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가제)이계 낭랑
작가 : 부지화
작품등록일 : 2018.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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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다
작성일 : 18-02-08     조회 : 306     추천 : 2     분량 : 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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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씨, 정신이 좀 드세요? 기분은 좀 어떠세요?"

 

 소녀는 능숙하게 부드러운 손길로 보미의 등을 받쳐 앉혀주었다.

 들어본 적 없는 언어. 하지만 알아듣고 있다. 귀를 통해 머릿속으로 자연스레 우리말로 바뀌어 들어온다.

 

 "흐..."

 

 무언가 대답을 하고 싶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화끈한 통증이 목을 벅벅 긁어 목소리를 내리누른다.

 무의식적으로 아픈 목으로 손이 향했다. 손끝에 살갗 대신 매끄러운 실크의 촉감이 미끄러졌다.

 고급스러운 천이 목을 꼼꼼히 감싸고 있었다. 보미는 답답한 느낌에 천을 풀려고 했다.

 

 "안 돼요, 아가씨."

 

 소녀가 그녀의 그 손을 붙잡아 막았다.

 

 보미는 그제야 소녀의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보았다.

 열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앳된 인상이었다.

 빛바랜 은발, 뽀얀 얼굴. 분홍빛을 머금은 뺨은 깃털 모양으로 얕은 금이 가 기묘하게 보인다. 게다가 피처럼 붉은 눈동자는 어딘지 섬뜩하기까지 하다.

 

 "제 얼굴, 알아보시겠어요? 아가씨의 시녀인 리난이어요.”

 

 리난, 어딘지 중국어처럼 들리는 억양의 이름이었다. 그보다, 시녀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 건지.

 

 이쪽 세계의 그녀는 허약한 건지, 아니면 되살아난 세계가 너무 달라서인지, 고작 앉아 있는데도 머릿속이 핑글핑글 돌았다.

 

 "잠시만 계세요, 아가씨. 지금 마님 모셔올게요."

 

 자신을 리난이라 부른 소녀는 방을 빠져나갔다.

 

 널따란 방 안에 홀로 남겨진 보미는 우선 제 몸을 살폈다.

 작은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하고 뽀얀 피부에서는 좋은 향이 풍긴다. 동그란 모양으로 깔끔하게 다듬은 손톱에 굳은살 하나 없는 손. 팔다리는 군살은커녕 가는 근육도 붙지 않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만 같다.

 가녀린 몸에는 사각거리는 느낌이 기분 좋은 하얀 실크 원피스가 걸쳐져 있었다. 아니, 원피스라기보다는 한복 치마만을 걸친 느낌에 가까울까.

 

 "아아, 아가, 메이린, 깨어났구나."

 

 메이린. 아마도 '이쪽 세계'에서 보미의 이름일 것이다.

 

 울음 섞인 목소리를 흘리는 화려한 차림을 한 미인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많아야 서른다섯 살 남짓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어미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그러게 입궁 날짜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굳이 그러고 나가서 이 어미 속을 썩이느냐?"

 

 입궁, 교과서에서나 보던 단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왔다. 보미, 아니 이제는 메이린이라고 불러야 할 그녀의 머리는 한층 더 아파 왔다.

 

 ‘어머니’의 뒤를 따라 들어온 중년의 여인이 메이린의 얼굴 앞으로 낯을 들이밀었다. 당황한 메이린은 몸을 뒤로 빼려 했으나, 애석하게도 방금 깨어난 팔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여인은 메이린의 얼굴이며 천이 감기지 않은 곳들을 구석구석 들여다보다 미소를 지었다.

 

 "호오, 그래도 다행히 흉이 남지는 않겠군요. 상처가 아예 없었던 것처럼 보이겠습니다."

 "물론이오, 상궁. 우리 집안의 염술사(念術士)인데 그 실력이야 두말하면 입 아프지."

 

 염술사, 라니. 알아는 듣겠으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단어다.

 

 "하기야, 진 가문이 거느린 상직사(想織士)와 염술사의 실력은 온 나라에 이름이 높지요. 그래도 죽을 사람을 살려낼 정도였을 줄은…."

 "말씀이 지나치시오, 상궁. 좀 다치기는 하였어도 멀쩡히 살아 있는 아이에게 죽을 사람이라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황궁에 들어가지는 아니하였으니. 제가 교육하던 예비 소주 아닙니까.”

 “과연.”

 

 어머니는 손목에 끼고 있던 팔찌를 뽑아 상궁에게 건넸다. 금을 물리고 붉은 보석을 박아 장식한 새하얀 색의, 화려한 팔찌였다.

 

 “양지옥인가요? 과연 진 가문이로군요. 저는 이만 소주를 문제없이 모실 채비를 하러 가보도록 하지요.”

 팔찌의 빛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상궁은 만족스레 웃으며 방을 나섰다.

 "태비전 상궁 주제에…아가, 기분은 좀 어떠냐?"

 

 방을 나서던 등을 노려보던 그녀는 금세 고개를 돌려 이편을 바라보았다. 온 얼굴로 메이린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가씨께서는 아직 말씀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마님."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를 여인이 메이린의 어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가무스름한 얼굴에 새카만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어딘지 영특한 까마귀처럼 보이는 인상이었다. 키는 작달막해도 당당한 몸가짐 덕분인지 전혀 어리게 보이지 않았다.

 

 "상처는 제가 좀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눈동자만큼이나 새카만 머리카락에 까만 옷을 휘감은 여인이 메이린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저가 들고 왔던 나무 합의 서랍에서 흰 장갑을 꺼내 끼고는 메이린의 목에 손을 댔다. 섬세한 손가락이 갑갑하게 감겨 있던 천을 풀어냈다. 드러난 살갗에 스치는 공기가 홧홧하다. 그 느낌에 떨리는 눈썹 끝을 봐서였을까.

 

 "그러게 그 귀한 몸을 어찌 그리 함부로 던지셨습니까, 아가씨. 대동 시녀가 리난이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을 겁니다."

 

 그녀는 풀어낸 천을 내려놓고는 침대 머리맡의 거울을 들어 올렸다.

 

 "직접 보세요. 얼마나 위험했던 상황이었는지."

 "자네, 지금!"

 

 메이린은 어머니의 노기 어린 목소리를 무시하고 거울을 받아들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은 성마르고 까탈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희고 투명한 피부에 청보라색 눈동자가 사파이어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그리고 갸름한 얼굴을 받친 가녀린 목에 난 시뻘건 상처가 보였다. 무언가 큰 짐승에게 물어뜯긴 듯 너덜거리는 가장자리에 붉은 실 같은 것이 뭉쳐 있었다.

 메이린은 저도 모르게 그 실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닿은 손끝에는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붉은 실은 손가락을 피해 목의 상처로 달라붙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던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실제로 염술의 힘을 보신 건 처음이십니까. 그저 상직사가 천에 짜 넣은 상상을, 천을 매개로 염술사가 구현해내는 겁니다. 아가씨의 목에 감은 천은 찢긴 살이 아무는 상상을 짠 거였습니다."

 

 아까 이야기하던 상직사니 염술사니 하던 게 이걸 이야기하는 거였을까. 조금은 복잡한 머릿속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하기사, 입궁하시고 나면 경솔하고 싶어도 경솔할 수조차 없게 되시겠군요."

 

 그녀는 풀었던 천을 다시 메이린의 목에 감고, 손바닥을 댔다. 따끈따끈한 기운이 천에서 퍼져 나와 상처를 기분 좋게 감쌌다.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나이다. 남산의 지배자, 진 가문 휘하 상직사이며 동시에 염술사인 상념술사, 쉔잉이라 합니다. 저의 상념은 사람의 몸을 낫게 하는 데에 특히 큰 힘을 발휘합니다."

 

 자신을 쉔잉이라 소개한 여인은 물러서서 바닥에 엎드려 절했다.

 

 이제는 메이린이 되어버린 보미는 아직도 얼떨떨했다. 다른 세계라고 해봐야 외국일 것이라 했던 짐작이 얼마나 안일한 것이었던가. 정말로 다른 법칙이 존재하는 세계였을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사람 머릿속의 상상으로 실을 뽑아 천을 짜고, 그 천에 깃든 상상을 구현해낸다니. 판타지 소설 속에 퐁당 빠진 기분이 들었다.

 

 “아가, 쉔잉은 아주 재능 있는 상념술사란다. 그래서 네게 시녀 대신 딸려 보내기로 했지. 궁이란 곳은 성총을 입어도, 입지 아니하여도 고달픈 곳이니 너를 지킬 수 있도록 말이야.”

 

 다시, 궁. 아까도 입궁이라고 하였다.

 

 “그래도 입궁일 전에 깨어나 다행이구나. 쉔잉, 내 딸은 오늘 안으로 완치가 되는 게 맞겠지?”

 “물론입니다, 마님. 오늘 밤이면 말씀은 물론이요 뛰셔도 될 겁니다.”

 “그래, 너만 믿으마.”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메이린을 한참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리난, 네 아가씨의 입궁 준비를 좀 해야겠구나. 거들어 주련?”

 “네! 그럼 아가씨, 쉔잉 님과 쉬고 계시어요. 저는 잠시 다녀올게요.”

 

 리난 역시 그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그럼 저도 힘을 조금만 더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쉔잉의 손바닥이 메이린의 목을 가볍게 감쌌다. 손바닥이 닿은 자리를 중심으로 다시 따뜻한 기운이 뭉클뭉클 솟아났다.

 왠지 모르게 살갗이 나달대던 자리가 간지럽다.

 

 “저, 잠시만! 응?”

 

 이번엔 말해도 목이 아프지 않다.

 

 “거의 다 나으신 모양이군요.”

 

 쉔잉의 자그마한 손이 떨어졌다.

 

 “진 가의 사람들은 편하지요. 의생 따위는 필요 없으니 말입니다.”

 

 씁쓸한 무언가를 입안 가득 머금은 표정. 하지만 메이린에게는 지금 그보다 더 급한 것들이 산적했다.

 

 “쉔잉, 이라고 했지?”

 “하문하시지요, 아가씨.”

 

 눈앞의 가무잡잡한 여인은 금세 표정을 바꿨다. 차분한 미소를 머금고서 이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살았네. 살려줘서 정말 고마워.”

 “네?”

 

 명경지수 같던 얼굴에 슬며시 파문이 인다.

 가무스름한 낯이라도 한눈에 알아볼 만치 벌겋게 단 얼굴. 어딘지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 게다가 마악 목으로 넘기려던 입속의 물을 뿜어 턱에 물칠을 한 꼬락서니.

 지나치게 당황한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려던 차에.

 

 “내원 노비들에게 전해 들은 것이랑 많이 다르시군요.”

 

 그녀는 허둥대는 손길로 입가를 훔쳤다.

 

 “죄송합니다. 제가 전해 듣기로는 몹시 귀족적인 분이시라 하여,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결례를 용서하시지요.”

 “그, 글쎄. 참된 귀족이라면 은인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줄도 알아야 하니까.”

 “그러시군요.”

 

 쉔잉은 다시 목에 감긴 천을 풀었다. 이번에는 드러난 맨살은 조금 전만큼 따갑지 않았다.

 

 “이제 거의 다 나았습니다. 흠, 혹여 간지럽지는 않으십니까?”

 “조금….”

 “거의 다 나으셔서 이 이상 염을 쏟을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마는, 혹여 무심결에 긁으실지도 모르니 이건 하룻밤 더 감고 계시지요.”

 “응.”

 

 쉔잉의 손끝이 목을 스쳤다. 섬세한 손길이 그 손길보다 부드러운 천을 꼼꼼히 감았다.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찾아주시기를.”

 

 탁, 장지문이 닫히고 그제야 메이린은 간신히 혼자가 될 수 있었다.

 

 “너무 정신없었어.”

 

 이제는 두 발로 일어서 걸어 다닐 만큼의 힘도 났다.

 메이린은 침상에서 일어나 방 안을 둘러보았다.

 

 “메이린이 일기 같은 걸 즐겨 쓰던 사람이면 좋겠는데.”

 

 방의 한쪽에는 책이며 말린 죽간이 가득한 서가 셋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서가를 채운 것들은 그다지 손을 탄 듯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제목도 보지 않고 무작위로 골라 펼쳐 든 책은 접힌 흔적조차 없었다.

 

 “책, 별로 안 좋아했나 보네.”

 

 책장에 적힌 글자는 한자처럼 보였다.

 

 “비슷하긴 해도 한자는 아닌 거 같은데. 자신이 없네.”

 

 언뜻 한자랑 비슷하게 보이지만, 본 적 없는 부수로 이루어진 글자들. 아무리 한문에 자신이 없다지만 이 정도로 하나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다.

 

 메이린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책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얼마를 집중했을까, 머리가 핑글핑글 돌더니 글자가 천천히 읽히기 시작했다. 말을 처음 들었을 때와 비슷한 감각. 정신을 집중하자 생소한 문자에 희미하게 한글과 본래 알던 한자가 덧씌워진 듯 보였다.

 

 “머리는 좀 아프네.”

 

 현기증은 좀 가라앉았으나, 이번에는 관자놀이가 뜨끈하니 아팠다.

 

 메이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가를 훑어보았다.

 

 가운데 서가의 가장 아래 칸까지 이르자, 무언가가 그녀의 눈길을 붙들었다. 책등에 여사(女史)라 적힌 그 책은 가장자리도 닳고 손때도 묻어, 여러모로 손을 탄 느낌이 들었다.

 자연스레 그 책으로 손길이 갔다.

 

 파라라락, 넘기던 책장이 멈췄다. 어딘지 재질이 다르게 느껴지는 책장이 손에 잡혔다. 메이린은 그 책장들을 한 손에 쥐고 잡아당겨 보았다. 투두둑, 허술하게 맨 제본실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종이뭉치가 떨어져나왔다.

 

 “성평(成平) 132년 6월 20일. 내일은 간택일이다. 이번에는 부디 그 사람과 맺어지기를….”

 

 첫번째로 쓰인 글귀였다. 꾹꾹 누른 마음이 담뿍 담긴 글씨체.

 

 “이거, 일기였구나.”

 

 획 하나, 점 하나 똑똑 끊어 마음이 담긴 이야기는 성평 132년 6월 20일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전의 이야기는 없었다.

 

 대략 석 달간의 이야기.

 그저 간택일에 간택되었으나, 그것이 썩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었으며 누군가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으나 맺어질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나마 수확이라면, 메이린이 매일 받았던 후궁 교육 내용을 정리하여 적어둔 것을 발견했다는 정도일까.

 

 “아가씨, 이제는 정말 주무셔야 해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방문 밖에서 리난의 목소리가 들였다.

 

 “알았어.”

 “하오시면 침수 봐 드리러 좀 들어가겠습니다.”

 “잠깐 기다려.”

 

 메이린은 후다닥 종이뭉치를 아까의 책에 끼워 넣고 다시 서가에 꽂았다.

 

 “이제 들어와도 괜찮아.”

 “네, 그럼.”

 

 소녀는 능숙하게 메이린의 잘 준비를 거들었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셔야 해요, 아가씨. 그럼 내일 뵐게요.”

 

 정적에 물든 방안이 캄캄해졌다. 눈을 뜨고서부터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였을까, 이전 세계에서 그녀를 괴롭히던 불면증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눈을 감자 금세 잠이 쏟아졌다.

이난영 18-02-10 02:18
 
작가님 재미있어요! 보미가 앞으로 어떻게 헤쳐나갈지 궁금하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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