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메이린의 눈앞이 새하얗게 번져나갔다.
"소주!"
털썩, 메이린이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태의를 불러와!”
덕분에 자란재 담장 안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잽싸게 뛰어나간 궁녀 하나가 오래지 않아 태의와 함께 돌아왔다.
신선처럼 흰 수염을 가슴께까지 늘어뜨린 태의가 신중하게 메이린의 맥을 짚었다.
옆에서 그걸 보고 있는 리난이 저렇게 천을 덧대고도 맥을 제대로 짚을 수 있을까, 불안해하는 건 꿈에도 몰랐겠지만.
“태의 어르신, 저희 소주는 괜찮으신건가요?”
“아, 자네는 진 소주의 잉첩인가 보구먼.”
태의는 리난의 물기가 어룽어룽하는 눈동자를 한번 들여다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네에, 리난이라고 합니다. 헌데 소주는요?”
“너무 걱정 말거라.”
태의의 주름진 손이, 그가 들고 온 목함 안을 뒤적였다.
함에서 나온 손에는 조막만 한 향낭이 들려 있었다. 옅은 옥색으로 물들인 비단 주머니에서는 개운한 향내가 물씬 풍겼다.
그는 그 주머니를 가는 숨결을 들이마시는 메이린의 코 근처로 가져갔다.
“으...”
“소주!”
희게 질린 입술 새로 새는 엷은 신음. 힘겹게 들어올린 파리한 눈꺼풀.
“괜찮으세요?”
“응, 난 괜찮아. 그런데 이 분은...?”
사실 숨이 멎었던 것도 아니요, 실신했던 시간도 잠깐이건마는. 리난은 제 주인이 꼭 죽었다 깨난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달라붙었다.
메이린은 그런 제 종복을 살며시 밀어내며 제 시야에 들어온 남자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아, 처음 뵙습니다, 진 소주. 저는 태의인 쉔 쇼우밍입니다. 편하게 쉔 태의라 부르십시오.”
“아, 쉔 태의 님이로군요.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나요?”
“아이고, 님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소주. 부디 말씀을 낮춰 주시길 청합니다.”
아, 또.
메이린의 눈 앞에 선 이는 노인처럼 보였다. 관모 아래로 보이는 머리카락은 온통 서리가 앉았고, 수염 역시 딱 머리카락만큼 하얬다. 얼굴이며 손등은 또 어떤가. 쪼글쪼글하지는 않아도 드문드문 깊게 패인 주름마다 세월이 고여 있었다.
그런데도 하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침상 위에 깔린 매끈매끈한 비단 요를 단숨에 가시밭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녀는 애써 숨을 고르고 까끌거리는 입을 뗐다.
“아, 음. 아, 알았네. 그래서 여기는 왜 왔는지?”
“그야, 진 첩여께서 실신하셨다며 자란재 궁녀가 달려왔으니까요.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아... 음, 나쁘지 않네. 그런데, 기절했었다고?”
“네, 빈혈이 조금 심하시더군요.”
“아아.”
분명 그녀가 처음 눈을 뜬 곳은 병상이었다.
목소리도 크게 내기 어려운 통증. 벌어져 벌겋게 빛나는 살갗. 죽을 수도 있었다던 한 마디 말.
분명 피도 제법 많이 흘렸을 터. 빈혈이 심할 수밖에.
“입궁을 앞두고 조금 다쳤었지, 여기를.”
“아가씨!”
메이린이 손가락으로 제 목을 가리켰고, 그녀의 폭탄발언에 놀란 리난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정말로 그런...”
쉔 태의의 표정이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노인은 대체 무엇을 읽으려 두 눈을 저리도 가느스름하게 떴는지.
“그럼, 앞으로 큰 문제는 없겠지?”
“목을 다치셨다 하셨지만, 눈에 띄는 흉터는 없으니 괜찮으실 겁니다. 빈혈에 좀 무에 놀라신 데가 겹쳐서 실신하신 모양이온데, 이 또한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매일 식사에 조금 더 신경쓰시면 될 일입니다.”
“그렇구나.”
“예, 하오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몸을 보하는 약과 음식 처방을 보좌 여사에게 전해 두옵지요.”
“그래.”
메이린의 보좌 여사인 바이쥬가 방을 나서는 쉔 태의를 배웅하듯 따라나갔다. 아마도 그리 나가서 처방을 받아 둘 테지.
“소주.”
나직한 목소리.
방을 나서는 노인의 등을 노려보던 쉔잉이 입을 뗐다.
“응?”
“아, 그보다, 후우. 우선, 리난.”
쉔잉은 무언가 말하려다 리난 쪽을 돌아보았다. 흑요석을 닮은 눈동자와 마주한 리난은 그대로 일어나 방문을 닫았다.
“소주, 말씀은 항상 조심하셔야지요.”
“응?”
힐난하는 빛을 품은 검은 눈동자가 메이린을 바라본다. 하지만 정작 그 빛을 마주하는 메이린은 영문을 모른다.
“왜...?”
“몰라서 물으십니까? 후궁이 될 이는 몸도 마음도 흠 없이 정갈하고 깨끗한 옥돌과 같아야 한다 들었습니다. 헌데 크게 다쳤다는 건 대체 왜 말씀하십니까? 숨겨도 모자랄 판에요!”
“어...앞으로는 조심할게. 내가 부주의했어.”
“쉔 태의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마 조금씩 소문이 퍼지던 차였겠지요. 조금씩 생겨나던 들불에 메마른 바람을 불어넣은 셈이 되었습니다.”
어차피 흉터가 남은 것도 아닌데, 하는 말이 거품이 되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가라앉았다.
“뭐, 그래도 이렇게 말짱하잖아? 누구 덕분에 말이지.”
메이린의 깊은 청보라색 눈동자를 반 넘어 가리운 눈꺼풀이 초승달 모양을 그린다. 고운 얼굴에 그린 말간 미소가 아득하게.
네 덕분에 살았잖아, 하는 말을 머금은 눈웃음.
“휴, 앞으로는 조심하시리라 믿겠습니다.”
“응, 믿어줘.”
제아무리 단단해 보이는 쉔잉이어도 자신을 띄워 주는 데에는 약한 모양이었다.
“소주,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바이쥬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잠깐의 정적을 가르고 들려왔다.
“응, 들어와, 라.”
메이린은 익숙한 말투에다가 한 음절을 덧붙여, 사극에서 보았던 고풍스러운 말투를 흉내냈다. 아무래도 이쪽 세계에는 그편이 더 나을 성 싶었으므로.
문이 훌쩍 열리고 들어선 바이쥬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뒤로, 비슷한 형식의 옷을 걸친 여인 셋이 각자 무언가를 받쳐들고서는 사이좋게 들어섰다. 서로를 향하는 눈초리는 퍽 사나운 것과는 별개로.
다만 세 사람 모두 머리 장식이며 옷 장식이 바이쥬의 그것보다는 조금씩 더 화려한 것으로 보아, 모시는 주인은 메이린보다 높은 이일 것이다.
“진 첩여를 뵙습니다.”
세 여인이 입을 모아 인사하며 절했다.
메이린은 다른 것보다 하나 둘 셋, 도 하지 않고서도 합창하듯 박자가 딱 맞는 인삿말에 감탄했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세 사람은 다시 일사불란하게 일어섰다. 그 와중에 꾸러미는 미동도 않은 것은 덤이었다.
“저는 황후마마를 모시는 상궁, 리 타오진입니다. 진 소주께 마마의 하사품을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바이쥬는 그녀가 내민 물건을 대신 받아다 메이린에게 내밀었다.
크지는 않지만, 매끈하게 윤이 나도록 다듬어진 옥 상자가 말간 우윳빛 광택을 뽐냈다. 상자의 모서리와 뚜껑에는 금 장식이 번쩍거렸다.
“황후마마께서는 북방의 진상품을 보내셨지요.”
메이린은 그 안에 든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늘어놓는 타오젠의 말을 흘려들으며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퍽 소담스레 핀 장미 한 송이가 나왔다.
“우와.”
메이린은 그 장미꽃을 보고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꽃잎은 종잇장처럼 얇게 편 순금이요, 꽃대는 손가락만한 굵기의 금비녀이니. 주먹만한 꽃송이 아래 늘어진 금 꽃잎에 입혀진 붉은 법랑이 투명한 광채를 자랑한다.
메이린이 비녀를 들어올리자, 조롱조롱 엮인 꽃잎들이 서로 부딪혀 맑은 소리를 울린다.
“황후마마께 정말로 감사하다 전해 주게.”
“예, 소주.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타오젠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나가자, 셋 중 왼쪽에 서 있던 상궁이 나서려 했다. 하지만, 가운데 있던 상궁이 그녀의 말문을 막고서 먼저 입을 뗐다.
“저는 려비 마마의 궁에서 나온 상궁, 리 쥬타오라 합니다.”
그냥 상궁임에도, 태도가 사뭇 당당하고 오만하게까지 보였다. 어차피 메이린이야 이쪽 세계의 법도를 잘 모르니 별 생각이 없었지만, 리난의 표정은 썩어들어갔다.
만일 다른 후궁, 그러니까 법도에 능한 후궁과 다른 보통의 상궁이었다면 난리가 났을 일이다.
“려비의 려는, 폐하께서 손수 반려의 려 자를 따다가 내리신 봉호랍니다. 폐하께서 제일 총애하시는 후궁이지요.”
쥬타오가 내민 하사품 꾸러미를 대신 받아다 전한 바이쥬가 메이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호가호위라 하지 않던가. 쥬타오의 윗전인 려비는 보통의 후궁이 아니었으니, 그녀가 손수 부리는 상궁 역시 보통의 상궁들과는 처지가 달랐다.
당연히 그 태도 역시 저리도 방자할 수밖에.
“저희 마마의 친정인 서악에서 보내온 전래 비단입니다. 살펴 보시지요.”
받아든 꾸러미에서 나온 것은 옅은 보라색에 금사와 붉은 실로 복숭아꽃이 큼직하게 수놓인 자수비단이었다. 복숭아꽃이 없는 여백에는 은사를 이용해 새끼손톱보다 작은 연분홍색 진주를 일정한 간격으로 꿰매여 있었다.
“어머, 예쁘다. 려비 마마께서는 통도 크, 아, 배포가 크신 분이구나.”
“예? 예. 그럼 진 첩여께서 참으로 좋아하며 감사해하더라고 고해 올리겠습니다.”
“그리 전해드리면 고맙겠네.”
쥬타오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나가버렸다.
그 뒤에 혼자 남은 상궁은 마흔이 될까말까 싶어 보였는데, 퍽 소심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실제 성격도 얼굴 생김만큼 소심한 건지, 저를 비웃는 쥬타오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우선 고개를 들게. 예까지 무슨 일로 왔는지 얘기해야지.”
“아, 앗 네. 진 첩여께 인사 올립니다. 소인은 귀비 마마를 모시는 여관인 상궁 장 진윤이라 하옵니다. 귀비 마마의 선물을 가져 왔습니다.”
“선물? 하사품이 아니라?”
“네, 마마께서 선물이라 하셨습니다.”
귀비는 한 명, 비는 세 명까지 뽑는다. 그렇다면 이편이 황후라면 몰라도 려비보다는 높은 사람의 궁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의아스러워 반문하며 바라본 진윤의 얼굴이 불그스름했다. 애써 참으려 하는 것 같지만, 눈가에는 물기가 어룽어룽한데다 흰자위까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저희 마마는, 그런 귀한 물건을 하사품으로 턱턱 내놓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십니다."
거기까지 말한 진윤은 고개를 다시 숙였다.
투두둑, 그녀의 발밑에서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의 눈가는 세게 문질러 조금 붉어지긴 했으나, 물기는 싹 가셔 있었다.
“이상한 소리를 했군요. 송구하옵니다.”
진윤은 제가 가져온 꾸러미를 바이쥬에게 내밀었다.
낡아 퇴색된 비단을 풀어헤치자, 손때 묻은 목합과 곱게 접힌 조각보가 나왔다.
“찬합...?”
“예?”
“아, 아냐.”
왠지 눈에 익은 모양새에 메이린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그 나직한 말소리를 들은 쉔잉의 반문을 얼버무려 버렸다.
“황후 마마나 려비 마마처럼 대단한 것은 아니옵니다. 그건 경대보이옵고, 합 안에 든 것은 저희 마마께서 손수 만드신 간식이지요.”
메이린은 우선 경대 위에 얹을 조각보를 펼쳐 보았다.
색도 크기도 제각각인 천조각들이 서로 물려 고운 무늬를 이룬 조각보에는, 은사로 살구꽃과 살구 열매가 수놓여 있었다. 게다가 어딘지 모르게 달달한 향기까지 은은하게 났다.
“귀비 마마는 센스, 아니, 음, 심미안은 물론 솜씨도 대단하시구나.”
“귀비 마마의 자수 솜씨는 궁 안의 여공들도 따르지 못할 정도로 뛰어나지요.”
“그렇구나.”
이번에는 간식이 들어가 있다던 나무 합으로 메이린의 손길이 향했다. 찬합처럼 생긴 모양새답게 음식을 넣어서 들고 다니는 통인 모양이었다.
뚜껑을 열자, 접시에 담긴 자그만 과자가 나왔다.
동글납작한 모양의 과자 위에는 아주아주 옅은 분홍색 꽃송이가 얹혀 달콤한 향기를 피워댔다.
“저희 마마께서 손수 만드신 행인소랍니다. 위에는 살구꽃을 얹어 장식했지요.”
과자에서 폴폴 풍기는 향기는 향수를 떠올리게 하기보다는 식욕을 자극했다.
그래서일까, 메이린은 자신도 모르게 과자를 하나 집어들어 입에 넣고 말았다.
“와, 맛있어!”
그녀도 모르게 나온 탄성.
높은 사람이 만들어 줘서가 아니라, 정말로 맛있다.
촉촉하고 쫄깃쫄깃한 떡 같은 껍질 안으로 오도독 하고 고소한 과자가 씹힌다. 바삭바삭하지만 결코 턱에 부담이 갈 만큼 딱딱하지는 않은, 딱 적당한 식감. 바삭거리는 와중에 씹히는 쫀득쫀득한 말린 과육은 아마 살구의 그것이겠지.
“아, 한 개만 더...”
메이린은 과자가 너무 빨리 사라진 것 같아 아쉬워, 다시 과자로 손을 가져갔다.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심약하고 소심하게만 보이던 상궁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메이린은 그 미소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입 속의 과자를 바지런히 씹었다.
혀에 닿는 첫 맛은 매끈매끈하면서도 시간이 담뿍 들어간 단맛. 그 단맛을 가르면 어딘지 아몬드같은 느낌의 고소한 풍미가 튀어나온다. 그 고소함이 채 지루해지기 전에, 말린 살구의 새콤달콤한 맛이 비집고 솟아오른다.
오독오독, 씹으면 씹을수록 입 안에 살구꽃 향기가 살구씨의 고소한 향취와 뒤섞여 가득찬다.
“아, 그러고 보니 귀비 마마는 행인소를 아주 잘 만드셨죠? 듣기로는 폐하도...”
“진 첩여께서 그리 맛나게 드셔주시니, 꽃이며 살구를 주우러 다닌 게 뿌듯하옵니다.”
진윤이 바이쥬의 말허리를 자르며, 메이린에게 말을 붙였다.
“아, 내가 정말정말 감사해하더라고 귀비 마마께 전해 주시게.”
“물론입지요. 제가 보고 들은 그대로만 고해 올리면 아마 저희 마마께서 몹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진윤은 허리를 깊이 숙여 절하고는 방을 나섰다.
메이린은 나가는 진윤의 등에서, 창문으로 눈을 돌렸다.
창문에 바른 반투명한 장지를 통해 한낮의 햇살이 스며들어왔다.
“저기, 바이쥬.”
“네, 소주.”
“나가봐도 될까? 아직 날도 밝은데, 산책하고 싶어.”
“물론이지요. 소인이 안내하겠습니다.”
메이린은 리난과 바이쥬를 거느리고서 처소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