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붉은 눈이 흔들렸다. 렌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년이 몸을 돌려 달려갔다. 그녀가 소년의 멀어져가는 검은색 뒤통수를 쳐다보다 우유 병을 다시 들고 발을 움직였다.
“하, 다 왔다.”
렌이 우유 병을 내려놓고 뻐근한 어깨를 돌려 풀었다. 문득 방금 전 만난 소년이 떠올랐다. 햇빛을 본 적 없는 듯한 하얗고 깨끗한 피부에 가득 했던 붉은 생채기들. 렌의 손이 움찔하고 떨렸다.
‘쓸모 없는 것 같으니!’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너를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더러운 계집애 같으니!’
가끔씩 떠오르는 악몽 같은 기억이었다. 울부짖었던 그날이 다시 떠오르는 듯 했다. 그 작은 소년이 렌에게서 그날을 떠오르게 했다. 상처받은 듯한 소년의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후벼 팠다. 그래서 아끼던 약을 버렸는데도 화가 나질 않았다. 그의 상처가 보이는 듯 해서.
렌은 가볍게 숨을 들이 마쉰 뒤 다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미소는, 그날 이후 그녀의 얼굴에 스며들은 습관이었고 상처 많은 자신을 가려주는 방패였다.
“렌!”
저 멀리 제임스와 소피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괜찮아. 이번엔, 이번에는 다를 거야. 그럴 거야. 렌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피!”
“마들렌! 오랜만이야!”
소피의 친구인 마들렌이 그녀의 집에 놀러왔다. 렌이 그들의 집으로 온지 이틀 째 되는 날 이었다.
“안녕하세요, 마들렌 부인.”
“네가 렌이니? 갈색 머리가 아니네.”
마들렌의 말에 렌의 미소가 살짝 흐려졌다. 루의 갈색 머리. 작은 소년의 머리칼 색깔이 렌은 부러웠다. 갈색 머리칼만 있었다면 자신도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
“렌, 표정이 그게 뭐니. 예의 바르지 못하게.”
소피가 차갑게 말했다. 제임스는 말을 팔기 위해 도시로 가 있었다. 그는 렌에게 미안하다며 말을 했었다. 렌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 참, 렌. 내 딸 아이인 안나 란다. 인사 하렴.”
마들렌의 뒤에는 백갈색 머리의 작은 소녀가 서 있었다. 소녀는 렌의 또래 였다, 안나의 갈색 눈이 일그러졌다.
“안나. 뭐 하니. 렌이랑 나가서 놀렴. 수줍어 하지 말고, 어서.”
그녀의 말에 안나가 인상을 쓰며 렌을 바라보았다. 렌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나는 할 수 없다는 듯 마당으로 작은 발을 움직였다. 렌이 안나를 뒤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
“저 아이가 렌이구나? 루를 닮은 남자 아이를 입양하려고 했던 거 아니 였어?”
“...뭐, 그렇게 됬어.”
“아, 그렇구나. 그런데 저 애는 괜찮은 거 맞아?”
“뭐가?”
“피너슨 부인이 입양한 애가 글쎄, 전에 입양된 집에서 도둑질해서 쫓겨났었데.”
“뭐? 그게 정말이야?”
소피가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마들렌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정말이지 그럼. 그래서 피너슨 부인이 확인해 보니까, 고아원에서 그걸 깜쪽같이 숨기고....”
마들렌과 소피가 나누는 대화가 바람을 타고 고스란히 들려왔다. 렌이 작은 손을 꼬옥 쥐었다. 분홍색 눈이 마구 흔들렸다.
‘너야! 네가 분명해!’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렌이 얇은 목을 손으로 감쌌다. 그 때의 감각이 되살아 나는 것 같았다. 불안한 듯한 소녀의 모습에 안나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 아파?”
퉁명스러운 목소리였으나 걱정스러운 말 이었다. 렌이 숨을 가다듬었다.
“아,아냐. 그나저나 안나라고 했지? 반가워.”
“흥, 친한척 하지마. 더러운 게.”
렌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많이 깨끗해진 건데. 소녀가 머슥하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넌 뭐가 그렇게 좋아서 실실대니? 실없게.”
“.....”
넌 아무 것도 모르면서. 렌이 목 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렌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습관처럼. 밝게. 환하게. 이렇게 하면, 상처로 가득한 자신까지 밝고 환해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