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만큼 갑작스럽게 떠났다.
박차고 뛰어가는 아이를 잡지 못한 나는, 아이가 들킬까봐 묻지도 못하고 아이의 잔상만 좇은 채 멍하니 잠자리에 누웠다.
그 때문이었을까?
‘넌 저주야.’
아니야 제발
‘네 목소리’
오빠 잘못했어! 제발 엄마 아빠!
‘노래!’
오빠 제발 제발 제발!
‘모두!!!’
“리아!!!!!!!”
헉!
“리아! 일어나! 무슨 일이야!”
온몸을 적신 기분 나쁜 땀이 차게 식었다.
“리아 괜찮니?”
방은 대낮처럼 환하게 켜져 있었고 코넬뿐만 아니라 서쪽 궁 시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리아.”
채 넘기지 못한 호흡이 헐떡이며 터져 나왔다.
“또 악몽인거야?”
코넬이 내 눈가를 쓸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 듯 했다. 아이를 만나고 터져버린 눈물은 그 뒤에도 멈출 줄 몰랐다.
“리아 괜찮아?” “리아” “오늘은 쉬어 내가 당번 맡을게.” “리아 울지마”
여기저기서 위로가 건네져 왔다. 서 쪽 궁은 시녀가 나를 포함해 네 명 밖에 없었지만, 착한 기준으로 뽑았는지, 다들 벙어리 행세를 하는 내게 과분하게도... 착하다.
“자자 아직 해가 뜨기 전이니까 너희들은 들어가 있어. 리아도 이제 진정한 모양이니까”
시녀장 오페르가 시녀들을 물렸다.
“리아. 오늘은 쉬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리아.”
‘쉬면 더 힘들어요... 시녀장님. 일하게 해주세요.’
“휴..”
오페르는 판에 적힌 글을 착잡한 눈으로 보더니, 나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주었다.
“그래. 때론 땀이 모든 근심을 덜어주기도 하지. 그래도 오후에는 쉬렴.”
“그래! 리아. 오후에는 쉬어!”
코넬과 오페르가 짐짓 엄한 눈을 했다. 결국 나는 그들의 고집에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안심시킨 뒤, 아직 별이 떠 있는 밖으로 나왔다.
‘하..’
하얀 입김이 아직 쌀쌀한 가을 밤하늘에 퍼졌다. 2년 만에 꾼 악몽이었다. 처음 시녀로 들어오고는 낯선 잠자리와 제리의 부재에 하루가 멀다하고 꾸었지만, 따뜻한 보살핌에 점차 그 기억도 저편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어?’
달빛 아래 풀숲에서 검은 덩어리가 숨어 있었다.
‘그 아이!’
몬스터도 제 말하면 나온다더니! 아이가 처음 본 그곳에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이를 생각하면서 정원 쪽으로 왔던 것이었다.
나는 아이가 놀래지 않게 발걸음 소리를 내며 다가갔다.
사각 사각
기척에 크게 움찔거리는 아이를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안도가 아이의 눈에 퍼지는 것을 보고는 우습게도 금세 기쁜 마음이 들었다.
서둘러 옆에 다가가 앉으며 판에 적었다.
‘여기서 뭐해?’
아이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눈동자를 들어, 판 대신에 나를 바라보았다.
‘와.... ’
밤이어서 그런가..? 아이의 눈이 빛나는 보석 같다.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아이의 앞머리를 치우려 손을 내밀자, 아이는 겁먹은 듯 흠칫 뒤로 물러났다.
“.... 이안애! ..헙!”
입을 막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넌 저주야. 네 목소리, 노래, 모두.’
“....!“
사시나무처럼 몸이 떨렸다. 꿈의 잔상이 아직도 좇고 있었다.
‘도련님 마차 사고입니다!’
제리의 생일날이었다. 그 아이의 소원이...!
“흐어어...!”
다른 사람 앞에선 항상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꿈과 아이 앞에서 허무하게 모든 게 무너져 내렸다.
오 년. 자그마치 오 년 이었다. 말은 하지 않은 게.
평생 벙어리로 살자고 다짐한 이후 처음이었고, 다행히 말하는 법을 잊은 줄 알았다.
하지만, 놀라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튀어나온 저주의 목소리..!!
정확하진 않았지만 소리가 새어 나가버렸다.
‘도망쳐야 해!’
‘서둘러! 아이가 저주에 걸리기 전에!’
하지만 혼란, 공포, 절망, 좌절이 몸을 휘감아, 도무지 다리가 안 움직였다.
퍽퍽!
멍청한 다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움직여! 움직여! 멍청아 움직여! 제발!!!’
퍽..!?
‘....!’
다른 감촉에 놀라 급히 손을 멈췄다.
‘세.. 세상에 어떡해!!!!!’
때리던 다리 위에 올려 진 작은 손을 서둘러 감쌌지만, 벌써 빨갛게 붓기 시작했다.
멋대로 코와 눈이 시큰거리고 멍청한 입이 또다시 말을 내뱉었다.
“...오애?”
아이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눈을 들어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말없이 부은 손을 들어 내 손을 감싸주었다. 가리지도 못할 만큼 작디 작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괜찮아’
그렇게 해가 중천에 뜨기 전까지, 코넬이 나를 찾기 전까지. 아이는 내가 수많은 위로를 건넸다. 한마디의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아이, 별과 달은 내게 수 천 마디의 말보다 깊고 잔잔한 위로를 건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