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
석양이 지면 모두들 집에 들어가야 했고, 일찍 자야 했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혼자 사는 그 작은 초막집보다 더 작은 창으로 밤하늘을 보았는데, 그러고 있으면 어둠의 장막 위를 별이 하나 둘씩 수놓기 시작했었다.
과연 몇 개나 더 늘어날지 그게 궁금해 그 작은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별을 세고 있으면 촌장님에게 그러고 있는 걸 들키기도 했다. 그러면 촌장님은 밤은 위험하니 행여 나올 생각하지 말고, 얼른 창문까지 꼭 걸어 잠그고 자라며 잔소리를 해댔다.
밤은 위험하다고 했다.
도깨비. 귀신. 늑대. 몬스터. 산짐승 등이 돌아다니니 말이다. 실제로 외진 마을이라 그런지 아주 가끔은 산짐승이 밤중에 내려와서 닭이나 돼지 같은 걸 물어 죽이기도 했다.
한 밤중에 갑자기 닭이 푸닥거리면 아저씨들은 칼이나 활등을 들고 쫓아나갔지만, 혹여 돼지라도 우는 소리가 들리면, 아무도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산짐승이 들어오지 못하게 울타리를 더 강화할 뿐이었다.
그렇게 야외에서 보내는 밤은 내게 무척 낯선 것이었다.
밤이 땅으로 완전히 내려오자, 작은 모닥불만이 주변을 밝혔다. 시야가 어두워지니 귀가 더 예민해 진 것 같다. 옆에 흐르는 시냇물 소리. 그리고 풀벌레 소리.
어디선가 늑대의 울음소리도 길게 울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나는 모닥불에 최대한 가까이 앉아 잔뜩 긴장된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어두운 곳에서 부스럭 소리가 날라치면 불안감에 흠칫 흠칫 놀랐다.
맞은편에 앉은 루스경은 한참이나 그러고 있는 나를 보다가 말했다.
"무서워?"
긴장에 침이 절로 넘어갔다.
"전, 이렇게 있어본 적이 처음이라.......루스경은 안 그래요?"
그러자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여기는 수도 근처라, 있어봐야 들개나 곰 정도."
곰? 지금 곰이라고 그런 거 맞지? 그러고 보니 저 멀리서 곰이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공기는 따뜻하고 불도 앞에 두고 있지만, 몸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공포감으로 점점 안 좋아지는 내 표정에 루스경은 자기 옆자리를 오른손으로 툭툭 쳤다.
"그렇게 무서우면 이 쪽으로 와서 앉아."
나는 눈치를 보다가 재빨리 그의 옆으로 가 앉았다. 그렇다고 무서운 게 없어진 건 아니었지만, 아까보단 좀 나은 기분이었다.
"망토는 아까 뛰어내릴 때 풀었더니.......찢어졌지만 이거라도."
그는 내게 덮을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왼쪽 부분이 엉망이긴 했지만, 자신이 벗어놨던 제복 상의를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뭔가 살짝 어깨를 누르니 아까보단 나은 느낌이었다.
"고마워요."
나는 힘없이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여전히 웅크린 채 모닥불을 보았다.
뭔가 굵직한 짐승 소리가 조금 가깝게 들린 것 같았다. 그 소리에 흠칫 놀라자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염려 마. 그저 곰이 지나가는 중이야."
"고, 곰이요?"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보시오. 기사 양반. 그저 곰이 지나가는 중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 마을에서 곰이 출몰하면 돼지 두 마리는 순식간에 없어졌거든요? 집까지 못 들어오게 하려고 일부러 눈에 잘 띄는 곳에 돼지를 놔뒀었다고요. 물론 그러고 난 다음날은 대형 덫을 놓긴 했지만. 지금은 우리가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잖습니까.'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순 없었다. 그의 뒤편 저쪽에 어슬렁거리는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기에. 그저 지나가는 중인 곰으로 추정되는 덩치가 말이다.
그리고 그 곰은 우리가 피워놓은 모닥불을 발견 못할 리가 없었다. 모닥불에 반사된 짐승의 눈이 번뜩였다. 먹이를 보는 포식자의 눈. 그 짐승의 눈에 내가 흠칫 놀라자, 그제야 루스경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며 일어섰다.
"그냥 대충 좀 지나가지. 눈치 없게 뭘 또 이쪽을 보고......쯧."
그렇게 말한 그는 검 집에 손을 가져갔다. 곧 검 집에 검이 없다는 걸 발견했지만.
그는 그제야 생각이 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 아까 그 여자 처리하고 그대로 왔구나."
곰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자 그도 곰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루, 루스경. 우리 도망가요."
내가 공포에 질린 채 말하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었다.
"그저 곰이라니까. 몸이 성치 않아서 좀 불편하긴 하겠지만."
그가 도망가기는커녕 곰과 맞서자, 곰은 그를 노려보다 몸을 일으켰다. 그 키가 루스경보다 네 배는 족히 커 보였다. 그는 그 집채만큼 큰 덩치에도 동요하지 않는 듯 웃었다. 곰이 앞발을 그에게 휘두를 때였다.
"쿠워어어어어!"
후웅!
곰의 괴성과 함께 앞발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꺄악!"
나는 루스경이 죽을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뻐걱!
그 커다란 앞발을 피해 뛰어 오른 루스경은 곰의 옆머리에 정확히 오른 주먹을 꽂아 넣었다. 그로 인해 곰의 머리는 크게 흔들렸다.
"......."
쿠웅!
마치 도끼에 나무가 넘어가듯, 곰도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옆으로 넘어갔다. 루스경은 쓰러진 곰을 한 발로 누르고선 오른 어깨를 천천히 돌렸다.
"역시 곰은 맨 손으로 잡는 게 제 맛이지."
그는 주먹을 털고 와서는 내 옆에 바짝 앉았다.
"자. 곰 없다. 이제 무서울 거 없지?"
"......."
그를 올려다보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조금은 밝아진 내 표정에 그도 슬쩍 웃는다. 이젠 뭐가 와도 그가 지켜줄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아까의 불안감은 가신 듯 했다. 나는 다시 웅크리고 모닥불을 지그시 보았다.
밤이 좀 더 깊어지자 불이 앞에 있어도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춥지는 않았지만. 그 무렵 내 어깨위로 그의 팔이 슬쩍 올라왔다. 그는 조용히 내 어깨를 감싸 제 쪽으로 살짝 끌어 당겼다. 그의 맨 가슴에 내 얼굴이 살짝 닿았다. 내가 의아한 듯 그를 올려보다 보자,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지금 이 시간에 깨어 있는데 왜 땅만 봐?"
".......네? 꺅!"
순간 내 몸이 뒤로 젖혀져 나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풀밭 위로 그와 내 몸이 나란히 눕혀졌다. 설마 루스경도 레단처럼? 이라는 생각이 스쳐가자 내 몸은 급격히 긴장되었다. 아까 곰 잡은 걸 보면 저항해 봐야 못 당할 게 뻔했다. 그걸 아는 나는 그저 눈을 꼭 감았다.
"......."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느껴지는 건 팔베개처럼 된 그의 굵직한 팔 뿐. 꼭 감았던 눈을 살짝 뜨고 상황을 살폈다. 그는 밤하늘을 올려보고 있다. 나는 그 모습에 비로소 하늘에 눈을 돌렸다.
"......."
작은 초막. 작은 움막. 그 작은 창문 밖으로 어둠이 깔리면 하나 둘 씩 떠오르던 작은 빛들. 몇개 세어보려다 촌장님의 잔소리에 아쉬운 마음을 품고 창을 단단히 걸어 잠가야 했던 기억.
그 빛들이 모두 떠오르면 어떻게 되는 지.
암흑의 장막위에 아주 얇고 긴 눈썹이 홀연히 떠올라 있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길게 보석의 띠를 둘러놓은 듯, 마구 흩뿌려놓기라도 한 듯 가득한 총천연색의 빛 가루들.
그것들은 각자 다른 크기로 빛나며 검은 벨벳 같은 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장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아름다운 우주 안에 내가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격에 차오른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이 차 어깨를 들썩였다. 한참을 넋을 놓고 그 밤하늘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그의 시선이 밤하늘에서 다른 곳으로 바뀐 걸 느꼈다.
"......."
고개를 돌리니 그의 눈동자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시선은 천천히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가 내 이마를 본다. 내 코를 보고. 감동으로 붉게 물들었을 내 두 뺨을 본다. 곧 어딘가를 지그시 보던 그는 곧 목울대가 일렁였다. 그는 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에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자세히 보았다. 수려한 이목구비. 반듯하게 다문 입술. 문득 저 입술을 맞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꼴깍. 나는 왠지 조용한 침을 삼켰다. 나도 모르게 슬쩍 내 입술을 깨물었다.
그와 나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깊고 그윽한 그 루비블론드의 눈동자가 내게 들어왔다.
그는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
아니 '우리는' 이라고 해야 될 것 같다.
서로의 미묘하고도 조용한 제스처가 무얼 뜻하는 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가까이. 그리고 천천히 다가왔다.
내가 벤 그의 팔에서 그의 심장박동이 고스란히 울렸다. 아니 사실은 내 심장 박동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도 이걸 듣고 있을까. 긴장이 되면서도 기대도 되었다. 그저 스르르 눈이 감겼다.
촉.
폭신한 감각이 윗입술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움찔.
나도 모르게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러자 나를 둘러싼 그의 한 손이 내 어깨를 감싸 잡았다. 그가 천천히 나를 제 쪽으로 더 끌어당기더니 자신의 얼굴을 살짝 틀었다.
그러자 그의 입술이 내 입술위에 완전히 맞닿았다.
입안에 초콜릿을 넣은 것도 아닌데, 그 촉촉한 폭신함은 매우 부드럽고 달게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감고 어깨를 살짝 떨었다. 내 반응에 그의 손이 나를 더 제 쪽으로 안아 당겼다. 순간 내 얼굴 위로 무언가 한 방울 떨어져 흘러내린 것 같았다.
그는 맞댄 입술을 살짝 빨아들이고 천천히 비비었다. 마치 노크라도 하는 듯.
이렇게 닿고만 있어도 기분이 너무 좋은데. 그가 움직이니 살짝 짜릿한 느낌도 들었다.
그가 입술을 부비는 힘이 조금 더 강해지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열었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치고 들어왔다. 그렇게 그의 입술은 내 입술과 아주 친밀하게 만났다.
마치 탐색이라도 하 듯 살짝 살짝 건드려 대던 그는 내가 저항하지 않자, 좀 더 적극적으로 하지만 천천히. 아주 부드럽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 입안을 가지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첫 키스 중이라는 걸 안다는 듯이.
달콤한 초콜릿을 한 입 가득 머금은 것 같았다. 나는 그가 하는 키스의 달콤함에 곧 푹 빠져들었고 그 역시 내게 푹 빠져 들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나는 그의 목에 내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그는 한동안 키스를 끝낼 생각이 없어보였다. 나도 그렇기에 다행이었다. 우리는 그 숨이 막히게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서. 오래. 아주 오래 서로의 입술을 공유했고 또 나누었다.
그와의 첫 키스는 촉촉하고 달콤했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아늑했다. 그리고 낯선 느낌. 이게 황홀하다는 느낌일까.
동시에 무언지 모를 아릿하고 절실한 감정이 내 심장을 두들겨왔다. 난 그와 같이 하는 이 시간이 너무 행복했지만, 나중에는 이유 모를 눈물을 나도 모르게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