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각또각, 하이힐 굽이 아스팔트 길 위로 부딪히는 소리가 어둑한 골목길에 울린다. 대개는 경쾌하게 들릴 소리건만, 이 소리는 묘하게 처지는 느낌이다.
캄캄한 오르막길에 등대처럼 드문드문 솟은 가로등 불빛이 발소리의 주인에게 쏟아져 내렸다.
큰 키에 마른 몸은 늘씬하고 슬랙스에 리넨 재킷이 단정한 인상을 준다. 무채색의 옷과 대비되는 핸드백은 화려한 모양새가 포인트가 되어 전체적으로 멋스러운 느낌.
하지만 깔끔하면서도 맵시 좋은 차림새도 여인의 피곤한 기색을 감춰주지는 못했다.
“여름이라 해가 길 줄 알았는데.”
그녀는 제 손목에 맨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은색의 금속 편을 짜 맞추어 만든 가느다란 시곗줄에 둘레에 작은 큐빅을 촘촘히 박은 작고 동그란 시계판. 띄엄띄엄 선 가로등 불빛이 부서져 간신히 알아본 시각은 밤 열 시 반. 제아무리 여름이라지만 대한민국에서 이 시간까지 해가 떠 있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긴 해가 길어 봐야 소용이 없었겠구나.”
허탈한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얼른 집에나 가자.”
어두운 골목길이 왠지 모르게 맹수의 아가리처럼 보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깜깜하지?”
발소리가 빨라진다. 깜깜한 데다 인적까지 드문 귀갓길.
멀리 보이는 원룸 건물은 오늘따라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건지 죄 불이 꺼져 있었다.
허겁지겁 발걸음을 재촉해 다다른 대문. 어차피 잠기지 않으니 도어락은 무시하고 묵직한 철제문을 열어젖힌다. 외벽을 따라 난 계단을 올라가면 복도 문이 보인다. 그 문고리를 붙잡는 손바닥이 이상하게 식은땀으로 축축해진다.
“기분 탓인가, 오늘따라 이상하게 불안하네.”
숨을 폭 내쉬고는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에 쓱쓱 문질렀다.
“뭐, 어차피 내일이면 본가로 들어가기로 했으니까. 하루 사이에 별일이야 있겠어?”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문고리를 쥐는 손끝이 달달 떨린다.
쿵 쿵 쿵. 가슴이 방망이질 친다.
찰칵, 문고리를 돌린다. 끼이익,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지른다.
안으로 한 발을 내딛자 복도에 센서 등이 켜진다. 복도 안쪽에는 웬일인지 남자 한 명이 서 있다.
“보미야, 오랜만이야.”
아는 얼굴이다. 아니, 어떻게 저 얼굴을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남현 오빠...”
대학교 2학년 때 만나, 20대를 함께한 과거의 연인. 자그마치 1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공유했던 사람.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반가움이나 그리움 같은 말랑말랑한 감정 대신, 공포에 젖어 들었다.
그대로 몸을 돌렸지만, 복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딜 가려고?”
팔을 붙잡은 손길이 억세다. 귓가에 쟁쟁대는 목소리가 음산하기 짝이 없다.
“나랑 얘기 좀 해.”
“난 할 얘기 없다고 했어.”
"얘기 좀 하자고."
"손부터 좀 놓고 얘기하자."
보미는 제 팔을 붙든 손을 뿌리치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것은 무익한 반항이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남현의 화를 돋웠다.
얼굴을 노기로 벌겋게 달군 사내의 빈 왼손이 움직였다.
짜악! 보미의 오른뺨이 삽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아픔과 분노가 방울져 화끈거리는 살갗 위로 흘러내렸다.
"그래! 오빠는 이런 인간이잖아! 내가 왜 헤어지자고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나 아직 너 사랑해, 보미야."
남현은 부지불식간에 날아든 폭력에 놀라 어안이 벙벙한 보미의 팔을 붙들어 질질 끌고 갔다.
"그러니까 우리 얘기 좀 하자."
두 사람이 멈춘 곳은 보미가 세 든 303호의 현관문 앞이었다.
"문 열어줘, 보미야. 오빠가 사랑하는 거 알지?"
"내가 왜 오빠한테 문을 열어줘."
여전히 보미의 목소리는 차갑다.
하지만 그녀의 감정과 별개로 붙들려 비틀린 왼팔은 슬슬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살짝 움직인 손가락 끝에 무언가 살짝 닿았다.
그녀의 뒤에 바짝 붙어 선 남현의 허리에 매인 힙색이었다.
힙색이라니. 이건 좀 이상한데. 남현 오빠는 가방 안 들고 다니잖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찰나, 지퍼가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다음은 그녀의 목덜미. 목에 차고 예리한 것이 와서 닿았다.
"오빠 미쳤..."
"보미야, 오빠 화 날 것 같은데."
그의 목소리에서는 아직 웃음기가 묻어나왔다.
미친 새끼. 칼을 들이대고서는 뭐가 어쩌고 어째?
보미는 혀 위까지 들어찬 욕지거리를 애써 내리눌렀다. 붙잡히지 않은 오른손을 움직여 현관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목에 닿았던 차가운 감촉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등 복판이다. 뾰족한 것이 등을 콕 찌르듯 와서 닿는다.
"진작 좀 열어주지. 얼른 들어가자. 덥다."
수틀리면 저걸로 찌르기라도 하겠다는 걸까.
"그, 그래. 들어와."
당연히 집에 들이고 싶을 리 없다지만, 그보다는 등에 와 닿은 칼이 더 크게 와닿는다.
마지못해 열린 문으로 들어선다. 공포로 머리가 하얗게 빈다. 입술이, 손끝이 차게 식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내가 보낸 꽃바구니는 어쨌어?”
바로 어제, 큼직한 장미 바구니를 배달받았다. 붉은 장미가 가득 핀 화려한 바구니에는 ‘사랑해’라 적힌 카드까지 꽂혀 있었다.
“버, 버렸어.”
“버렸다고? 그럼 내가 보낸 인형은? 그것도?”
분명히 두 사람 모두를 알고 있는 지인들에게는 이사했다는 것도 비밀로 하고서 야반도주하듯 원룸을 옮겼었다. 그것이 벌써 석 달 전.
그리고 지지난 주부터 어떻게 알았는지 반지며 곰 인형, 꽃다발에 옷까지. 별별 물건을 보내 왔다. 물론 단 하나도 받지 않았다. 꽃이나 음식 같은 것들은 그냥 버려 버렸고, 상하지 않는 것들은 전부 택배비를 줘가며 반송했다. 분명 반송된 것들도 받았을 텐데, 저렇게 시치미를 뗀다.
“돌려보냈잖아.”
보미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힘이 빠졌다. 거절하는 말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남현의 눈치를 봤다.
“아, 그랬지.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만 잊어버렸네.”
그는 아직도 웃는 낯을 했다. 하지만 눈빛은 서늘하게 가라앉은 채, 입만 씩 웃는 얼굴이 섬뜩했다.
"그래도 괜찮아. 간만에 얼굴 보니까 좋네."
여전히 오른손에는 칼을 쥔 채로, 보미를 끌어안았다. 그 품에 갇힌 보미는 너무 놀라 얼어붙어 버렸다.
"정말 보고 싶었어. 이 어깨를, 팔을, 너를 이렇게 안고 싶었어."
달뜬 목소리가 여인의 뺨에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녹진한 숨결이 절절히 울려 손등을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다.
"사랑해."
남현은 정말로 그녀를 여지껏 사랑하고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받는 보미로서는 소름이 끼친다. 원치 않는 마음이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으니 덜컥 겁까지 났다.
"이러지 마, 오빠..."
"사랑해, 보미야."
그는 끊임없이 사랑한다 되뇌지만, 정작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비어있던 왼손이 보미의 옷섶으로 향한다.
"하, 하지 마!"
"뭘?"
남현은 보미를 그대로 밀쳐 바닥으로 자빠뜨리고는 그 위에 올라앉았다. 오른손에 든 칼은 그녀의 목에 바짝 가져다 대고 왼손으로는 옷을 벗겼다.
"이러지 마, 오빠..."
겁먹은 두 눈가에 두려움이 맺히다 방울져 떨어진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뜨끈한 액체가 가늘게 빛난다.
"왜 울어, 보미야. 그렇게 반가워?"
"정신 차려, 오빠. 오빠 지금 제정신 아니야..."
"내가 뭘?"
준수한 얼굴에 자리한 온화한 눈이 분노로 번질거린다. 그와 함께 칼날이 목에 와 닿는다. 차갑고 날카로운 감각에 등골까지 서늘해진다.
"네가 잘못한 거야. 나는 널 아직도 사랑하는데도 거절했으니까."
연애하던 동안에는 그토록 좋았던 섬세하고 긴 손가락이 속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보미는 수치감에 눈을 감아버렸다. 깨물린 입술이 허옇게 질려 바들바들 떨렸다.
"제발, 싫..."
보미는 그 더듬는 손길을 뿌리치려고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틀었다.
"악!"
비명과 함께 칼날이 흰 목에 붉은 선을 그린다.
바짝 붙인 칼날에 베인 목은 살갗이 쩍 벌어져 붉은 속살을 드러냈다. 피가 방울져 배어 나와 뚝뚝 흘렀다.
"보, 보미야."
남현은 쥐고 있던 칼을 내던지고 그녀의 목에 난 상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어떻게든 피를 막아보려는 듯이.
하지만 그녀의 생명은 그 흰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와 온통 붉게 물들였다. 붉은 강이 흘러 누런 장판에 호수를 그려 반질반질 빛났다.
"아, 흑..."
보미는 힘겹게 숨을 뱉으며 흐려지는 눈을 감았다. 찰나가 영원 같아 검게 닫힌 시야로 삼십 년 세월이 흐른다.
"응?"
보미가 다시 눈을 뜨자, 눈앞이 부옇게 흐렸다. 아니, 정확히는 또렷한 시야에 한 겹 필터를 씌운 듯 보였다.
"안 아프네?"
불에 덴 듯 홧홧하던 목덜미가 전혀 아프지 않았다.
보미는 목덜미를 쓸어 보며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가슴팍에 무언가 흰 실이 돋아나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저거, 나? 유체이탈이야?"
"아닙니다."
"꺅?"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디찬 여성의 목소리. 그리고 그와 함께 실이 저편에서부터 불타기 시작했다.
물론 보미는 제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느라 보지 못했겠지만.
"누구세요?"
서른 살쯤 되었을까 싶으면서도 언뜻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여인이 등 뒤에 서 있었다.
어깨에 닿지 않는 길이에 숱 많은 새카만 단발머리가 창백한 얼굴을 빙 둘러싸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깊고 탁한 눈동자만큼이나 까만 정장 차림은 공무원 같은 인상을 주었다.
"차사입니다. 산 자들은 대개 저승사자라고 많이들 부르는 모양이더군요."
"저승사자라뇨? 농담이죠?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요? 이거 불법 침입이에요!"
저승사자라니. 너무도 황망한 말에 아무 말이나 다다다 쏘아붙였다.
"좀 진정하세요. 당신은 사망한 것입니다."
"이제 겨우 서른셋인데, 죽었...다구요?"
"네. 죽음은 누구도 되돌릴 수 없으니 그냥 받아들이세요."
자신을 차사라 소개했던 여인이 오른손을 자신의 방향으로 손바닥을 두고 쫙 펼치자 주변에서 뭉클뭉클 검은 연기 같은 것이 모여들어 직사각형의 판 모양을 이루었다. 꼭 태블릿 PC처럼 보이는 물건이 생겨났다.
"요즘 저승사자는 태블릿 PC를 써요?"
"물론입니다. 저승 명부가 얼마나 무거운 줄 아십니까."
차사는 이편에는 한 줌의 시선도 주지 않으며 화면을 톡 톡 눌러댔다.
"어디 보자... 김보미 씨 맞으시죠?"
너무도 황망한 상황이라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차사 역시 별다른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던 듯 계속 화면을 들여다보며 연신 무엇인가 터치해댔다.
"응...?"
별안간 차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놀란 눈으로 화면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이편을 바라보았다.
"김보미 씨, 당신, 대충... 한 20년에서 19년 전쯤에 크게 아픈 적 있지 않습니까?"
"네, 초등학교 6학년 땐가 병원에서는 말짱하다는데 고열에 두통에... 엄청 고생했었어요."
열세 살이 되던 해 여름에 있던 일이었다. 심하게 몸살감기에 걸린 것마냥 제대로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온종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더랬다. 게다가 열도 38도, 39도를 오르락내리락 종일 시달렸었다.
"당신 어머님께 감사하세요. 원래는 그때 죽고 환생했어야 할 운명이었던 것을."
"아니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예요?"
"말 그대로입니다. 당신 어머니가 대체 무슨 짓을 벌였는지는 몰라도, 정해진 운명이, 바뀌었어요."
"어, 그러니까, 원래는 그때 죽었어야 했다는 그런..."
"네. 대신에 당신 영이 쪼개졌어요. 쪼개진 영이 다른 세계로 건너가 본디 환생하기로 예정되었던 몸에 깃들었습니다."
"영, 이라니. 그거, 만화 같은 데 나오는 영혼?"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 지금의 상황만큼이나 어이없고도 황당한 이야기를 비현실적인 존재에게 듣고 있노라니, 지난 시간 동안 배워온 지식이 쓸모없게 느껴졌다.
"뭐, 편할 대로 이해하십쇼."
"아니, 어, 하... 아니, 그래서... 아무튼, 난데없이 영인지 뭔지 쪼개졌단 얘기는 왜 하는 건데요?"
"저쪽 세계의 반쪽짜리 영이 깃든 몸도 지금 죽어가는 중이고, 그쪽의 혼은 이미 멀리 떠났어요. 숨만 간신히 붙어있죠."
"그런데요?"
"김보미 씨에게는 선택지가 하나 더 있다는 겁니다. 쪼개지기는 했어도 희미하게 연결된 저쪽의 아직 산 육신으로 가는 것. 당신이 깃들면 살아날 거예요."
"아니 그런데, 자꾸 저쪽 세계라고 하는데 대체 그거 뭔데요?'
"그건 알려드릴 이유가 없으므로 넘어가죠. 그보다, 저쪽의 육신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선택해요. 넘어가시겠어요?"
"당연하죠!"
차사는 한숨을 폭 쉬더니 태블릿 PC를 놓고 다시 오른손으로 무언가 당기는 시늉을 했다. 둥둥 뜬 태블릿 PC의 곁으로 하얗게 빛나는 칼날이 생겨났다. 그녀는 그 칼로 보미의 왼쪽 손목을 얕게 벴다.
"악!"
"엄살 부리지 마세요. 안 아플 겁니다."
"어? 어머, 진짜..."
아프기는커녕 칼날이 닿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베인 상처에서는 붉은 피 대신에 하얀빛을 희미하게 내뿜는 반투명한 액체가 스며 나왔다. 차사는 뭉클뭉클 솟아나는 그것을 보미의 손바닥 전체에 꼼꼼히 문지르고서는 둥둥 뜬 태블릿 PC의 화면을 그녀에게 잘 보이도록 돌려 내밀었다. 거기에는 손 윤곽이 그려진 화면이 떠 있었다.
"거기, 손바닥을 대세요. 꾹 누르면 됩니다."
"아, 네에."
차사가 시키는 대로 손바닥을 화면에 꾹 눌렀다. 말간 액체는 묘하게 찐득거려 손바닥이 들러붙는 느낌이 들었다.
"새로운 인생, 잘 살아 보세요. 건투를 빕니다."
그 말을 끝으로 눈앞이 서서히 밝아졌다. 시야가 온통 새하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빛이 서서히 걷히면서 눈에 들어온 풍경이 생소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천장 아래로 희미한 빛을 내는 새 같은 것이 둥둥 떠다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한 마디를 내뱉으려 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 않고 애먼 목이 통째로 찢기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크, 으..."
"아가씨!"
기억에 없는 높은 목소리.
화려한 천장으로 꽉 찬 시야에 한 소녀의 얼굴이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