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한 밤도 어느새 한 달 가까이 되었다. 코넬과 다른 시녀들은 병든 닭처럼 빗질하다 말고 꾸벅 꾸벅 조는 나를 걱정했지만, 실실 웃고 있는 나를 보고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들 사이에 남자 얘기가 도는 것 보니 이상한 방향으로 얘기가 흘러가는 것 같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정말 좋은 나날들이었다. 하늘은 높고 별은 반짝이고-
“으흠흠흠- 합..!”
자연스럽게 아이를 생각하며,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온 콧노래에 황급히 입을 막고 둘러봤다. 다행히 들은 사람은 없고.
‘이놈의 주둥이. 너 경고야. 경고......흐흐’
입을 때리면서도 어제 내 흥얼거림에 샛노란 눈을 반짝이는 아이가 생각나자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시트린이라는 희귀 보석 같았었지. 아니야, 보석보다는 태양 빛..
“리아---!”
복도 끝에서 제이니가 불러, 웃음을 갈무리하고 종종 걸음으로 다가갔다. 제이니는 내가 굳이 판에다가 글을 써주지 않아도 내 표정을 읽는 기묘한 재주가 있다.
“리아, 무슨 좋은 일 있어?”
씨익 웃는 게 다 안다 이거지.
“누구. 누구야. 어떤 멋-진 신사분이 우리 리아 정신을 홀딱 빼앗아 가셨대?”
신사 아닌데. 아이....
우뚝.
“리아?”
그러고 보니, 그 아이 여자야 남자야? 잠깐. 이름도 모르잖아?
아이랑 나는 하루가 멀다하고 만났지만, 아이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는 머리가 길고.. 그러니까...
“리아.”
아이 생각은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서 쪽 궁에선 들릴 리 없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기 때문에.
***
“리아. 잘 지내?”
나는 건너편에 앉은 홀 페이린 스튜어트, 지금은 스튜어트 공작인 제리의 형을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지 마세요.’
“하하. ”
홀 오빠는 판에 적힌 글을 보고 민망한 듯 볼을 긁적였다.
“그래도 잘 지내나 궁금해서. 제리도 네 안부를 무척이나 궁금해 하고.. 오년이나 지났잖아. 너희 안본지.”
“....”
“여전한 거야?”
끄덕
“음... 그래... 어.. 많이 불편해?”
나는 저 멀리 장식물에 그려진 무늬를 노려보며 고개를 또 다시 끄덕였다. 제발 가요. 제발. 미약하게 손이 떨리고 있었다. 상자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그래. 미안.”
다섯...
“제리는 잘 지내고 있어. 아카데미도 다니고. 뭐 학교에서도 인기 많은지 전교회장도 하고.”
제리의 이야기에 멈칫거린 것을 봤는지,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 이어갔다.
“이 년 내내 장학생에다가 음..또 아! 키가 벌써 내 코까지 닿았어.”
힐끗 홀 오빠의 코언저리를 쳐다보았다.
“아 그러니까 이정도.”
그가 일어나서 코 쯤 손을 올렸다.
제리 많이 컸구나... 나는 시선을 돌려 장식을 다시 세기 시작했다. 다섯 개, 여섯 개, 일곱 개, 여..
“요즘에 그 애 약혼이 나보다 많이 들어오는데..”
여덟..개...
손을 그러모았다. 어차피 안 될 일이었어. 어차피..
아홉 개, 열 개..
“네 이야기도 좀 해줘. 리아. 다들 궁금해 해. 아까 네 친구니? 친구랑 같이 웃고 있더라.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니?”
결국 나는 무늬 새기를 포기하고 판에 글을 써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전 잘 지내고 있어요. 제리도 잘 지낸다고 하니 기뻐요. 하지만 더 이상 오시지 않아도 돼요. 아니 이제 오지 말아주세요.’
“음... 뭐 다음에 기회 되면 또 올게. 나도 네가 잘 지낸다니까 기쁘다.”
후.. 매번 이런 식이었다. 배웅하러 일어나는데 갑자기 그가 뒤돌아서는 바람에 눈이 마주쳐버렸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뻐졌구나. 네 목소리 참 좋았는데...아... 미안”
고개 돌려 아예 그를 등지고 섰다.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노래라니..
“미안해 리아. 근데 다름이 아니라 오늘 온 건, 서쪽 궁 쪽에 불미스러운 이야기 때문이었어.”
그러나 나는 뒤돌아선 것보다 몇 배는 빠르게 홀 오빠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글쎄 아이가 나타난다고 하더라고.”
“....!”
홀 오빠는 다가오더니, 내 귓가로 속삭였다.
“니가 그 아이를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고개를 돌리니, 그의 사파이어 눈 안에 겁에 질린 황금빛 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그가 웃자, 그 소녀도 함께 휘었다.
털썩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서거하신 황태자 부부의 자손이야. 같이 있다가 화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
툭툭
그는 내 어깨를 토닥이더니 접견실을 열고 나갔다.
얼음장을 뒤집어 쓴 것 같다.
황궁에서 가장 끄트머리인 서쪽 궁이었지만 궁은 궁.
수많은 소문들이 오갔고, 들어도 못들은 척, 봐도 못 본 척, 살얼음 판 속 장님과 벙어리가 되어야 하는 게 바로 궁이다.
그런데 황태자 부부의 아이라니!
당연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세간을 뒤흔들던 황태자 부부의 죽음
그리고 연달은 황제의 죽음. 남겨진 남자아이.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은.
이 황자가 정권을 잡고 자연스럽게 황태자 부부의 죽음도, 황제의 죽음도 묻어졌다. 당연히 아이는...
그 생각까지 미치자마자 나는 달렸다.
“리아 무슨일이야-!”
“어 리아-?”
중간에 코넬과 제이니를 빠르게 지나갔지만, 상관없다. 오직 복도만. 그리고 정원.!
왜 생각을 못한 거지? 궁 안의 아이. 검은 머리 노란 눈. 모든 단서들은 황실의 핏줄을 가리키고 있잖아!
아이. 아이. 그 아이가..!
미끄러운 대리석 복도를 지나 정원 입구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곳에..
예쁜 태양을 품고도 밤 같던 그 아이가, 말없이 나를 위로해주던 아이가. 내 흥얼거림에 예쁘게 반짝이던 아이가. 머리를 빗고 묶어주니 말없이 얼굴을 붉히던 아이가.
있었다. 그곳에.
처음 봤던 정원 덤불에 몸을 숨기고.
다섯 발자국만 가면, 다섯 발자국만 가면 아이를 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때문일까
다가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