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폐하, 라고….”
눈길이 사내의 목소리가 울린 담장을 훑는다.
일정한 크기와 비슷한 모양으로 몸을 깎이고 오와 열을 맞추어 가지런히 쌓인 돌덩어리들. 사람 키보다 몇 배는 높은 곳에 얹힌 지붕과 그 너머에서 움직이는 양산과 깃발.
깃대를 눈으로 좇아 이른 곳에는 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제단.
제단 아래로 늘어진 계단이 그곳과 이 광장을 이었다. 계단은 대강 어림해 보아도 건물 두 층 높이는 족히 넘어설 만큼 높았다.
“어쩐지 목이 아프더라니.”
“네?”
베일 속 나지막한 혼잣말까지 들은 리난의 물음이 돌아왔다. 어찌나 섬세하고 충실한 종복인지.
“아, 아냐.”
메이린이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높은 곳의 문 바로 옆쪽으로 양산이 보였다. 황제가 나타날 때가 거의 다 되었다는 뜻이려니.
그녀는 주변의 다른 이들을 따라 부복했다.
예로부터 무얼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때에는 남들 하는 대로 따르면 중간은 간다 하지 않았던가.
숙인 머리 위로 문이 열리는 소리와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쏟아졌다. 그리고 발소리가 멈추자.
“모두 일어나라.”
근엄한 사내의 목소리. 아마도 황제일 테지.
메이린은 황제의 얼굴이 궁금했다. 하지만 황제의 승은을 얻지 못한 후궁은 그 얼굴을 똑바로 마주해서는 안 된다는 일기 속 구절을 떠올리며 자꾸만 올라가는 고개를 애써 숙였다.
“성황 172년 2월 1일, 성 황제 쟈오 푸예가 봉래허의 주인, 봉래서제의 명을 받들어 황가의 번영을 위해 후궁을 간택하였노라.”
황제의 뒤편에 있던 이 중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 두루마리를 펼쳐 들고는 입을 뗐다. 좀전에 황제 폐하 납시오, 하던 목소리의 주인인 듯했다.
“남악공 진 료츠의 여식, 진 메이린!”
첫번째 이름, 익숙한 그 이름이 호명되었다.
여전히 들지 못하고 있는 메이린의 턱 아래로 손이 디밀어졌다. 이쪽 세계에서의 아버지의 손, 뒤틀리지 않고 굳은살도 잡히지 않은 흰 손바닥.
그녀는 그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계단을 한 단, 한 단 오를 때마다 조금씩 커지는 가슴 속 소리. 소리가 커질수록 그에 비례해 높아지는 긴장감과 그 때문에 뻣뻣하게 굳어오는 목덜미.
아, 계단이 끝났다. 이 앞에는 황제가 서 있겠지.
메이린은 고개를 조금 숙인 채로, 내리깐 눈동자만 움직여 바닥을 훑었다. 앞쪽으로 늘어뜨려 진 베일 너머로 언뜻, 눈에 익지 않은 그림자가 비쳤다. 아마도 황제의 것일 그것으로 눈길이 향했다.
순간, 시야가 확 트였다. 줄곧 눈 앞을 가리던 베일이 걷힌 탓이었다.
밝아진 시야로, 황금빛 비단에 금실로 용을 수놓은 예복을 걸친 사내가 들어왔다. 눈은 여전히 내리깐 채인지라 목 아래만이 보일 뿐이었지만.
“과연, 남악국부인의 미색은 출중하기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 여식 또한 못지않구나. 간택 때도 보았으나, 다시 보니 한층 더 곱구나.”
황제가 메이린의 미모를 칭찬했다.
확실히 처음 눈을 떴을 때 본 어머니는 고요한 호수 위에 비친 달빛만큼이나 고운 얼굴을 했었다. 거울 속에 비친 메이린 역시 날카로운 눈매를 빼고는 그 얼굴을 쏙 빼닮았었고.
두 사람 다 미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쪽 세계의 심미안은 메이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남악공, 선적을.”
새 얼굴에 대한 메이린의 상념을 끊으며, 황제의 목소리가 울렸다.
“예, 폐하.”
메이린의 아비, 남악공은 제 딸의 손을 받쳐들었던 오른손을 놓고, 왼손에 줄곧 쥐고 있던 붉은 두루마리를 펼쳐보였다.
황제가 손에 쥔 금빛 바늘을 펼쳐진 두루마리 한중간에 갖다 댔다가 떼자, 바늘 끝에 빛무리가 어린다. 붉게 빛나는 실이 바늘 끝에 꿰여 조르르 풀려 나와 늘어지고.
어느 샌가 황제의 오른편에 한 사내가 다가서, 황금색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다.
황제가 그 손에 쥔 바늘을 금빛 두루마리에 가져다 댄다. 그러자 붉게 빛나던 실은 서서히 금빛으로 아른거리며 두루마리에 달라붙어 ‘진 메이린’이라는 글자를 이룬다.
“첩여의 위를 내리매, 앞으로 진 첩여라 이르노라.”
아, 본래의 메이린, 그녀의 일기에서 읽은 기억이 또렷하다.
후궁의 지위를 받으면 소매 속에 감춘 채인 두 손을 내밀어 교지를 받아 든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성은에 감읍하나이다.”
메이린은 둘둘 말린 교지를 받쳐 들고서 고개를 숙인 채로 발을 옮겼다.
아버지, 남악공의 곁을 떠나 황제의 곁으로. 황제의 왼편을 다시 지나쳐, 그 뒤편의 열린 쪽문으로.
등 뒤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발소리를 의식하며 문지방을 넘는다.
뒤편의 두 발걸음이 모두 문지방을 넘긴다.
슬슬 뻐근하게 아파오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면.
“진 첩여.”
옅은 회색이 섞인 청록색의 관복을 입은 사내가 부복하고서는 인사한다.
“가마에 오르시옵소서.”
그의 뒤편으로는 수레 가마가 제각기 청록빛 옷을 걸친 사내를 단 채, 줄지어 늘어섰다. 가마 행렬의 가장 앞에 있는 것은 그녀가 타고 왔던 수레 가마였다. 무지개 위를 달렸던 흰 녹촉까지 매인 그대로의.
문 안쪽으로 지나는 건 못 봤었다. 대체 어떻게 옮긴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주?”
의아해하는 사내의 목소리.
어색하게 행동하면 아니 되니. 메이린은 궁금증을 발등에 얹은 채 가마 안으로 들어섰다.
“정말이지….”
모르는 것투성이.
메이린은 내일부터 이쪽 세계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오늘은 너무 긴장했는지 피곤하단 말야.”
아무도 그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이 없건마는, 메이린은 누군가에게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매끈하게 다듬어 짜 맞춘 돌길 위로 바퀴가 굴러간다.
두 쌍의 발걸음이 뒤이어 타박타박.
세 쌍의 발과 두 쌍의 바퀴가 멈춘 곳은 자란재라 쓰인 현판 아래였다.
가마의 문을 가린 휘장이 걷히자, 아까의 사내가 나타났다. 아마도 그가 녹촉의 고삐를 쥐어 이곳까지 이끌었을 테지.
“진 첩여, 이곳이 소주께 배정된 처소인 자란재이옵니다.”
짧은 말을 마친 사내가 몸을 옆으로 돌리더니 그대로 부복했다.
메이린은 구김 하나 없이 반질반질 빛나는 사내의 등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뭘 어쩌라는 걸까. 도통 그 속내를 알 수 없어, 그저 빤히 바라볼 뿐,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주, 이자의 등을 밟고서 내리시면 됩니다.”
가마를 바지런히 따라 왔을 쉔잉이 바싹 붙어 속삭였다.
“뭐라고?”
도저히 이것만은.
멀쩡한 사람의 등을 발판으로 삼으라니.
메이린은 가마에서 고개를 내밀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외진 건물 주변으로는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손톱만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기, 일어나 봐요.”
그녀는 엎드린 사내의 뒤통수에 말을 건넸다.
“어, 어찌 소인에게 말씀을 높이시나이까. 부디 편히 말씀하소서.”
존댓말은 틀린 모양.
사내의 등이 한층 더 낮게 가라앉았다.
“음, 일단 좀 일어나 봐, 그럼.”
“예, 소주.”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메이린은 그제야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열 예닐곱 살이나 되었을까. 아직 수염도 자라지 않은 얼굴에는 애티가 채 가시지 않았다.
“너, 이름이 뭐지?”
“소인은 하공인 추샨이라 하옵니다.”
“그래, 추샨. 나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고 싶구나. 주변에 보는 눈이 없으니, 등은 밟은 셈 치고 그냥 내리겠다.”
“예, 예에?”
“못 알아들었느냐? 가마에서 좀 내리게 비키라지 않았더냐.”
자신을 추샨이라 소개한 그가 뒷걸음질 쳐 물러섰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 생겨난 빈자리에 메이린의 한쪽 발이 내려섰다.
폭은 넓어도 하늘거리는 얇디얇은 천으로 된지라, 치맛자락이 다리에 척척 감긴다. 겨를에 휘청하면서도 메이린은 아랑곳않고 가마에서 풀썩 뛰어내렸다.
“처소로 들어가자.”
“네, 네.”
아직도 얼떨떨하게 있던 추샨은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앞장서서 문을 열고 메이린을 자란재 담장 안으로 안내했다.
“자란재 소주, 진 첩여 납시옵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 보니, 메이린 외의 다른 후궁이 사용할 수 있는 처소는 없었다.
물론 후궁이 머무는 곳이니만큼 주방이나 궁인들이 사용하는 방 등이 함께 딸려서, 건물은 여럿이었다. 그 덕에 메이린은 지금 자신이 어떤 특권을 누리게 되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지만.
“진 소주, 어서 오시옵소서.”
자란재의 본채 앞에는 궁인들이 줄 맞춰 부복해 있었다.
좀전에 추샨에게 처음 인사를 받을 때도 그랬지만, 메이린은 이들이 저에게 엎드려 절하는 것이 거북살스러웠다. 아니, 아주 황송해 죽을 지경이었다.
환생했다지만, 그래 봐야 전생에서는 서른셋에 요절. 절을 받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절할 일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은 나이에 죽었으니.
“후….”
작은 한숨.
황제도 칭찬할 만큼 곱디고운 얼굴이건만, 어린 표정은 까끌까끌하다.
곱다고는 하여도, 잘 연마한 옥처럼 부드럽기보다는 채 가시를 쳐내지 않은 장미처럼 까탈스러운 인상을 거기다 보탠다.
덕택에 윗전을 기다리던 이들은 저 가벼운 한숨이 천 근짜리 돌덩이처럼, 만 길짜리 낭떠러지 끝처럼 느껴졌다.
“음, 우선 모두 일어나라.”
하나둘씩 일어나는 궁인들.
메이린은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고 입꼬리에 미소를 얹었다.
그저 절 받는 게 부담스러울 뿐이지, 이들을 괴롭힐 생각은 추호도 없으므로.
“내가 누구인지는 잘 알고 있을 것이고. 나는 앞으로 함께 지낼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가 많이 궁금한데 말이지.”
그러자, 앞줄에 서 있던 남자가 먼저 나섰다.
“감히 나서겠나이다. 소인은 자란재 총괄 상공 란웨이라 합니다. 제 뒤의 셋은 제가 직접 맡아 가르치는 아이들입니다. 이쪽에서부터 란지아, 란빙, 란우라 하옵지요.”
란웨이는 서른 살 언저리나 되었을까 싶어 보였다.
옥색에 가까운, 추샨의 그것보다 좀 더 선명한 빛의 청록색 관복 차림. 그리고 그 뒤의 셋은 추샨과 같은 빛의 옷을 걸쳤다.
아마도 관복의 색은 지위가 높아지면 선명해지는 거겠지.
“소주, 소인은 자란재 상궁인 여관, 주화이라 하옵니다. 이 아이들은 자란재에 속한 주궁으로, 링츠, 룬즈, 가오유라 부르시면 됩니다.”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것들을 짚어보는 메이린에게 다른 이가 말을 건넸다.
상궁인 주화이는 역시 청록색 옷을 걸친 채였다. 상공과 상궁, 하공과 주궁이 같은 급인 모양이었다.
“소녀는 여사인 바이쥬로, 따로이 소주를 모실 상궁입니다. 무엇이든 편하게 하명하시기를.”
메이린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이쥬라 소개한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생의 그녀보다도 젊어 뵈는 얼굴. 고작해야 20대 후반으로나 보일까. 그녀의 뒤에 줄 맞춰 서 있는 옅은 청록색 옷을 입은 궁녀들과도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상궁이라니?
방금의 주화이도, 태비전에 있다던 그 상궁도, 마흔은 족히 넘을 것 같았는데.
왜 그녀만 유독 젊은 걸까.
바이쥬는, 왠지는 몰라도 자신을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띤 메이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가 좀 젊지요, 소주?”
“아, 응. 좀 젊어 보이네.”
너무 빤히 바라보았던 걸까.
“소녀는 상궁으로 승진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답니다. 올해로... 24년 째가 되겠군요. 제아무리 천천히 늙는다지만, 저희 아랫것들은 나이를 먹지요. 소주들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24년?”
“예, 소주. 연륜이 없어 걱정되시나요?”
“아니, 아니다.”
머리가 멍하다.
이건 이쪽 세계의 아버지라 생각한 사람에게서 깍듯한 존대를 받는 것보다 더 놀랍다.
아무리 많게 잡아봐도 서른이 채 되지 않았을 법한 얼굴로.
상궁만 24년이라고? 승진이라고 했으니 그 아래인 주궁으로는 대체 얼마의 세월을 보냈다는 걸까.
아, 사실은 어마어마한 동안이었나.
“그럼 주궁으로는?”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을 얹어버렸다.
“열넷에 입궁하여 주궁으로 꼬박 50년을 채웠습니다.”
뒤통수를 너무 세게 맞아 눈알이 튀어나오는 것 같다.
“그, 그럼 도합 74년째라는 거구나.”
“물론이옵니다. 앞으로 남은 세월,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하여 소주를 모시겠나이다.”
눈앞이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