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5월 17일 오후 7시40분 본정2정목 삼목원
삼목원 앞에 도착한 에노모토의 표정이 어두웠다. 평소라면 좋아하는 복어요리를 천천히 즐길 생각에 들떴겠지만, 오늘은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와 내각총리대신 우가키 가즈시게와 함께하는 자리였다.
삼목원은 음식 맛도 맛이었지만 고급요릿집답게 조용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격인 곳이었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에노모토는 지배인을 찾았다. 그는 오늘자리가 귀중한 자리임을 여러 번 강조했다.
조용한 방을 안내 받아 기다리니 지배인이 가벼운 다과와 차를 내왔다. 담배를 피우고 차를 홀짝이며 기다리니 금방 경무총감과 내각총리대신이 도착했다.
에노모토는 담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경무총감님 내각총리대신님 오셨습니까. 어서 앉으세요.”
“호 에노모토 경무국장 오랜만이구만. 그래 아버님은 잘 계시고?‘
내각총리대신이 물었다.
“예. 내각총리대신님 자주 찾아뵙는 다는 것이 요즘 경성 치안이 어려워 발걸음 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에노모토가 아양을 떨자 경무총감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우리 에모노토군이 요즘 고생이 많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대신님.”
“그런가? 에노모토 이집은 뭘 잘하나?”
내각총리대신이 자리에 앉아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며 말했다.
“복어요리를 아주 잘하는 집입니다. 아주 마음에 드실 겁니다.”
“기대 되는구만.”
이윽고 음식이 차려졌다. 입맛을 돋우는 복어껍질요리가 먼저 나오고 이어서 복어회가 차려졌다. 가벼운 사케와 곁들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음식이었다.
어느 정도 음식과 술이 돌자 경무총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신. 최근 경성에 주사옥(아편소굴)이 많이 늘었는데 그 중심에 조선인이 있다합니다. 아직 확실하진 않아 별도로 보고는 드리지 않았으나 에노모토군의 말에 따르면 그 대상이 일본인이라 합니다.”
내각총리대신은 복어회에 이어 나온 튀김을 뒤적거리다 말했다.
“주사옥은 나약한 조선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소굴 아닌가? 근데 우리 대일본제국의 시민들이 마약에 그리 취해있다니? 경무국장 자네가 이야기해보게.”
에노모토는 입에 넣었던 회를 황급히 씹어 삼키곤 말했다.
“크흠. 최근 제가 조사해본 바에 따르면 새로운 형태의 주사옥이 늘었습니다. 기존의 주사옥보다 값이 비싸고 시설이 좋은데 그렇다보니 주 고객이 일본인이라 합니다.”
내각총리대신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곤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그럼 잡으면 될 것 아닌가?”
태연하게 담배연기를 내뿜는 내각총리대신을 보는 에노모토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경무총감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 대신! 에노모토군이 말주변이 많이 부족합니다. 사실 오늘 만남을 청한 것도 주사옥 관련해서 에노모토군.......‘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경무총감을 무시하고 에노모토가 말을 이었다.
“내각총리대신님! 특수마약수사부를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에노모토가 끼어들자 경무총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노모토! 지금 뭐 하는 것인가!”
내각총리대신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경무총감에게 손짓을 했다.
“괜찮아. 이야기 해봐. 특수마약수사부?”
“예. 제가 조사해본 바에 따르면 지금 주사옥을 운영하고 마약을 유통하는 자들은 철저히 대일본제국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독립군이 배경에 있다 보여 지는 증거입니다. 부디 위대하신 천황폐하의 시민을 마약의 구덩이로 빠트리려는 자들을 잡을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에노모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흠.....”
내각총리대신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곤 경무총감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특수마약수사부를 창설하면 에노모토 자네가 모두 책임 질 수 있나?”
내각총리대신은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는 경무총감의 얼굴에 담배연기를 훅 내뿜었다.
에노모토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납작 숙이며 말했다.
“대일본제국과 천황폐하를 위해 제 한 몸을 바치겠습니다.”
“알겠네. 알겠어. 경무총감 들었는가? 자자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이러면 쓰나? 한 잔 받게.”
내각총리대신은 호탕하게 웃으며 에노모토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두 사람사이에서 경무총감만 얼굴이 불그스레했다.
세 사람이 잔뜩 흥에 취해 삼목원을 나선 것은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비틀거리며 거리로 나서는 내각총리대신을 발견한 그의 운전기사가 황급히 뛰어왔다. 인사를 하곤 내각총리대신을 부축했다.
“대신! 편히 쉬십시오.”
경무총감과 에노모토는 차에 오르며 기분 좋게 웃는 내각총리대신에게 인사를 했다.
“총감님도 편히 쉬시고 내일 뵙겠습니다. 내일 특수마약수사부 창설에 관한 보고서 제출하겠습니다.”
경무총감은 말없이 에노모토의 어깨를 두들기곤 차에 올랐다. 에노모토는 출발하는 차 뒤에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혼자 남은 에노모토는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손바닥에 탁탁 쳤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손짓을 했다.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 이정훈이 황급히 뛰어왔다.
“예. 경감님. 바로 댁으로 모실까요?”
에노모토는 담배연기를 허공에 흘리며 말했다.
“혼자 걷고 싶어. 먼저 들어가.”
“시간이 늦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에노모토는 말없이 손을 저었다.
머뭇거리던 정훈이 자리를 떠나자 에노모토는 다 피운 담배 멀리 튕겼다. 그는 허공을 응시하다 어둠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에노모토가 향한 곳은 본정2정목에서 20분가량 떨어진 피맛골이었다. 술에 취한 취객들이 꽤 있긴 했지만 골목은 한산했다. 자정이 지난시간이라 대부분 가게가 문을 닫은 것이다.
취객들 사이를 지날 때마다 땀내에 섞인 술 냄새가 지독하게 풍겼다. 그도 그럴 것이 피맛골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최하층 노동계층이었다.
익숙하게 골목. 골목을 지나 도착한 곳은 불 꺼진 돼지고기집 앞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어이. 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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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5월 18일 오전 10시 명치정 경성주식현물취인소
경성주식현물취인소는 이른 아침부터 모여든 인파로 시장바닥과 다를 바 없었다. 한순간에 대박이 난 사람부터 한순간에 알거지가 된 사람까지, 가지각색의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거나 한껏 자랑을 늘어놓기 바빴다.
사무실에서 설렁탕을 먹고 나선 강두는 인파를 뚫고 취인소로 들어갔다. 미두왕의 등장에 소위 개미로 불리는 투자자들은 소란스러워졌다. 지난 한달 간 미두시장은 하락장을 이어오고 있었다. 한때 쌀 한 석 당 16원까지 치솟았던 시세가 지금은 8원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매일 미두시세를 파악하기 위해 취인소 찾던 투자자들이 강두의 등장에 소란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은 눈을 밝히고 강두가 쌀을 매수하는지 매도하는지에 집중했다.
강두에게 다른 투자자들의 시선이 주목되는 것은 익숙한 일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빠르게 1만6천원을 들여 쌀 2천석을 매수했다. 미두시세는 일본의 손에서 움직인다. 그는 이른 아침 오카사취인소의 미두시세가 크게 올랐다는 전보를 받았다.
미두왕 김강두가 쌀 2천석을 매수했다는 소식은 금방 경성전체에 퍼져나갔다. 그 덕분에 취인소는 전장에만 약 200명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미두거래를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한 강두는 오전 내 업무를 봤다. 그는 중요한 서류들만 처리를 하곤 평소보다 일찍 사무실을 나섰다. 대부분 점심을 설렁탕을 배달해 해결했지만 오늘은 사해루를 찾을 요량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은 일이 있으면 항상 짬뽕과 양장피를 먹는다.
점심시간 사해루는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강두는 평소보다 일찍 나왔음에도 줄을 서야하자 괜히 직원들을 타박했다.
푸짐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한 강두는 평소처럼 라무네를 한 병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이제 길어야 보름이면 1만6천원이 2만6천원이 되어 돌아올 것이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명치정 일대를 바라보았다. 그가 즐기는 유일한 삶의 낙이었다.
‘똑똑똑’
강두는 노크소리가 들리자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네. 들어오세요.”
진희였다. 그녀는 카멜(담배) 세 갑을 조심스럽게 책상에 올려놓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빠가 풀려났다고 연락이 왔어요. 사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진희는 평소의 도도한 모습과 달리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말했다.
강두는 진희가 건넨 담배의 포장을 뜯으며 말했다.
“뭐 그런 것 가지고 그럽니까. 담배는 마음이니 받겠습니다.”
“저.. 사장님. 오빠가 사장님이 도와주신 걸 듣곤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는데 저희 형편에 비싼 요릿집은 못가도 꼭 대접을 하고 싶은데.....”
진희의 말에 강두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럼 오늘 저녁 7시 식도원 예약하세요.”
강두의 말에 진희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식도원은 비싸기로 소문난 고급요릿집이었다. 강두는 진희의 반응을 지켜보다 카멜 한 개비를 입에 물며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제가 삽니다. 걱정하지마시고 예약하세요. 고생했으니 좋은 음식 드셔야죠. 이만 나가보세요.”
“어.....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진희가 사장실을 나가자 강두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에 담배연기를 흘렸다.
아카시 모토지로 경무총감은 에노모토가 건넨 보고서를 읽다 눈을 치켜떴다. 특수마약수사부를 창설부터 인원구축계획, 수사방향까지 완벽했다. 오랜 시간 고민하고 기획했음이 분명했다.
경무총감은 보고서를 책상에 올려놓고 안경을 벗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기획은 완벽했다. 하지만 마약유통을 봐주는 권력이 있을 것이란 예상은 위험했다. 총독부 아니 천황폐하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는 수사기획이었다.
“에노모토. 자신 있나? 자칫 잘못되면 자네뿐만 아니라 나도 위험해.”
“예. 알고 있습니다. 총감님. 무조건 일망타진 하겠습니다.”
경무총감은 안경을 쓰고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책상에 톡톡 두드렸다.
“좋아. 오늘부터 바로 진행해. 명심해. 만일하나 문제가 생기면 난 내가 살기 위해서 자네를 버릴 거야. 그럴 수밖에 없어. 책임은 에노모토 자네가 지는 거야.”
“예. 총감님!”
경무총감실을 나온 에노모토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지난 몇 개월 머릿속에서 수십 번을 그려온 기획을 드디어 실행하는 순간이었다. 에노모토는 그대로 경무국을 나섰다. 그는 입구를 지키는 순사에게 뭔가를 일러주곤 인력거를 잡았다.
“아현북리(현재 북아현동) 후루사토 앞으로 가지.”
“후루사토라면 최근에 생긴 다방 말씀입죠? 금방 가겠습니다.”
인력거가 출발을 하자 에노모토는 눈을 감았다. 오랜 시간 기획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눈을 감고 얼굴에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는 인력거가 멈출 때까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인력거가 멈춘 후루사토는 최근에 문을 연 신식다방이었다. 에노모토는 운전수에게 20전을 건넸다.
“아이고 이리 20전이나 주시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평소보다 많은 돈을 받은 운전수는 활짝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는 다른 손님이 없나 주위를 둘러보다 화려한 양산을 쓴 여성에게 다가갔다.
에노모토는 운전수가 여성을 인력거에 태우는 것을 지켜보다 잰걸음으로 후루사토를 등지고 걷기 시작했다. 그가 향한 곳은 허름한 토막집들이 모여 있는 골목이었다.
토막집은 그나마 돈벌이를 하는 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지만 거지움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낮부터 술에 취해 잠든 사람들, 멍하니 앉아 언제 감았는지 모를 머리를 긁적이는 아이들, 코끝을 자극하는 지독한 냄새.
에노모토는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막았다. 그는 인상을 쓰면서도 토막집마다 기웃거렸다. 찾는 사람이 있었다. 최근에 아현북리 토막집으로 이사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사실 토막집들이 주소가 따로 없기도 했다.
한참을 토막집들을 기웃거리던 에노모토는 술냄새가 고약하게 풍기는 집 앞에 멈춰 섰다. 그는 넝마가 된 옷을 입고 골아 떨어져 있는 사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