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어.!..”
헉! 또 말했어! 미쳤어! 크리스리아! 너 미쳤어!
나는 주둥이를 황급히 막았다. 우습게도 5년 넘게 말을 하지 않다가, 그새 몇 달 말을 했다고 말부터 나갔다.
눈앞이 하얘져 횡설수설하다가 결국 문손잡이를 잡았다. 도망쳐!!
“저기 잠깐! 리아.!!!!!!!”
....?
멈짓. 손잡이를 잡은 상태 그대로 굳었다.
“리아 나야. 제리!!!”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제리?
“리아.... 너.. 너 말 할 수 있는 거야?”
제리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묻어나고 뒤에게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세상에 리아. 리아.”
제리.. 제이프리 페이린 스튜어트. 네가 어떻게..
뒤를 돌고 싶었다. 뒤를 돌아 제리를 보고 말하고 싶었다.
‘나 이제 행복해. 나 이제..’
6년이 넘도록 못 봤다 아니, 안 봤다. 꿈에서도, 부모님보다 그리웠던 얼굴.
“리아!”
그러나 나는 또 다시 도망쳤다. 6년 전 그때처럼...
헉헉
골목길에서 숨을 헐떡이다 황급히 주변을 보자 아무도 없었다.
“하.. ”
털썩
나 뭘 실망하는거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자, 그 동안 테이를 만나고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흡....”
제리...키가 홀 오빠 코를 닿는다더니, 1년 사이에 더 컸구나.
머리색은 여전하네. 눈 코 입은..
“...”
제대로 못 봤다. 어떻게 생겼지?
아까만 해도 생생하던 그의 모습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어릴 때 모습 조차도..
멍하니 주저앉아 있기를 한참, 잊고 있던 식재료 주문이 생각났다.
..나 어떡하지?
또 가면 제리가 있을텐데? 아니 근데 걔는 왜 거기 있는거야?
괜한 부끄러움과 원망이 제리한테 향해서 욕하다가 그만 두었다.
“나 여기서 뭐하냐...”
자조적으로 한숨을 쉬며 하늘을 보니 벌써 붉게 물들고 있었다.
가야겠지..에효..
일어서려고 땅을 짚는데, 그때 갑자기 쭈글쭈글한 손이 쑥 튀어나왔다.
“?..”
할머니? 일으켜 세워 주시는 건가?
손을 맞잡으며, 고맙다고 말을 해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
이런 고민까지 하다니, 나 정말 많이 변했구나.
결국 나는 말하기를 포기하고 꾸벅 인사하고 가려는데, 할머니가 좀처럼 손을 놔주질 않았다.
“....?..”
저기요. 놔 주세야지요.
판에 글도 못쓰고 나는 난처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손을 빼려 안간힘을 썼다.
다른 손으로 열심히 빼내려고 해도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아니 오늘 일진 왜이래 진짜.
이 할머니는 뭔 힘이 이렇게 쌔!
끙끙거리며, 할머니를 쳐다보자, 그녀는 돌처럼 안 움직이더니 빤-히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이 기이하게 빛나더니 그녀의 손가락이 손등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윽! 저기요!”
“그래..그거야...”
“...네?”
돌아오는 대답이 괴상하다.
이 할머니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가봐.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게 점점 무서워져서 뒷걸음치는데, 그녀가 얼굴을 들이밀고 비뚤비뚤한 누런 이를 슬쩍 드러내며 웃었다. 주름진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는데, 기이하게도 무척 신나 보였다.
“그거야! 그렇게 말을 해! 리!”
축축하고 역겹도록 구역질나는 냄새가 얼굴에 퍼졌다.
그러나 나는 감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거야. 그래 잘한다 우리 리아!”
“.....당신 누구야. 당신 누군데 내 이름을 불러.”
할머니는 다른 한 손으로 급기야 내 볼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까슬까슬한 감촉이 소름끼쳤다.
“우리 불쌍한 리아. 우리 불쌍한 리아.”
불쌍한 리아. 그녀는 한사코 내 손을 놓지 않고 보다듬으면서 그 말을 반복했다.
사고 회로가 정지해서 머리가 아득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모르는 할머니가 나를 불쌍하다는건가?
근데 그 할머니는 내 이름을 알고?
뒤로 주춤거리면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하필 여기 골목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
“저기-!”
멀리 지나가는 사람들을 부르는데, 거기까지 소리가 안 들리는 듯했다.
“저기!”
다행히 한 아줌마가 외침을 듣고 고개를 이쪽 방향으로 돌렸다.
“저기 도와주세요!!!!”
그녀가 절박한 내 표정을 보고 이상한지, 내게 다가오려 하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소란이 일었다.
“저기 봐!” “세상에!” “맙소사!”
그 아줌마도 오다말고 어느 한 방향을 보고 놀란 듯 발걸음을 멈추는 게 아닌가.
‘뭐지?’
아직도 내 뺨을 어루만지는 할머니의 손길을 애써 무시하며, 할머니를 질질 끌고 골목 밖으로 와 보니 모두가 한 방향을 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저쪽이면 황궁?
불안하고 긴장된 마음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돌리자,
“불이다!”
누군가의 외침이 아련하게 머릿속에서 울렸다.
두려움이 소화되지 않은 식사처럼 뱃속에서 똬리를 틀었다.
토할 거 같았다. 아니, 숨을 호흡이 안 나왔다.
연기가 자욱하게 나는 황궁.
“안 돼..”
서쪽이다. 서쪽 궁이다.
공포가 내 몸을 파고들었다. 시아가 술렁이고 몸이 얼어붙어 버렸다.
가야 해. 테이. 가서 내가-
“..가야...”
“안 돼!!!!”
그러나 뛰어나가려는 발걸음은 곧장 저지되었다.
할머니의 손아귀 힘이 더 강해지더니, 어떤 인간의 눈동자보다 더 짙고, 더 파란, 얼음처럼 타는 파란 광채가 빛났다.
“가면 안 돼. 너는 고통 받을 거야. 네 목소리. 네 노래 모두!!!!!!”
그녀의 입에서 겨울 호수에 깔린 얼음이 쩌저적 갈라지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흡사 저주와 같은 말들이.
절박해보이기까지 하는 그녀 너머, 저 멀리 불타는 궁이 보였다. 입을 열어야 했다. 아니, 달려가야 했다. 이럴 때가 아니야. 할머니 아니에요. 아니야. 나는..
그러나 목구멍과 몸 모두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미래로 가. 리아. 미래로 가. 모든 일이 끝난 미래로-”
또 다시 축축하고 역겹도록 구역질나는 냄새가 얼굴에 퍼졌다. 질척한 소곤거림이 머릿속에 울리더니, 세상이 빙글 빙글 돌았다. 속이 출렁였다.
‘눈을 감아. 모든 게 끝나 있을거야-’
누군가가 끊임없이 내게 속삭이며, 어루만졌다.
‘리아 미래로 가. 미래로. 모든 일이 끝난-’
안돼요. 나는 가야 해. 테이가.. 테이가-
‘행복해져야 해 리아- 이것밖에 방법이 없어-’
칠흑 같은 어둠에 삼켜지고 나는 그대로 추락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까마득한 심연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