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창문을 타 넘어 들어온 아침 햇살이 메이린의 뽀얀 눈꺼풀을 더듬는다. 그 손길이 따가운지, 섬세한 속눈썹 끝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아가씨! 일어나셨나요?"
휘장을 뚫고 들어온 리난의 목소리.
머리카락과 한가지로 팥꽃나무 꽃물이 여리게 든 속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대답이 없자 재차.
"아가씨, 들어가도 될까요? 어서 입궁 준비하셔야 해요."
공손한 말씨에 뚝뚝 묻어나는 다급함.
“들어와. 늦잠 자서 미안해.”
자신 때문에 늦었다니, 메이린의 입장에서야 당연히 미안할 수밖에.
“네?”
하지만 메이린의 사과를 듣는 리난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소녀의 당혹감이 얼마나 큰지 알려 왔다.
"아, 아가씨, 혹시 덜 나으신 건 아니죠?"
“뭐?”
반문하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던 걸까, 리난의 마른 몸이 움츠러들었다.
“감히 아가씨께 말실수했습니다. 부디 용서하셔요.”
조심스레 이편의 눈치를 살피는 붉은 눈동자가 둘. 메이린은 한숨을 폭 쉬었다.
본래의 메이린은, 아마도 꽤나 까다롭고 오만한 성격인 모양이었다. 어제 쉔잉의 귀족답다던 말과 지금 리난의 행동이 그에 대한 방증일 터.
“하긴.”
메이린의 나직한 목소리.
원래 세계의 보미도 까탈스러운 성격이었다. 단지 그곳에서는 귀족 집안의 영애가 아니니, 성질머리를 좀 눌렀을 뿐.
“예?”
“아냐. 화 안 났어. 목도 다 나았고.”
메이린은 서툰 손놀림으로 목에 맨 천을 풀어 보였다.
“그보다 서둘러야 하는 거 아니니?”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어서 일어나셔요, 아가씨.”
리난은 메이린을 반쯤 떠밀 듯하여 휘장 밖으로 데려가서는 다시 다른 내실로 이끌었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얼굴에 수증기가 훅 끼쳐 올랐다. 방 안 가득 들어찬 온기가 명절마다 가던 공중목욕탕을 연상시켰다.
조심스레 디딘 발바닥에 닿은 돌바닥이 까슬까슬했다. 진짜 목욕탕인가 싶어 살핀 방바닥 가운데에는 네모난 구멍이 움푹 파여 있었다.
구멍에 가득한 물에서는 연신 샛노란 꽃향기를 휘감은 물안개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메이린이 목욕탕에 들어가기 위해 응당 해야 할 일을 하려는 그 순간, 그녀의 손이 부드럽게 막혔다. 곁에 서 있던 리난은 그 자연스러운 행동을 제지하고 당연하다는 듯 메이린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 내가…”
메이린은 아주 어려서부터 손수 제 옷을 갈아입고 몸을 닦고 치장하던 현대인다운 반응을 내보였다.
“네? 뭘요?”
하지만 리난은 그런 메이린의 손을 간단히 막고서는 순식간에 옷을 벗겼다.
“어서 들어가셔요, 아가씨.”
“어, 어어…”
메이린은 한껏 당황해, 반쯤 혼이 나간 채로 따끈한 물에 몸을 담갔다. 그녀가 얼굴을 온통 벌겋게 물들이고서 멍하니 앉아 있는 동안, 리난은 그녀의 몸을 연신 닦았다.
“아가씨, 주무시는 거 아니죠?”
얼마나 지났을까, 리난의 목소리가 조심스레 물어 왔다.
“아, 아냐.”
메이린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건지, 때를 민 것도 아닌데 온몸의 피부가 매끈매끈 윤이 났다. 꽃다발 같은 향내가 뚝뚝 묻어나는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었는데도 전혀 엉키지 않았다.
“어, 아니, 물기 정도는 내가 닦을게. 옷을 가져와.”
“네? 한 번도 안 해보셨으면서 무슨 말씀이세요?”
메이린이 한 현대인으로서의 당연한 저항은 어렵잖게 무위로 돌아갔다.
그녀는 오래간만에 아주 어린 아이가 된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리난이 메이린의 물기가 마른 얼굴과 몸에 화장수를 바르고 속옷을 입힌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숱 많은 머리카락은 향유를 발라 참빗으로 쓱쓱 빗어 정돈하고. 무언가 씁쓰레한 향이 감도는 흰 가루를 천 뭉치에 묻혀서는 보송한 얼굴에 연신 두드렸다.
“아가씨, 이쪽으로요.”
속옷 바람의 메이린이 리난에게 이끌려 들어선 곳은 사방에 옷이며 장신구가 잔뜩 늘어선 방이었다. 그녀는 방 가운데에 세워진, 제 키보다도 높다란 거울을 마주하고 서야 했다.
옷이라도 제 손으로 입고, 머리 정돈이라도 손수 하고 싶었지만 그건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다. 대체 어떻게 머리를 묶어야 할지, 복식사 수업에서나 봤던 옷을 어찌 걸쳐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어서.
하여, 메이린은 체념하고서 거울 앞에 섰다.
리난의 섬세한 손이 새하얀 소복 위로 새하얀 비단 저고리를 걸쳐주었다. 폭은 좁아도 손을 전부 가리고도 남을 만치 긴 소매가 달린 흰 저고리에는 이른 봄의 산수유처럼 작고 노란 꽃이 조롱조롱 수 놓여 있었다.
이번에는 치마. 리난은 저고리 위로 옅은 산호색 바탕에 다홍색 산당화 꽃송이가 큼직큼직 수 놓인 치마를 둘러주었다. 치맛자락을 걸친 가슴 위로 다시 긴 붉은색 허리끈을 매 늘어뜨렸다. 허리끈에는 다시 옥패를 매단 새빨간 매듭 끈을 묶었다.
“아가씨께서 노란색을 좋아하지 않으시는 건 잘 알지만, 하루만 참아 주세요. 예법은 따라야 하잖아요.”
딱딱하게 굳은 메이린의 표정 탓일까, 리난은 연신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 말을 건넸다. 정작 메이린은 무어가 기분이 나빠서라기보다는 그저 아직도 얼떨떨해 멍하니 있었을 따름이지만, 아랫것으로서는 그런 속내를 알 리 없으니.
“가끔은 노란색도 괜찮아. 그냥 잠이 덜 깨어 그런 것이니 걱정 말렴.”
“네, 아가씨. 이제 의복은 다 갖추셨으니 잠시 앉으시어요.”
리난은 메이린의 다리 뒤로 등받이 없는 원통형의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메이린이 거기 앉자, 리난은 능숙하게 연보라색의 긴 머리칼에 향유를 바르고 놓은 리난이 비켜서자, 길쭉한 거울에 얼굴이 비쳤다. 희고 보송하게 마무리된 얼굴에 선명한 보랏빛 눈썹이 그려졌고, 입술과 뺨은 도홧빛으로 물든 채였다.
“응, 예쁘네. 그럼 이제 치장은 끝난 거야?”
“거의요. 팔 들어주세요. 피백도 걸치셔야죠.”
리난은 살며시 든 메이린의 팔에 길이가 2m는 족히 되어 보이는 하늘하늘한 숄을 걸쳐주었다.
“다 됐어요! 시간이 거의 다 됐으니 어서 가시어요.”
오른편에 선 리난이 제 왼팔을 들어 올리자, 메이린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자연스럽게 그 팔에 오른손을 얹었다.
두 사람이 발걸음을 재촉해 도착한 대문 앞에는 한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나으리, 아가씨를 모셔왔어요.”
“메이린, 내 딸, 아니지. 이제 이 문을 나서면 소주가 되겠구나.”
리난이 나으리라 부른 사내는 메이린의 아버지였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은사 자수가 놓인 붉은 관복에 검은 관을 쓴 그의 머리칼은 메이린과 같은 빛을 띠었다.
“아가씨, 잠시.”
리난이 팔에 걸친 붉은 비단을 펼쳐 들어 메이린의 머리 장식에 고정해 늘어뜨렸다. 희미하게 비치는 붉은 비단이 고운 얼굴을 완전히 가리자, 리난의 손이 그녀를 재차 이끌어다 수레에 얹은 가마 안에 앉혔다.
백호 가죽을 둘러놓은 듯한 몸뚱이에 새빨간 꼬리, 새하얀 머리를 한 말이 수레 가마에 매여 있었다.
“용케도 날짜에 맞춰서 흰 녹촉을 구하셨네.”
누군가가 지나가듯 하는 말.
붉은 술을 늘어뜨린 가마가 녹촉에 이끌려 대문 밖으로 나갔다. 대문 앞에는 검은 옷을 걸친 쉔잉이 서 있었고, 그 뒤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길이 무지갯빛으로 빛났다.
메이린의 아버지가 녹촉의 고삐를 잡고서 발걸음을 옮기자, 행렬이 무지갯빛 길 위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선두에는 오른손으로는 고삐를, 왼손에는 붉은 두루마리를 쥔 메이린의 아버지. 그 뒤로 녹촉이 끄는 메이린의 수레 가마. 가마 꽁무니에는 검은 옷의 쉔잉과 흰옷의 리난이 뒤따랐다.
메이린은 가마 바깥이 궁금해, 살며시 휘장을 들추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내민 얼굴이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칼바람. 살을 에는 차디찬 바람이 뺨을 할퀸다.
“으아, 추워!”
“아가씨이!”
메이린은 날카롭게 귀에 꽂히는 리난의 목소리도 무시하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낯선 세계가 너무도 궁금하여.
그녀는 아래를 바라보았다가 그대로 가마 밖으로 미끄러질 뻔했다. 가마가 지나는 무지갯빛 길은 정말로 무지개였던 걸까. 몽글거리는 흰 구름 사이로 디오라마의 미니어처 같은 집들이 보였다.
“아니, 진짜로 하늘 위야…?”
그녀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목소리에.
“그럼 어디겠습니까?”
뒤통수에 바로 쉔잉의 반문이 내리꽂혔다.
“아가씨께서 나고 자라신 남악궁도 구름보다 높은 곳에 있잖습니까. 황성은 그보다도 높은 곳에 있습니다. 중악인 감조산은 남악인 소요산보다 더 크고 높은 산이니까요.”
“그랬구나…”
“뭐, 구름 위의 사람에게는 의미 없는 이야기겠군요. 그보다, 그렇게 고개를 내미시면 위험합니다.”
“응…”
쉔잉의 목소리는 나지막이 흐르는 듯하지만, 왠지 모를 힘이 느껴졌다. 그래서 메이린은 자신이 윗전이라는 사실도 망각하고서는 고개를 집어넣었다.
“조금 답답해서 그랬어.”
“지루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소주. 거의 다 왔습니다.”
앞쪽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당연히 아버지의 것이건만, 말씨는 공손한 존댓말이었다. 가마 안으로 쏙 들어갔던 메이린은 깜짝 놀랐다.
“아버님, 어째서 존대를 하세요? 제가 불편해요.”
“당연한 일입니다. 제아무리 신하들 중 으뜸인 사공 중 하나라 하여도, 황제 폐하의 신하에 불과합니다. 폐하의 후궁이신 모든 소주는 황가의 일원이시니, 마찬가지로 신하보다 상전이시므로. 하오니 불편하더라도 참으셔야 합니다. 이 아비를 불경죄에 걸려 죽게 할 작정이 아니시라면.”
“네에…”
이 정도까지 전근대적인 신분 제도라니. 메이린은 교과서 속에서 튀어나온 유물에 이마빡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메이린은 저의 놀란 낯을 한참 동안 어찌하지 못했다. 그나마 얼굴을 덮은 베일과 가마 지붕 아래로 늘어뜨린 휘장이 파리해진 낯빛을 가려주겠거니 싶어,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본래의 메이린이었다면, 이 세계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라면 당연할 일을 불편하게 여기는 티를 내서 좋을 일은 없으니.
“앞을 보셔요, 아가씨.”
적잖이 달아오른 리난의 목소리가 메이린을 부른다.
“아가씨가 아니고, 소주.”
쉔잉이 리난의 말을 고쳐줬다.
“아, 맞다. 소주, 앞을 보셔요. 다 왔어요.”
어차피 잘 보이지도 않는데, 하는 혼잣말이 슬며시 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마가 멈추고 왼편의 휘장이 말려 올라갔다. 붉은 막이 한 겹 사라지자 그나마 시야가 트이고 바깥이 보였다.
트인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휘장을 말아 쥔 리난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편으로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다.
"어서 오시옵소서, 소주. 오늘도 참으로 고우십니다."
"…상궁."
어제 눈을 뜨자마자 나타나서는 죽은 줄 알았다느니 하며 어머니의 속을 긁어 놓았던 그 상궁이었다.
"우선 가마에서 내리시고, 저를 따라오시옵소서."
상궁은 메이린 일행을 커다란 대문 대신에, 그 옆의 쪽문으로 이끌었다. 물론 쪽문이라고는 해도, 그야말로 대문짝만한 대문보다 작을 뿐, 메이린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한 크기였지만.
“입궁례의 첫번째 순서는 진 소주십니다. 연습하셨던 대로만 하시면 되십니다.”
사극에서나 듣던 예스러운 존댓말이라니. 정말로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가게 되었구나 싶은 실감도 잠시.
상궁을 따라 들어선 문 안쪽 광장에는 꽤 많은 사람이 서 있었다. 젊고 고운 여인들과 그들의 아버지, 또 그들에게 딸린 시녀들.
서로 아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라, 정원은 조금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메이린의 일행이 들어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소리가 뚝 그쳤다.
그리고 쏟아지는 시선.
메이린이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하였으니, 오랜 기다림에 지친 것일까. 이편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빼쪽하다.
메이린은 저의 온몸으로 쏟아지는 따가운 눈총에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하여, 앞으로의 나날이 험난하겠구나, 싶은 걱정을 막 하려던 참이었다.
부우우. 둔탁하지만 우렁찬 나팔 소리가 안쪽 담장 너머에서 들려왔다.
“황제 폐하 납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