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어둠의 태동. 10-
석호는 남자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머리가 쭈뼛거렸다.
“석호야. 잘 지냈니? 학중아저씨다.”
“..........”
“갑자기 전화해서 놀랐지? 어떻게 그동안 잘 지냈니?”
“전화, 잘 못 하신 거 같습니다. 그럼.”
“석호야. 네 도움이 필요하다. 염치없지만. 이렇게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하구나.”
“미안한 줄 아시면 전화하시지 마셨어야죠.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딸깍.
전화를 끊고 난 석호의 심장은 세차게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석호에게 학중의 이름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아픈 이름이었다.
띠링.
석호의 핸드폰의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렸고, 석호는 애써 외면하며 돌아누웠다.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려 하지만 놀란 가슴은 쉽사리 진정될 것 같지 않았다. 맥박은 거칠게 뛰면서 머릿속이 어질해져왔다.
지이잉! 지이잉!
“하!”
깊은 한숨을 내 뱉으며 석호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유민의 전화였다.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한 상황에서 유민에게 서 온 전화를 보자 석호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짜증이 한껏 섞인 목소리가 그대로 전화기를 통해 전달됐다.
“그만 좀 하지.”
화난 듯 낮게 깔린 석호의 목소리에 유민은 쪼그라들었다.
“미안. 난 네가 걱정이 돼서.”
“오늘 모두들 나한테 미안한 사람들만 전화하는 날인가.”
유민이 말이 없자, 엉뚱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아 미안해진 석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화를 했으면 말을 해야지. 선배답지 않게 왜 풀이 죽어 있어.”
“풀이 죽지. 왜 안 죽냐? 내 똘끼의 원천이 넌데. 네가 떠나니 힘도 없고, 밥맛도 없고. 하.”
“선배 나 좋아하지? 그거 상사병인데?”
“야! 그래! 나 너 좋아한다. 무지! 엄청! 그러니까. 사람 애태우지 말고, 이제 그만 돌아와라!”
“너무 쉽게 고백하는 여자는 매력 없는데. 선배 내 타입이 아니라서.”
“쉰 소리 그만하고, 빨리 좀 와. 내가 너 어디 있는지 몰라서 안 가는 거 아니거든. 너 힘든 거 같아서 기다려 주는 건데. 생각이란 거 너무 오래 하면 병나. 답도 없는 생각은 더 그렇고.”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고?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아는데?”
“내가 널 모르냐. 너 춘천이잖아.”
“이야! 스토커가 따로 없네.”
“네가 뭐 뛰어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 네가 그렇게 하는 데 이유가 있겠지. 네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 안 물어 볼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시 올라와. 나 너한테 할 말도 있고.”
“난 분명히 대답했다. 선배 별루라고.”
“야! 씨!”
기륭은 빨간 문, 앞에 서서 머뭇거리더니 문을 열고 들어가 벽장문을 열고는 그림 앞에 섰다. 하리님의 그림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눈 코 입 까지 생생함 그 자체로 변하고 있는데, 성민에게 아무런 기별이 없자 답답한 마음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놈, 제 아비랑 다를 게 없는 놈이었어. 제대로 하는 일이 없어. 내가 그런 놈 뭘 믿고.”
기륭의 늙은 얼굴이 더욱 늘어지며, 분노에 얼굴 살이 떨렸다. 쉼 호흡을 한번 하고, 평점심을 찾으려 애썼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뚜루루. 딸깍
“네. 할아버지.”
힘없이 전화를 받는 성민의 목소리가 잘 되어가고 있지 않다는 답을 말해주고 있었다. 기륭은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해 성민에게 물었다.
“진행상황은?”
“아직, 그런데 다행히도 저 쪽도 못 찾고 있는 거 같습니다.”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그게 아닌 거 같은데."
“아…….죄…….죄송합니다. 빨리 찾겠습니다.”
“너 같은 놈한테는 화 낼 힘도 없다. 하리님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셨는데, 그깟 일 하나 처리 하지 못해서. 쯧쯧. 내가 직접 할 수 없는 게 한이다! 한!”
기륭이 불같이 화를 내자, 성민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말도 못했다. 기륭은 성민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더 이상 이 할애비를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그 년을 잡아 와!”
“네!”
딸깍.
기륭은 전화를 끊고, 한숨 섞인 넋두리를 해댔다.
“하리님. 저런 멍청한 놈에게 왜 그리 빨리 자리를 내어 주셔서는. 자식이고 손자고 하나 같이 저렇게 한심한 놈들뿐이니. 제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빠른 시일 내에 하리님의 몸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유민은 자신의 연락을 피하는 석호 때문에 마음이 심란했다.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누웠다. 다시 일어섰다를 반복했다. 괜히 이 일에 끼어들었나 싶기도 하고, 짜증스러움에 분노의 발길질을 애꿎은 소파에 하는데 옆에 있던 탁자에 물건이 툭하고 떨어졌다.
“아. 뭐야.”
물건을 집어 드는데, 낮에 유민을 찾은 처음 본 여자가 가져다 준 쇼핑백이었다. 유민은 그 물건이 무엇인지도 펼쳐보지 않은 채 아무렇게 올려다 놓은 것이란 걸 기억해 냈다. 평소 유민이었으면 몇 번이고 뜯어 봤을 텐데. 지금은 그럴 의욕도 생기질 않았다. 유민의 머릿속은 오로지 연락되지 않는 석호 생각뿐이었다.
“아오! 지석호가 남편도 애인도 아닌데. 내가 왜! 왜! 에이! 잠이나 자자.”
유민은 방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쇼핑백이 신경 쓰였는지 ‘홱’하고 낚아채서 방안으로 들고 들어갔다.
그 시각, 안성국과 이호영은 밤이 깊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가 한산해지자 안성국과 이호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적한 시외외각에서 순식간에 도심으로 이동한 안성국은 한 빌라 옥상에 섰고, 주위를 살피던 안성국이 먼저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불도 켜지 않은 조용한 집 안을 이곳저곳 살피는데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안성국이 주위를 살피는 사이 뒤이어 이호영도 나타났다.
“밖엔 별다른 기척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 안도 그렇구나. 내일 다시 오도록 하자.”
“네.”
안성국과 이호영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던 유민은 자신의 눈앞에서 방금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 머리로 이해하려 애썼다.
“뭐야. 내가 꿈을 꿨나? 아닌데. 내가 미친 건가? 말도 안 돼.”
유민은 조금 전, 자고 있던 중에 이상한 기분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었다. 추운날씨가 아닌데도 서늘한 기운에 이불장에서 이불을 하나 더 꺼내드는데, 꺼내 든 이불 안에서 이상한 것이 ‘툭’하고 떨어져 무엇인가 싶어 그 것을 잡는 순간 유민은 이불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들어가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유민은 정신을 차리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보기에는 분명 자신의 집 이불장 속이었다. 하지만 자꾸 다른 차원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들어 꿈을 꾸고 있나? 싶었다. 그러던 중 어둠 속에서 어떤 형체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도둑인가!’
유민은 어찌 된 상황인지 몰라, 지켜만 보고 있는데. 옷장 속에서 거실이 보인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머리로만 이상하다는 생각만 할 뿐. 눈은 계속 그 사람을 쫒았다.
유민의 침실까지 들어 온 사람은 안성국이었다. 안성국은 침실 구석구석 뒤지더니 이불장을 열고 유민의 코앞까지 다가오자 유민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이상한 얼굴이었다.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이 세상 사람이라 생각되지 않는 기이한 느낌을 주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이런 어둠 속에서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뚜렷이 보이는 것인지 유민이 긴장감도 없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안성국은 밖으로 나가버렸다.
‘꿈이면 빨리 깨라. 빨리.’
남자 하나가 더 나타나더니 둘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또 ‘휙’하고 사라져 버렸다. 꿈이라 하기는 너무 생생했고, 현실이라 하기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유민은 멍청히 있다가 자신의 눈을 비비려 손을 드는데 갑자기 옷장 밖으로 밀려 나왔다.
“으악! 아야!"
아픈 부위를 손으로 쓱쓱 문지르는데 유민의 손에 무엇인가 들려져 있었다. 물건을 확인해 보려 하지만 어두워 잘 보이지 않자 불을 켜려다 혹시나 그 것들이 다시 나타날까 봐 두려운 유민은 핸드폰을 더듬더듬 찾아 핸드폰 액정 불빛으로 자신의 손에 들려진 것을 확인했다.
“이건, 묵주잖아. 못 보던 건데.”
묵주를 조심스럽게 잡고 유민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좀 전의 일처럼 무슨 일이 일어날까봐 두려워 눈을 감았지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슬그머니 한 쪽 눈을 떠보는데, 별일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제야 자세히 목주를 들여다봤다.
“이 묵주는 또 뭐지? 도대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유민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묵주를 팔에 슬그머니 감았다.
성민은 빌라 밖, 차 안에서 이호영과 안성국의 모습을 보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따로 움직이시겠다! 이거지. 지금. 니들이 그런다고 내가 모를 줄 알아? 나, 하리님이 직접 선택한 사람이야. 왜 이래. 니들이 아무리 날고, 뛰어도 내가 다 안단 말이지.”
“이제, 저들이 어딜 가든 GPS를 달아 놨으니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안에서 중년의 남자 하나가 비열하게 웃으며 성민의 말에 장단을 맞춰 주고 있었다. 성민은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한 쪽 입 꼬리를 올리다 말고, 가늘게 눈을 떴다.
“걱정 안 해. 그 쪽 걱정이나 하지? 이제 하루 남았어. 어떻게 해서든 저 집에 사는 여자를 내 앞으로 끌고 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걱정 마십시오. 그런 일은 저희가 전문이니까요.”
“그리고 두 번 다시 나한테 이런 하찮은 일 시킬 생각 꿈에나 안하는 게 좋을 거야. 내 소문 들어서 알지? 이 번일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네.”
중년 남자가 성민의 차에서 내리며 인사를 하는 사이 차는 멀어져갔다.
해담스님은 악몽을 꾸는지 식은땀을 흘리며 뒤척이다 번쩍 눈을 떴다. 무엇인가 좋지 않은 예감에 자리에서 일어난 해담스님이 방문을 열고 나가는 데, 형무도 방에서 나오고 있었고 해담스님을 발견하고 먼저 다가왔다.
“잠자리가 불편하십니까?”
“아. 아닙니다.”
형무는 얼른 불을 켰고, 해담스님의 안색을 살피는데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물을 좀 가져다 드릴까요. 여기에 좀 앉아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그래 주시겠습니까?”
형무가 물을 가져다주자 해담스님은 물을 마시고 진정이 되는지 낮게 한숨을 쉬었다. 형무가 걱정스런 눈으로 해담스님을 쳐다봤다.
“혹. 무슨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 하하. 아는 게 아니고 저도 가끔 악몽을 꾸는데, 스님 표정을 보니 스님도 그러셨을 것 같아서요.”
“아. 그랬군요. 악몽을 자주 꾸십니까?”
“어.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좀 안 좋은 읽을 겪다보니 한 참 그런 꿈들을 꿨어요. 이곳에 온 이후로 그런 꿈도 안 꾸게 됐지만, 그런데 그 기억이란 것이 특히 안 좋은 기억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더라고요. 돌에 하나하나 새긴 것처럼 그 기억들이 제 뇌에 그렇게 새겨져 있는지. 아.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제 이야기를.”
“아닙니다. 편하게 하세요. 계속 그런 이야기는 해야 합니다. 나쁜 일은 자꾸만 환기를 시켜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 속, 머릿속에서 그 기운이 옅어지게 되는 겁니다. 숨기고, 참고, 혼자만 끙끙 앓다보면 그것이 병이 되는 것이고, 그 기운이 나쁜 일들을 불러 오게 하니까요. 얼마든지 말씀 하세요. 그리고 좋은 기억들로 그 자리를 메우셔야죠.”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스님 무슨 꿈을 안 좋은 꿈을 꾸셨는지 여쭈어 봐도?”
“네. 이상한 꿈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여자 분이었는데. 그 분이 어딘가에 갇혀 있었습니다. 벽장? 옷장? 혼자 그 곳에 있는 데 이상한 놈들이 그 여자 분을 데려가려는 그런 꿈이었습니다.”
“그것이 혹시? 베로니카 수녀님 아닐까요? 그 쪽에서도 베로니카 수녀님을 애타게 찾고 있을 텐데.”
“아니요. 저도 베로니카 수녀님의 얼굴은 뵌 적이 없지만, 수녀님의 얼굴도 복장도 아니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이 있으신 분 같았는데. 그 분이 아무래도 위험한 것 같은데. 만약 제가 꾼 꿈이 선 몽이라면. 그 분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누구이신지 모르시지 않습니까.”
“알아내야지요. 그 분이 누구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