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
"루클러스왕은 사람들을 어떻게 괴롭혀요?"
"그게 무슨 말이야?"
"결국은 다 죽고 희생양도 끝내는 3년 되기 전에 죽는다고 들었거든요. 미리 알아두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
아삭.
루스경은 나를 빤히 보다가 과일을 묵묵히 씹었다.
아삭.
나도 따라 과일을 베어 물었다. 눈앞에는 끝없는 창공이 펼쳐져 있었지만, 지금은 감동할 때가 아니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데 아름다운 정경이 뭐 그리 의미 있겠는가. 나는 살고 싶고, 되도록이면 길게 살고 싶다. 우스운 얘기지만, 지금 같이 온 마을 처자들보다 오래 살 확률이 가장 높다는 것이 사실 위안도 좀 된다.
만일 그가 어떻게 괴롭히는지 알면 조금 덜 괴롭거나 무난히 넘길 만한 대책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에게 물었다. 그냥 숭덩 숭덩 사형에 처해버리면 답이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나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안 괴롭혀."
"네?"
"루클러스왕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는데?"
그 말에 나는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20년은 성왕이다가 3년 분쟁의 주기에 들어서면 폭군으로 변한대요. 그 때는 우리 같은 여자들은 막 괴롭히고 죽이고, 그거 방해하면 주변인들도 죽이고.......여하튼 악마 같......."
나는 여기까지 말하다 아차 싶어 얼른 끊었다. 그의 눈치를 보니 역시나 그의 표정은 굳어 있다.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신하가 왕의 험담을 듣는 걸 좋아할 린 없지.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내게 말했다.
"루클러스 왕은 네가 알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분쟁의 주기 3년 동안은 사람들이 많이 죽는 건 사실이지만."
"왕이 그런 사람이 아닌데 사람들이 죽는 게 말이 되요?"
내 반문에 그는 말이 없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다 곧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는 듯 했다.
"관련해서 알고 있는 거 없어요? 전 성에 들어가서 어떻게 되는 거예요?"
향후를 묻자 그는 나를 보고 물었다.
"어떻게 될 거 같은데?"
"음.......노예? 아니면 제물? 아니면 왕의 변태적 취향의 고문?"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 곧 접시가 비자, 수행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가져온 물그릇에 손을 닦았다. 그는 수건으로 손의 물기까지 닦고 나서야 나를 보았다.
"안 괴롭힌다고 말했을 텐데.......다른 선택지는 없어?"
그 말에 나는 생각을 더 해보았지만, 그 동안 들은 이야기에는 좋은 부분이 없었다. 그는 그런 내 표정을 보더니 한숨을 지그시 쉬었다.
"가령 약혼녀라던가. 배우자라던가. 반려라던가. 왕비라던가. 혹은......."
뭐? 그는 잠시 하던 말을 줄였다가 내게 눈을 맞췄다.
"사랑에 빠진다던가."
순간 루비 블론드와 같은 색의 깊은 눈동자가 내 시선에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두근.
그와 동시에 어딘지 모를 심장 한 구석이 아릿하게 울렸다. 난생 처음 겪는 느낌에 얼른 눈을 감았다가 열심히 다른 곳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갈 곳 잃은 시선이 결국 그의 왼쪽 가슴의 휘장에 안착하고 나자, 얼굴에 열감이 느껴졌다.
"겨.......결혼이요? 루클러스왕과요?"
"얼굴이 달아올랐네? 죽기는커녕 왕비가 된다니까 좋은가?"
그는 내 홍조의 이유를 착각한 듯 했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걸 순수하게 믿기엔 한두 군데 수상쩍은 게 아니었기에. 거기다가 앞뒤가 안 맞지 않는가. 결혼할거면 왜 숨어야 되고, 다른 여자들은 왜 죽어야 되나?
"에이. 거짓말. 너무 의외라서....... 나 겁 먹을까봐 그러는 거죠?"
"진짜야."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럼 왜 제가 숨어야 하고, 비슷한 주기에 태어난 여자들은 싹 다 죽어야 되요?"
"그거야 불미스러운 사고들이 자꾸 생겨서......."
"불미스러운 사고요?"
"그게......."
그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멈췄다. 그러더니 의자에 등을 푹 기댔다.
"말하자니 기네. 바로 옆 칸에 도서실이 있으니 거기서 기록을 찾아보던가. 몇 권 없어서 찾기 쉬울 거야."
그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있던 수행원이 나를 바로 도서실로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자기는 통로에 마련된 소파 위에 앉았다. 보아하니 어디 못 가게 감시할 모양이다.
'가봐야 여기서 어딜 가겠어요.' 속으로 살짝 한숨을 쉬고는 도서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몇 권 없다던 도서관의 책은 얼핏 보아도 수백 권은 되어 보인다. 테이블은 한 개뿐이었지만.
"은둔 마을에 비하면 엄청 많은데......."
아마 몇 권 없다는 얘기는 루스경의 기준 같다. 나는 책을 몇 권 꺼내어 들춰보다가 도로 꽂아 넣었다. '책 제목이라도 좀 알려줬으면 찾기가 편할 텐데'라고 생각하면서 한 권을 다시 펼쳤다.
[만다린 종족의 고공비행 법]
만다린 종족은 날 수 있다. 물론 아주 낮게 날 뿐더러 속도도 느리고 날개도 없다. 그러니 로드로더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 책은 제목부터가 남달랐고 날개의 그림도 있었다.
얼핏 보니, 만다린 종족은 숨겨진 날개를 이용하면 고공비행이 가능한데, 그 정도로 높이 나는데 노력이 많이 필요하고 힘도 들기 때문에 다른 수단을 쓴다고 쓰여 있다. 날개 꺼내는 법부터 날갯짓 하는 법. 착륙하는 법. 날개를 도로 집어넣는 법도 있고 말이다. 깨알같이 글씨가 쓰여 있긴 했지만, 지금 볼 건 이게 아니었다. 나중에 상세히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도로 제자리에 넣었다.
"루스경한테 책을 찾아 달래는 게 낫겠다."
한 30여분 정도 책을 뒤적이다 그렇게 결론지은 난 도서실의 문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나를 감시하려고 있었던 수행원이 자고 있다. 나는 좌우를 둘러보고선 그의 눈앞에 손을 살짝 흔들어 보았다. 마치 수면제라도 먹은 듯 깊게 빠진 것 같았다. 이런 고마울 데가. 나는 발소리를 죽여 루스경이 있는 곳의 반대쪽으로 향했다.
가면서 비공정에서 일하는 듯 보이는 사람을 몇 마주쳤다. 그 때마다 잡힐까 싶어 몸이 굳었지만, 그들은 내게 간단히 목례할 뿐 딱히 나를 저지하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도리어 뭐 필요한 건 없냐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란다. 예상외였다. 루스경이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아마 나를 가둬두거나 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음. 그렇다면 당연히.
그걸 안 이상 다음 내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은둔 마을 사람들은 어디 있는지 찾아봐야지.'
그 녀들이 감옥 같은 마차로 이동한 게 못내 신경 쓰였는데 잘 되었다. 내가 이 곳 저곳을 두리번거리자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올린 한 남자가 다가와서 물었다.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는 중 남자가 친절하게 웃었다.
"부담가지시지 마시고 뭐든 물어보십시오. 같이 탑승한 여성분들이라도 찾으시는 겁니까?"
"그걸 어떻게?"
"저도 약간 아는 게 있어서요. 그 여성분들은 저 쪽에 계십니다. 막 식사를 마치고 차를 드시는 중입니다."
그는 내게 방향을 일러주었다. 그들이 뭘 하고 있는 지까지. 그 말에 나는 그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뒤를 돌아봤다.
"?"
불과 몇 발짝 떼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다음에 마주치면 인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고 오래 가지 않아 그녀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엘리!"
그녀들은 환한 표정으로 반갑게 나를 맞았다. 마차로 이동할 땐 굉장히 좁고 힘들어보였지만, 비공정안에서는 다들 깔끔한 복장을 하고 넓은 공간에 모여 있었다. 딱 봐도 안락해 보여서 안심이 되었다.
우리는 둘러앉아 그 동안의 일들을 조금 나누었다.
"어머, 너 그럼 결혼 하는 거야?"
"루스경의 말로는 그렇다는데 안심시키려고 하는 거짓말 같기도 해. 하지만 만일 정말 그렇다면."
나는 말하기 전에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우리 모두 안 죽고 사는 방법을 찾아 볼 거야."
그러자 레아가 앞서 나와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엘리."
아. 경황없던 중에 열 명의 또래들에게 둘러 싸여 있으니 레아가 이 안에 있다는 걸 깜박했다. 살아남은 건 정말 다행이었지만, 문득 그녀의 얼굴을 보자 죽은 레단이 생각났다. 레아는 레단이 죽은 걸 알고 있을까? 순간 내 흔들리는 눈빛에 레아가 물었다.
"왜 그래? 아 참! 나한테 할 말 있을 걸?"
"어? 그. 그게......."
말해야 하나. 말하지 말아야 하나. 갈등이 되었다. 그러자 레아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거 봐라. 표정 보니 확실해."
레아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후훗! 그런 얘긴 역시 둘이서만 해야지. 이리 와."
그 손에 이끌려 간 나는 문득 들어차는 바람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공정 한 쪽엔 전면에 창을 낸 테라스가 있었고 그 창을 통해 더 넓은 바깥이 보였다. 앞쪽에서 봤던 풍경은 창공이 차지했다면 이 곳은 우리가 지금 어느 숲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푸른 숲에 굽이치는 강물. 커다란 산맥. 그리고 멀리 보이는 거대한 도시.
"와아. 여긴?"
"어때? 멋지지? 아까 내가 발견한 곳이야. 그리고 이걸 만지면......."
자랑스레 말하던 레아는 창 옆에서 무언가를 만졌다.
기이잉.
매끄러운 기계음과 함께 창의 반 정도가 양 옆으로 열리자, 시원한 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왔다.
"이것 봐. 엄청 시원해."
레아는 창가에 기대어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정신없이 휘날렸다. 그 모습에 나는 그만 웃음이 나왔다.
"야야. 너 머리 엉망이 되겠어."
"뭐 어때? 다시 빗으면 되지."
허물없는 레아의 미소에 나도 그녀의 옆에 섰다.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창밖으로 휘날렸다.
"앗."
내가 살짝 놀라자 레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큰 소리로 말했다.
"자. 느껴 봐 바. 바람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사이를 넘나들어!"
내게도 느껴졌다. 바람은 강했지만, 시원하게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사이를 쓸고 지나갔다. 레아의 말에 나도 방긋 웃었다. 바로 이어 나온 그녀의 말에 웃을 수 없게 되어 버렸지만.
"이제 말해줘야지?"
"어.......그게."
이렇게 해맑은 미소를 짓는 레아에게 네 오빠가 죽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겠는가. 내 표정이 시무룩해지자 레아는 뭔가를 안다는 듯 물었다.
"에이. 설마 싫다고 한 건 아니지?"
"뭐?"
"레단이 네게 청혼할 거라고 그랬거든. 왕에게 끌려가고 있긴 하지만 원래는 우린 가족이 될 뻔했다고 말하려던 거 아니야? 나 깜짝 놀라게 하려고."
"뭐?"
내가 되묻자 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아는 어째서인지 우리가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루클러스왕의 기사들이 바로 와서 그럴 틈이 없었나. 에이. 그럼 아쉽게 됐네."
그 때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단이라는 자는 죽었습니다."
그 말에 우리는 뒤를 돌아봤다. 아까 내게 이 곳을 알려준 검은 머리 남자였다. 그 남자는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그리고 웃으며 레아에게 말했다.
"엘리님을 강제로 범하려다 루스경의 칼에 즉결 처형당했죠. 당신도 참 웃기네요. 뭐 그딴 자식을 친오빠라고 그렇게 해맑게 웃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