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렌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올리비아의 미소가 일그러졌다.
“내가 평민인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도대체 그 푸른 피가..”
도대체 그 푸른 피가 뭐길래.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 말을 하게 된다면 아마 자신은 귀족 모독으로 죽게 되겠지. 그럼 소피는? 끝까지 날 위했던 제임스는? 렌이 바람 빠지는 웃음 소리를 냈다. 나, 겁쟁이구나. 정말 겁쟁이야. 사람이 눈 앞에서 무참히 짖밟히는 데도, 말 한마디 조차 할 수 없어. 발에 짖눌린 백금발 머리의 소녀가 보였다. 안나. 왜 저 아이가 저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지? 나한테 하면 되잖아. 나는 저런 것쯤 몇 번이고 당해 봤는걸. 그래서 알고 있단 말야. 저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느낌이 어떤지. 이길 수 없어서 당하는 게 아니다. 그저 둘러싼 환경이, 상황이. 그래서 힘없이 당해야만 할 때의 기분이...
“당장 그만해.”
여기서 아마 물러선다면 자신은 평생 그녀의 눈빛을 기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눈빛은, 렌이 아주 작은 소녀였을 때 가졌던 눈빛이니까. 간절히 보내는 도움의 손길이었으니까.
“감히! 감히 내-”
올리비아가 분노에 차서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순간 붉은 색이 렌의 시야를 가렸다.
“감히 뭐?”
“너, 네가 왜...!”
카틀레야였다. 아름다운 소녀가 보였다. 렌은 순간 그녀를 보고 안도 했다.
“왜 내 친구를 못살게 구는 거야.”
그녀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에 분홍색 눈동자가 커졌다.
“감히. 감히 네가.”
카틀레야는 레이틴 후작 가의 단 하나 뿐인 딸이었다. 또한 그녀는 레이틴 후작 가의 정식 후계자였다.
“..레이틴 후작 영애. 당신이 끼어들 일이-”
소피아 영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그녀의 무리들은 카틀레야의 등장에 혼란을 감추지 못했다.
“네가 끼어들 일도 아니지.”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예의 없을 수가!”
소피아 영애가 소리쳤다. 그녀는 처음 겪는 모욕을 참지 못 했다.
“이름도 모르는 넌 뭐야?”
“저, 저는... 드리젠 가문의-”
그녀의 말에 카틀레야가 비소를 흘렸다.
“드리젠 가문? 그게 어디지. 전혀 모르겠는 걸.”
“....”
소피아의 얼굴이 수치심에 붉게 달아올랐다. 앙 다문 입술이 떨렸다.
“아무리 후작 가의 영애라고 해도, 올리비아 영애를 모욕하다니. 이건 말도 안돼요!”
뒤에 서 있던 귀족 가 영애가 소리쳤다.
“왜 그래, 너네들이 한 거랑 똑같은데? 내 친구한테, 니들이 한 짓이랑.”
카틀레야가 눈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말에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알았으면 다신 건들지 마. 똑같이 돌려 줄 거야. 알았지?”
서늘한 그녀의 말투에 올리비아의 눈이 가늘어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부들 부들 떨리는 꽉 쥔 주먹도.
“카틀레야.”
마침내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미소가 짙게 드리워진 채 였다.
“오늘 일을 후회할 거예요.”
그녀의 말에 카틀레야의 한 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리고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글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
말을 끝내고 카틀레야는 렌을 이끌고 유유히 그 곳을 빠져나왔다.
“어, 어떻게 온 거야?”
“....”
카틀레야는 말이 없었다. 마침내 둘 뿐만이 남자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땠어! 나?”
“뭐, 뭐?”
“나! 어땠냐고!”
붉은 머리의 소녀가 방방 뛰며 소리쳤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발랄한 미소였다. 렌도 그녀를 보며 활짝 웃었다. 좀 전 까지 느껴졌던 한기가 사라지고 따뜻한 온기가 그녀를 휩쌌다.
“와, 나 진짜. 꽤 잘한 거 같아. 그지?!”
“응! 맞아! 너무 멋졌어! 어떻게 타이밍을 그렇게 잘 맞춘 거야?!”
“아 진짜 나 감 좋은 거 알아줘야 돼. 완전 완벽한 타이밍!”
두 소녀는 크게 소리치며 복도를 총총 뛰어갔다. 환한 미소를 띈 채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