끝에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다.
학중은 호태를 처음 만난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자주 말했었다. 15살의 호태의 눈은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학중은 그런 호태의 눈을 보고 눈물 흘리지 않을 사람이 없을거라고 했다. 그 짧은 세월을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는지 고통과 힘겨움, 두려움을 모두 담고 있는 호태를 보며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학중은 호태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조금 더 널 일찍 찾았다면 네가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정말 미안하구나. 미안하다.”
호태는 다 큰 어른이 그렇게 엉엉 우는 모습에 얼이 빠지면서도 일면식도 없는 학중이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신이 뭔데? 나 알아? 그렇게 불쌍하면 돈이나 주시던지.”
겁에 질린 눈을 하고서는 다치지 않으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자세를 취하는 호태를 보며 학중은 호태가 너무나 가여웠었다. 으르렁 거리며 아무도 자신 곁에 두지 않으려 하지만 진짜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제발 누가 나를 알아봐주세요. 누구라도 이런 내 마음을 안다면 저를 좀 돌아봐주세요. 라고 호태는 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네가 부모와 연이 없었던 것은 너의 잘못도 너희 부모의 잘못도 아니다. 네가 그런 운명으로 태어나게 한 우리의 잘못이지. 그러니 원망을 하려면 날 원망해라. 호태야. 언젠가 우리 이 질기고 긴 운명의 끝을 아름답게 장식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시간을 위해 나와 함께 가지 않으련? 너에게 진 빚을 내가 갚을 수 있는 기회를 다오.”
어린 호태는 학중이 하는 말을 이해 할 수 없었다. 학중의 마음이 진심이든 아니든 그 때 호태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거지소굴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곳이 아닌 그 어디를 가도 상관없단 생각이 들었기에 호태는 학중을 따라 나섰다.
학중을 만난 후 호태는 남부러울 것 없이 유복하게 자라났고, 호태는 학중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왔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다시 그런 거지소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학중은 호태의 그간 고생을 모두 보상해주고 싶기라도 한 듯 부족함 없이 호태를 애지중지 키웠지만, 호태는 어째서 인지 학중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학중은 호태를 기다려 주었다. 호태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을 때까지. 그러나 호태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부모도 자신을 버렸는데, 학중과 호태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니 분명 어려운 상황이 닥치게 되면 가장 먼저 등을 돌릴 것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항상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하고, 그것이 호태가 이제껏 살아남은 방법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까지 호태가 알아 온 학중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든 사람은 언제든지 필요에 의해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동물이라는 생각이 뼈 속 깊이 박힌 호태의 마음에 학중의 자리는 없었다. 괜스레 깊어진 생각 탓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크게 한 번 호흡을 가다듬고 학중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딸깍
“그래. 호태야.”
다정한 목소리로 학중이 전화를 받았다. 다정하지만, 늘 거리가 느껴지는 학중의 목소리. 단 한 번도 자신을 혼내지 않는 학중은 정말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어서였을까? 기대하지 말자. 이 정도로도 충분하잖아. 호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고생이 많지? 호태야. 그 일은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네가 수녀님을 꼭 먼저 찾을 수 있을 거라 난 믿는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네 안전이 최우선이니. 몸도 돌봐가며 일해야 한다. 알았지?”
“네.”
유민은 산을 내려 온 이후로 며칠 째 연락이 되지 않는 석호 때문에 애가 달는 중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전화를 걸어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자식은 왜 갑자기 연락이 안 되는 거야. 휴가까지 내고. 이러니 더 궁금해 미치겠네. 아니! 말도 없이 그렇게 홀연히 사라지냐고!”
유민은 투덜투덜 대며 소방서를 나오고 있었다. 산을 함께 내려와서 유민을 병원에 데려다 주고는 문자 한통 덜렁 남기고 석호는 사라졌다. 연락이 되지 않자 유민은 답답한 마음에 집으로도 찾아가 봤지만 헛수고였다. 석호는 이렇게 무책임한 타입이 아니었다. 몇 날 며칠을 집을 비운 것이 너무나 이상해, 결국 소방서까지 찾아온 유민은 석호가 갑자기 휴가를 냈다는 말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석호는 무엇 때문에 그 종이를 보고 놀란 것인지? 그걸 알아봤다는 것은 이 일에 대해 석호도 무언가 아는 것이 있다는 것인데. 석호가 그렇게 정색을 하면서까지 없었던 일로 하잔 이유가 뭘까? 유민의 머릿속은 사건이 석호와 관련 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면서도 도대체 석호랑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도대체가 알 수 없었다.
한 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인 채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는 유민에게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핸드폰 액정화면에 [발신번호제한]이란 표시가 떴다. 종료 버튼을 눌리려다 갑자기 오기가 생긴 유민이 입을 삐죽였다.
“그래! 너 오늘 잘 걸렸다! 보이스피싱! 큭큭! 여보세요!”
“강호일보에 서유민 기자님이십니까?”
굵은 중년 남자의 목소리.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잠시 긴장을 하던 유민은 자신의 직업 특성상 자신의 이름과 소속, 연락처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했다.
“네! 무슨 용건으로 전화 주셨나요?”
“혹시 베로니카 수녀님을 아십니까?”
장난 같지는 않으나 무언가 유민을 신경을 긁는 기분 나쁜 말투가 유민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소속을 밝히지 않는 사람에게 제가 대답해야 할 의무는 없는 것 같습니다. 발신번호를 제한하면서 까지 거는 사람들은 대부분 뒤가 구린 사람들이 많죠. 전 그런 구린 냄새를 아주 잘 맡거든요. 그러니 그런 일에 엮이고 싶지 않군요. 이만 끊습니다.”
중년의 남자는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한솟대바위. 요즘 그 일에 관심이 많다죠.”
유민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황급히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한솟대바위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요즘 관심이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날 있었던 일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제 구미가 당기십니까?”
유민은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켜 본다.
‘이 사람. 뭐야. 함정인가? 함정이라고 하기 엔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뭐지. 어떻게 해야 하지?’
유민이 고민을 하느라 정적이 흐르자 중년의 남자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했다.
“고민 되시는 게 당연합니다. 그럼 이틀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저와 거래하실 의향이 있으시면 그 때 까지 마음의 결정을 내리시고, 대답을 들려주십시오. 이틀 뒤에 이 시간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뚜뚜뚜.
“여!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이씨! 뭐야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고 지랄이야!”
유민은 남자가 무슨 거래를 하자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쥔 패가 없는데, 무슨 거래인지. 아니면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는 것은 아닌지. 이미 석호 일로도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이 복잡한데, 설상가상으로 또 다른 상황이 생기자 유민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니까. 베타카로인지 베로니카인지 하는 수녀님에 대한 정보랑 한솟대바위 정보랑 교환하자는 말인데, 도대체 그 수녀님이 누군데! 나한테 물어 보는 거야! 아! 진짜 머리 아파 죽겠네! 그러나 저러나! 이 자식은 왜 연락이 안 되고! 아!!진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아!!!!!”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며 머릴 쥐어뜯는 유민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해가는 걸 보고 유민은 언제 그랬냐는 듯 머리를 정리하며 빠르게 자리를 떴다.
“아! 쪽팔려!”
석호는 춘천에 있는 사촌형 집에 휴가차 왔다며 며칠째 방안에만 쳐 박혀 있는 중이었다. 석호의 사촌형은 춘천에서 나고 자랐는데 아내가 먼저 저 세상으로 가고 난 뒤 이곳을 떠나지 않고 더욱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사촌 형이 걱정 된 석호가 한번 씩 이곳에 들렀고, 자주 드나들다 보니 편해서 생각할 일이 있을 때면 편하게 내려오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나이도 비슷해 친하게 지내온 석호와 사촌형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얼굴만 봐도 서로의 속마음을 아는 사이였다. 사촌형은 아무 말 없이 석호가 쉬어 갈 수 있게 자리를 내주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런 점이 너무나 고마웠다.
틀어박혀 있을 일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어 다시 올라가려 해도 유민을 마주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머릿속에는 유민의 가방에서 꺼낸 종이의 표식들로 눈앞에 아른거렸다. 석호는 유민 앞에서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군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찜찜해 졌다.
‘아.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거야. 냄새를 맡으면 안 되는데.’
석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산을 자주 올랐는데, 석호가 어느 정도 산을 타기 시작하자 아버지가 처음으로 데려간 전문가 코스가 한솟대바위였다.
12살 처음 만끽해보는 험준한 산, 그리고 자신에게 정상을 내어 주지 않을 것 같은 산과의 실랑이에서 이겨낸 성취감. 한솟대바위에 다다른 석호는 뛸 듯이 기뻐했고, 아버지는 그런 석호를 대견해하며 애정을 담아 칭찬을 해주었다.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았어야 할 한솟대바위가 그 날의 일로 가슴 아픈 장소가 되기 전까지 석호에게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서린 곳이었었다.
그 날일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려오는 것을 느낀 석호가 머리를 흔들며 생각하려 하지 않으려 TV를 켰다. 무의미하게 돌아가는 채널에 멍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데, 핸드폰의 진동이 울려 댔다.
지이이잉!
가뜩이나 머릿속도 복잡한데 이 밤에 누가 전화를 거는 것인지 짜증이 솟구치는 석호는 이불을 발로 걷어차고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했다.
[유민거머리]
핸드폰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석호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벅벅 긁어댔다.
“사람이 참 일관서이 있어.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이건가?”
지이잉!
[야! 나 너 안자는 거 다 안다. 좋은 말 할 때! 전화 받아라! 지금 전화 안 받으면, 나 너희 집으로 간다! 지금!]
유민의 문자였다.
“시작됐군. 그래 이래야 서유민이지.”
지이잉! 지이잉!
[나 정말! 정말! 중요한 일이 생겨서 그래. 상담할 사람이 너 밖에 없다. 그러니까. 전화 좀 받아!]
지이잉! 지이잉
핸드폰이 지겹게 울려대고, 석호는 한 숨을 쉬며 핸드폰에서 배터리를 꺼내 분리해 버렸다.
“끈질긴 여자야. 고래 힘줄 만큼이나”
작동도 하지 않는 핸드폰을 보고 혼잣말을 하는 자신이 한심해 입맛을 쩝 다시는 석호는 자리에 벌렁 드러누워 오지도 않는 잠을 청했다.
한 참을 뒤척이다 뒤척이는 것이 더 피곤해진 석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다시 핸드폰을 켰다.
띠링 !띠링! 띠링
미친 듯이 알림 소리가 들렸고, 석호는 얼른 무음으로 전환을 시키지만 핸드폰을 끈 사이에 걸려온 전화와 메시지를 알리는 화면이 계속해서 떴다.
[부재중 전화 63통]
석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핸드폰을 확인하려 하는데, 때마침 걸려온 전화를 끊는다는 것이 그만 통화 버튼을 눌리고 말았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 전화를 끊으려던 석호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핸드폰을 귀에 가져가 댔다.
“네.”
“지석호씨 맞습니까?”
“네. 그런데. 누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